저도 구식 한국남성답게 마초를 우상화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성차별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사람 뒤를 10년 동안 졸졸 따라다니고 딸을 키우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더군요.
남자들 사이에서도 내향적인 성격과 외향적인 성격이 있는데 어느 성격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며 그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듯이, 여성의 체형, 사고, 행동, 가치관 등도 남자인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남성의 마초적인 시각으로 보면 여성은 상대적으로 분명한 장단점을 가집니다. 그런데 남성의 시각으로 봤을 때의 장점인 것이지 여성의 시각으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남성의 시각에서 벗어나 여성의 시각도 존중하고 이해하며, 여성의 시각으로도 볼 수 있어야겠죠.
말은 이렇게 하면서 제 언행 곳곳에는 남성우월주의과 여성비하의 의식이 있을 것입니다. 계속 배우면서 고쳐나가야겠죠.
솔로인 분들, 특히 여성에게 인기가 없다고 자책하는 분은 자신의 언행에 남성우월주의가 없는 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중세 러시아 여성의 잔혹사입니다. 우리나라도 여성 잔혹사에서는 다른 나라 못지 않았습니다만 그 자료들은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제가 다시 옮겨올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인도 등 일부 인권 후진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서 답답한 마음에 정리해봅니다.
모든 사진과 설명은 IE에서 제대로 연결되고 클릭하면 커지기도 합니다.
16~17세기 러시아 여성의 잔혹사
전형적인 러시아 여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인의 피에는 슬라브, 타타르, 발트와 다른 민족의 피가 섞여 있다. 아마도 러시아 여성은 밝은 밤색 머리와 소녀나이를 지나면 넉넉해지는 체구를 생각할 것이다. 러시아 남성이 가슴이 크고 건강한 여성을 좋아했던 이유도 있고 자연환경에 맞춰 체형이 그렇게 변한 이유도 있다. 베르사이유, 세인트 제임스와 호프부르크 궁전의 꽉 조인 코르셋 허리에 익숙한 유럽 이방인은 러시아 여성을 퍼졌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여성은 아름다운 외모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길게 흘러내리는 밝은 색상의 사라판(Sarafan, 사진참조)을 즐겨 입었다. 풍성한 소매는 어깨부터 퍼져 내려왔고 반짝이는 팔찌로 손목부분을 동여매지 않는다면 손을 완전히 덮을 정도였다. 벨벳, 호박단(태피터), 브로케이드(Brocade)로 만든 가운을 사라판 위에 걸쳤다. 소녀는 머리를 드러내고 꽃이나 리본을 한 줄로 길게 꼬은 끈을 썼지만, 유부녀는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천 모자를 썼고 외출할 때에는 손수건이나 털 모자로 단장했다. 뺨에는 붉은 색을 칠해 건강하게 보였고 남편이 사준 가장 예쁜 귀걸이와 반지를 꼈다.
안타깝게도 여성의 지위가 높아질수록 의상은 더욱 풍성해졌기 때문에 여성의 몸매를 자랑할 기회가 없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러시아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렇게 유래된 여성관은 낭만적인 중세 유럽의 기사도, 궁전의 사랑, 용기와 거리가 멀었다. 그 대신에 여성을 어리석고, 쓸모 없으며 지능이 떨어지고 도덕관념도 없어서 기회만 있으면 난잡한 행동을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정도로 생각했다.
좋은 집안이라면, 이성의 아이들은 절대로 함께 놀아서도 안되었는데 여자아이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가 물들지 않게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여자 아이도 커가면서 나쁜 물이 들기 때문에 아무리 순수한 아가씨라도 소녀와 함께 지내면 안되었다. 딸은 자물쇠가 잠긴 방 안에서 기도와 복종, 자수 등의 당시 러시아에서 유용한 기술을 배웠다.
"방에는 30개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바람조차 그녀의 머리를 만질 수 없고 태양도 뺨을 비출 수 없고 미남도 그녀를 유혹할 수 없다"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젊은 여성은 무지하고 순결한 상태로 남편에게 인계되는 날을 기다려야 했다.
소녀는 성년이 될 무렵에 처음 보는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아버지, 남편, 시아버지가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을 결정했다. 결혼 협의는 상당히 오래 걸렸는데, 지참금 규모와 신부의 처녀성 보장과 같이 중요한 문제가 오고 갔다. 만약 신부가 처녀가 아니라면 신랑은 결혼을 무효로 하고 지참금을 돌려주면 되지만 그럴 경우 복잡한 다툼이 벌어지기 때문에 사전에 모든 것을 철저하게 확인하려고 했다.
결혼에 대한 모든 것이 정리되면, 아버지의 호출을 받은 신부는 린넨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미래의 남편과 처음으로 만났다. 아버지는 작은 채찍으로 등을 살짝 때리면서 "딸아,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면서 이번이 마지막으로 혼나는 것이다. 내 채찍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남편에게 마땅한 행실을 지키지 못한다면 남편이 내대신 너를 혼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채찍을 사위에게 넘겨주면, 사위는 관습에 따라 "저는 이 채찍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장인의 선물을 받아 자신의 허리띠에 차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혼식 전날 아침, 신부와 어머니는 혼수와 침대 시트를 들고 신랑의 집을 방문했다. 짙은 베일을 쓴 신부는 반지를 교환한 후에 엎드렸고 이마를 신랑의 신발 위에 대면서 복종과 헌신을 약속했다. 신랑은 자신의 발 아래 엎드린 신부를 코트로 덮어주면서 미천한 인간을 보살피고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결혼식이 끝나면 손님을 위한 연회가 시작되었고 신혼부부는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 그들은 2시간의 여유를 가지는데 그 후에는 문이 활짝 열리면서 손님들이 몰려들어 신부가 처녀가 맞는 지를 확인한다. 신랑의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축하인사가 쏟아지고 신혼부부는 달콤한 향의 허브가 뿌려진 목욕탕을 들린 후에 연회를 즐겼다. 신부가 처녀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상처를 받았다.
결혼식 후, 신부는 남편의 집에서 살아있는 장식품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며 남편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했다. 집을 돌보고 남편을 편안하게 모시고 아이를 낳으면 아내의 역할은 다했다. 신부의 재능이 충분하다면 여주인으로 하인을 통솔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인은 안주인을 무시하고 남편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했다.
남편에게 중요한 손님이 찾아오면 식사 전에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은쟁반에 환영의 잔을 가지고 나타나서는, 손님 앞에 서서 인사를 한 후에 잔을 건네고 뺨에 입맞춤 인사를 받은 후에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모습을 감췄다. 임신을 하면 남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축하를 하고 아이에게 줄 금을 선물했다. 선물이 많다면 남편은 당연히 아내에 대해 크게 만족했다.
남편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기분을 바꾸려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아내를 때렸다. 1556년에 실베스테르(Sylvester)라는 수도승이 만든 가정관리 관습(Domostroy)은 모스크바 공국의 가장들에게 가정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하고 있는데, 버섯을 보관하는 방법부터 아내를 교육시키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내 교육의 경우, "복종하지 않는 아내는 매질을 심하게 하되 화를 내서는 안 된다"라고 권장하고 있다. 좋은 아내일지라도 "때때로 채찍질을 하되 비밀리에 가볍게 하고 멍드는 주먹질은 피하라"고 권했을 정도이니까 평민 가정에서는 가정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영국출신의 콜린스 의사는 "이 야만인들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기둥에 묶어두고 옷을 벗겨 때리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심지어 아내가 매를 맞아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남편은 재혼할 수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문을 당한 아내가 남편에게 덤벼들거나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알렉세이 재임 초기에 만들어진 법은 아내의 저항을 심각한 중죄로 다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남편을 죽인 아내는 머리만 땅 위에 내놓고 산채로 묻혀 죽는 처벌을 받았다.
도저히 아내를 때릴 가치도 없는 경우나 남편이 더 좋아하는 여성이 생긴 경우에는 이혼으로 해결했다. 그리스정교(Orthodox) 남편이 아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수도원으로 보내버리면 그만이었다. 강제로 수녀원으로 들어간 아내는 머리가 깎이고 긴 검은 가운과 후드를 쓴 채로 바깥세상의 눈에는 죽은 사람이 되었다. 이혼당한 아내는 나머지 삶동안 수녀복장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그 중에는 탐욕스러운 형제나 친척이 지참금을 주기 싫거나 유산을 나누기 싫어서 강제로 감금한 어린 소녀들도 있었고 남편을 피해 스스로 수녀원에 들어온 여성도 많았다.
아내가 일단 죽은 상태가 되면, 남편은 재혼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정교 교회는 한 사람에게 두 번의 이혼이나 두 번의 사별을 허락했고 세 번째 부인이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두 부인을 심하게 다뤘던 남편은 세 번째 부인을 조심스럽게 다뤘다. 세 번째 부인이 죽거나 도망친다면 더 이상 재혼할 수 없었다.
여성을 격리하고 인격을 무시했기 때문에 17세기 러시아 가정은 분위기가 밝지 않았다. 가족의 생활은 숨이 막혔고 지적인 활동은 정체되었고 여성과의 교제자체가 원천봉쇄된 남성은 술이 전부였다. 물론 예외도 있었는데, 일부 가정에서는 똑똑한 여성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도 실권을 쥐었다. 많지 않았지만 강한 여성은 남편을 주도하는 일도 있었다.
재미있게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일수록 평등해질 기회가 많았다. 지위가 낮을수록 생존에 급급했고 여성을 교육하거나 격리시킬 여유가 없었다. 여성의 지능과 근력이 모두 필요했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는 것은 같았지만 남편과 함께 목욕하고 나체로 눈을 헤치고 달리면서 남편과 어울렸다. 끝을 모르는 겨울 밤에는, 난로 곁에서 남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곁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끌어안고 웃고 떠들고 마시다가 함께 바닥에 쓰러져 잤다. 남편이 아내에게 손을 대면 "그래, 나를 때렸지만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으니까..."라며 한 때 너그러웠던 남편을 생각하며 용서를 했다.
여성사회의 정점에는 차르의 아내인 황후(Tsaritsa, 차리차)가 있었다. 그녀의 삶은 지위 낮은 여성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기는 해도 종속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족에게 헌신했고 기도와 자선활동에 모든 시간을 바쳤다. 궁전 안에서는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복장에 신경쓰고 집안 일을 지시했다. 보통 황후 자신은 바느질과 자수에 능숙했고 많은 바느질 작업을 감독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젊은 여성의 지참금을 보조해주는 것도 황후의 역할 중 하나였다. 남편인 차르와 마찬가지로, 황후도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 한다고 해도 상당한 여유시간이 남았다. 황후는 카드놀이를 하거나 이야기를 듣거나 시녀의 노래와 춤을 즐기거나 난장이의 광대짓을 보고 웃으면서 여가시간을 보냈다. 해가 저물어서 저녁기도가 끝나고 남편이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황후는 남편의 호출을 받았다.
17세기 러시아 여성의 결혼생활이 좋았는지 아니면 열악했는지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아예 논쟁거리조차 못된 존재가 있었다. 차르의 누이나 딸은 지위로 보면 최상위였지만 러시아 여성 중 불행한 존재였다. 공주(tsarevna, 차레프나)는 절대로 남성을 만날 수도 없었고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다. 그러니 결혼을 두고 협상을 벌이거나 두들겨 맞거나 이혼당하는 일도 없었다.
그녀의 지위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었다. 차르는 귀족가문에서 아내를 간택할 수 있었지만
공주는 같은 지위가 아니면 결혼할 수 없었고(근친혼이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 외국왕가와의 결혼은 그리스정교에서 금했다.
공주는 태어나면서부터 큰 러시아 저택 최상층의 여성전용 테렘(Terem, 사진참조)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곳에서 기도하고 자수를 놓고 세상소식을 전해 들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공주는 외부의 거친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고 세상 사람들도 그녀가 태어나거나 죽어야 존재를 잠시나마 알게 되었다.
가까운 친척, 대주교 그리고 몇 명의 선택된 교회신부를 제외하고는 어떤 남성도 어두운 왕실의 은둔처를 볼 수 없었다. 공주가 병이 들면 문을 닫고 커튼을 내려서 방을 어둡게 해서 환자를 감췄다. 공주의 진맥을 보거나 몸을 검진해야 할 경우, 거즈를 위에 올려서 남성의 손가락이 공주의 맨 살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공주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교회에 갔고 모든 문이 닫혀진 통로나 비밀 통로를 통해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이나 예배당에서는, 붉은 비단커튼 뒤에 서서 남성의 시선을 피했다. 국가 예식에 들어설 때에는 비단 벽과 지붕이 공주와 함께 이동했다. 수도원으로 순례를 떠날 때에는 밝은 적색 마차나 썰매를 특별히 만들어서 모든 틈을 막고 말을 탄 병사들이 미리 사람들을 치워서 빈 도로를 달렸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궁전의 뒷담화를 좀 하면...
그렇다고 절대권력을 가진 차르도 아내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왕좌에 오른 차르가 결혼을 마음먹으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적령기 여성을 모스크바에 소집해서 처녀성 검사를 하고 차르의 간택을 받게하는데,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을 경우에 차르가 고개를 끄덕이면 마치 고전동화의 한 장면이 연출되는 듯했다.
그런데 동화는 동화일 뿐, 이런 저런 이유로 차르가 내정한 여성이 있기 마련인데, 극비에 붙여야 했다. 만약에 그 대상이 사전에 누설되면 경쟁집안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렉세이 차르가 18살 때에 유페미아 브세볼로크스키라는 여성을 내정했었는데 당시 유력가문이던 밀로슬라브스키 집안에서 시녀들을 사주해서 결혼식에 머리와 옷을 꽉 동여매게 했고 피가 안통한 그녀는 결혼식 도중에 실신했다.
달려온 궁중의사도 이미 포섭된 상태라 '간질병' 진단을 내렸고 그녀와 모든 집안은 반역죄로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다.
알렉세이는 밀로슬라브스키 집안의 딸과 결혼했는데, 사별하고 두 번째 결혼에서도 내정된 여성을 모함하기 위해 밀로슬라브스키 집안에서 마녀라는 등의 소문과 투서공작을 펼쳤다.
차르는 이미 한 번 크게 당했었고 차르의 측근이었던 황후 후보의 후원자가 현명하게 미리 대처했기 때문에 무혐의 판정을 받고 무사히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결혼식은 무려 9개월이나 지연되었다.
가문의 세력이 충분히 강력하지 않다면 황후로 내정되는 것이 가문 멸망의 지름길이기도 했다.
'중세 > 러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사크의 역사 - 돈 코사크 (0) | 2016.08.01 |
---|---|
러시아 구국영웅, 알렉산드르 넵스키 (2부) (0) | 2015.03.11 |
러시아 구국영웅, 알렉산드르 넵스키 (1부) (0) | 2015.03.07 |
비잔틴제국 황제와 키에프 대공의 대결 (2부) (0) | 2014.09.28 |
비잔틴제국 황제와 키에프 대공의 대결 (1부) (0) | 2014.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