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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러시아

러시아 구국영웅, 알렉산드르 넵스키 (2부)

by uesgi2003 2015. 3. 11.




기사단은 창과 말 앞에서 달아나는 루스군을 보며 예상했다는 듯이 기세를 올렸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르의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양쪽에서 갑자기 화살, 투창과 도끼가 날아들었다. 중앙의 루스군은 계속 물러나며 기사단을 끌어들이다가 미늘창으로 기사를 말에서 끌어내려 죽였다. 알렉산드르는 이제 함정을 닫을 때라고 판단하고 숲속에 숨겨두었던 기병에게 배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방이 가로 막힌 튜튼기사단은 어느 방향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죽어갔다. 심지어 호수의 얼음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깨지면서 익사하기도 했다. 중앙 유럽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던 기사 수 백 명이 순식간에 땅 위에 쓰러졌고 운좋게 목숨을 건진 기사는 루스 경기병의 추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르는 독일 귀족들을 마치 곡식자루처럼 말 위에 얹고는 노브고로드로 돌아왔다튜튼기사단은 점령지를 약탈하고 학살했지만 알렉산드르는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하고 몸값을 받은 후에 모두 풀어주었다.


 

튜튼기사단은 페이푸스호수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는데도 리보니아를 점령한 후에 1242~1245년 동안 7번이나 국경을 넘어왔다. 알렉산드르는 공격이 최상의 수비라는 신념에 따라 신속한 반격으로 기사단의 침략을 막아냈고 마지막 전투에서 다시 대승을 거두면서 리보니아 기사단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렇지만 서쪽에서의 큰 승리는 동쪽에서의 큰 위기를 불러왔다. 금장칸국의 바투Batu 칸은 그렇지 않아도 알렉산드르를 소환할 생각이었는데, 루스인의 신과 위대한 노브고로드에게 맞설 자가 누구냐?”라는 호언장담에 자극을 받아 그를 사라이로 소환했다.

 

칸은 속국의 통치자를 정기적으로 불러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했고 루스 대공국은 칸의 허락 없이는 내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칸은 마치 바둑을 두듯이 속국을 자세하게 비교하며 정책을 하나씩 집행했다.

1246, 아버지 야로슬라프 대공이 대칸의 소환을 받고 몽골 수도를 방문했다가 귀환하는 길에 죽었다. 러시아 역사가는 그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한다. 바투는 후계자가 될 인물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위기에 직면한 알렉산드르는 전쟁과 굴복의 선택을 놓고 고위 성직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주교는 몽골인을 달랠 수 있는 어떤 결정을 내려도 신을 저버리는 배교행위가 아니라는 허락을 했다.

알렉산드르는 어떤 조건을 내밀 상황이 아니었다. 키에프공 미하일 볘볼로도비치Mikhail Vyevolodovich는 몽골의 신을 숭배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분노한 바투 칸은 그를 카펫에 둘러싼 후에 말로 짓밟아 죽였다.

(얼마 전에 끝난 미드 마르코 폴로에서 이런 처형장면이 나옵니다.)

 

알렉산드르의 눈부신 전과를 잘 알고 있던 금장칸국은 그의 도착을 환영하면서도 노브고도르공! 네 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우리에게 바쳤는지 알고 있지? 너 혼자서만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내 텐트로 와서 몽골의 영광과 위대함을 깨닫도록 해라라며 위협했다.

천만다행으로 바투 칸은 그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노브고로드는 원래의 종교를 그대로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하면서 알렉산드르 형제에게 자신과 함께 대칸국에 갈 것을 명령했다. 왕복 2년이 걸리는 먼 여정이었다


1247, 알렉산드르와 안드레이Andrei 형제의 알현을 받은 귀이크Guyuk 칸은 바투와 알렉산드르의 관계를 의심하며 안드레이Andrei를 블라디미르와 수즈달공으로 임명하고 알렉산드르는 키에프공으로 임명했다. 키에프는 바투가 잿더미로 만들었기 때문에 허울좋은 명예직에 불과했다. 여행자의 기록에 따르면 도시 몇 km 지역은 산 사람보다 죽은 시체가 더 많았다고 한다.



몽골의 학살장면은 러시아 연대기에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키에프 학살장면입니다.

 

알렉산드르의 외교는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몽골은 우크라이나 스텝을 차지했지만 기병이 활동할 수 없는 러시아 숲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바투 칸도 알렉산드르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보다 협력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고 판단했다.

귀이크 칸은 1248년에 사망했고 몽케Mongke가 대칸에 오르자 다시 두 형제를 수도로 소환했지만 안드레이는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1252, 몽골은 세금징수원과 군대를 보내 러시아의 모든 지역의 인구를 조사했고 흉년에도 예외 없이 10%의 곡식을 세금으로 징수했다.

노브고로드 시민은 몽골의 인구조사와 중과세를 거부했다. 성문 안에 들어선 몽골 관리와 병사는 살해당했는데, 이 사실을 안 바투 칸은 잔인한 처벌을 선언했다.


 

알렉산드르는 들끓는 시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아들까지 그를 배반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노브고로드가 랴잔, 블라디미르, 키에프와 다른 도시처럼 잿더미가 되지 않으려면 타타르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시민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친히 몽골 징수원을 대동하고 거리를 걸으며 인구조사를 했고 그에 해당하는 공물을 지불했다. 그리고 아들 바실리Vasily를 노브고로드공으로 임명했지만 여전히 몽골복종을 반대하는 성직자들이 바실리를 탄핵했다. 알렉산드르는 군대를 보내 아들을 복귀시켰다.

노브고로드의 인구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동생 안드레이는 몽골에 저항하고 있었다. 연로한 바투의 아들 사르탁Sartak은 군대를 보내 무모한 안드레이의 저항을 진압하고 수즈달에 잔인한 보복을 했다.

 

알렉산드르는 사라이로 가서 사르탁에게 안드레이의 구명을 간청했고 안드레이는 그 덕분에 스웨덴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공으로 임명된 알렉산드르는 비록 몽골의 속국이라도 해도 러시아 전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바투 칸은 1255년에 죽었고 몽골은 다시 노브고로그의 인구조사를 실시한 후, 1262년에 중과세를 물렸다. 수즈달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징수원을 죽였고 저항의 움직임은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알렉사드르는 사라이로 가서 세금을 낮추고 러시아인 징병을 멈춰달라고 요청했다.



바투 칸의 아들 사르탁과 함께 달리는 알렉산드르입니다. 무척 가까워 보입니다.

 

1263년 귀국길에 그는 동생 야로슬랍 3(볼가강 티베르Tver 일대)를 방문하다가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끊임없는 전쟁과 위기의 스트레스로 건강이 너무 악화된 상태였다. 알렉산드르의 막내아들(당시 2)이 변두리였던 모스크바를 상속받았다.

방패막이 사라진 러시아는 몽골의 압제에 시달렸다. 연공을 지불하지 못하는 집은 자식을 노예로 빼앗겼다. 러시아의 첫 번째 차르도 러시아인이 아닌 몽골 칸이었다.



그의 관은 상페테르부르크의 국가유산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1380, 쿨리코보Kulikovo전투(그림 참조)에서 많은 피해를 감수하면서 몽골에 맞섰고 러시아 전역은 전장으로 변했다. 폴란드, 갈리시아와 리투아니아가 지원을 해주었지만 몽골을 물리치기에는 부족했고 몽골은 1399년에 모스크바를 노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몽골의 압제에 시달린 러시아인은 동방정교 교회를 의지하며 애국심과 고립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서유럽의 카톨릭을 믿지 않았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타타르인에게 기독교를 전도하지도 않았다. 몽골이 침략해올 때에 서유럽의 기사단은 등뒤를 찔렀고 그 아픈 기억은 지금까지도 러시아인에게 남아있다. 러시아는 유럽과 중앙아시아 양쪽에 속했지만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입었고 양쪽 모두를 거부했다.

 

알렉산드르는 현명하게 전쟁과 평화를 선택했고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다. 그는 조국 러시아를 잿더미에서 구해냈고 몽골의 압제를 현명하게 순화시켰다. 중과부적의 적에게 맞설 용기도 있었고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는 인내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러시아의 첫 번째 구국영웅이 되었고 동방정교 성인도 되었다



주인공이 너무 늦게 등장했군요. 성인이 된 알렉산드르 넵스키입니다. 그리고 아래 장면은 페이푸스호수 전투를 패러디한 광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