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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러시아

비잔틴제국 황제와 키에프 대공의 대결 (1부)

by uesgi2003 2014. 9. 22.


아시안게임이 한창입니다. 예전같으면 생중계에 금메달 소식으로 떠들썩했을텐데, 개막식부터 무리한 한류 쇼를 펼치더니 어리숙한 대회운영으로 많은 비난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이영애씨 팬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뜬금없는 등장에는 욕설부터 먼저 튀어나왔을 정도입니다. 


비잔틴제국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처럼 키에프 공국 이야기도 나와서 러시아 고대사도 볼 수 있는 좋은 이야기입니다. 반전설에 가까운 고대사이고, 명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혼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황제와 대공의 대결

 

로마제국이 해체된 후부터 중세왕국이 등장하기까지, 유럽역사에는 많은 사건이 있었다. 홀로 남겨진 로마도시는 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732년 투르Tours에서는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이 이슬람 민족의 서유럽 진출을 막아냈다. 색슨왕 알프레드 대왕은 899년에 죽었지만 덴마크 바이킹의 공포에서 영국을 구해냈다. 955년에는 작센 오토 1세의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중앙아시아 마자르Magyar 민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동시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헝가리 왕국의 탄생을 알렸다.


 

971년의 도리스톨론Dorystolon 공성전은 앞의 사건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로마제국의 유산과 기독교인이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세력과 야만민족과 대결을 벌였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번에는 루시Rus족(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북부로 이주한 민족)이었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의 황제 요하네스 1John I Tzimisces와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랍Svyatoslav이라는 대단한 지휘관의 맞대결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영문자료이기 때문에 영어식 발음이 많습니다. 도로스톨론Dorostolon이라고도 부르는데, 유럽역사는 지명이나 인명이 3~4개국의 역사에 기록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어느 용어를 선택해야 할 지가 아주 난감합니다.)



스뱌토슬랍 병사가 포로를 처형하며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스뱌토슬랍은 짐이 간다고 전해라라는 말로 적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는 기습공격을 혐오했고 다음 목표물에게 군대의 진군을 분명하게 알려주려고 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적을 궤멸시켰다. 숙적을 만나기 전까지는.

 

스뱌토슬랍과 군대의 핵심전력은 바이킹족이었다. 그의 선조 류릭Ryurik은 스웨덴에서 북방전사를 데려와(아래 지도참조) 862년에 노브고라드Novgorad 주변의 슬라브 족을 정복했다. 류릭이 879년에 죽자, 같은 가문의 올레그Oleg가 계속 남진해서 키에프Kiev에 수도를 세우고 자신을 대공으로 임명했다. 그는 키에프에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러시아 북부에서 콘스탄티노플과 지중해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장악하고 막대한 부를 모았다



912년에 올레그가 죽자, 류릭의 아들로 추정되는 이고르Igor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드니에페르Dnieper 강을 장악한 이고르는 동로마 제국을 몇 차례 침공해서 교역권을 빼앗았다. 그렇지만 슬라브 부족의 공물을 수집하던 중에 충돌이 빚어지면서 이고르는 나무에 묶여 몸이 반으로 찢겨지며 죽었다.

키에프 공국의 권좌는 아내 올가Olga에게 넘어갔고 아들 스뱌토슬랍은 3살의 아기였다. 올가는 946년에 슬라브 부족에게 잔인한 보복전을 펼쳤지만 그 후에는 아들에게 공국을 제대로 물려줄 생각으로 평화로운 통치를 했다. 올가는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키에프에도 기독교를 도입해서 러시아의 동방정교의 초석을 마련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스뱌토슬랍는 964년에 권좌에 오르자 마자 어머니의 기독교 개종을 무효화시키고 이교도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키에프의 내정을 모두 어머니에게 위임한 후에 원정에 나섰다.

키에프 공국의 군대는 북방민족과 유목민족의 전술과 무장이 혼재한 상태였다. 키에프군은 러시아, 슬라브, 앵글로-색슨 용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용병을 바랑기아인Varangian이라고 불렀습니다. 흔히 바이킹으로 통칭되는 이들은 참 많은 곳을 돌아다녔군요.


철제갑옷을 입은 키에프군은 대형도끼와 창을 들고 밀집대형을 선호했다. 그리고 바이킹 특유의 긴 방패로 적의 화살을 막아냈다. 체격이 컸고 힘이 셌기 때문에 그들이 휘두르는 대형도끼는 위력이 대단했다.

그리고 키에프군에는 인근 스텝부족에게서 고용한 기병도 소수있었다. 키에프군은 수백 척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이동했고 스뱌토슬랍도 일반 병사와 함께 생활했다. 그들은 유목민처럼 천막을 세우고 노숙했으며 원정지의 마을을 약탈해서 보급품을 챙겼다.


965, 왕좌에 오른 지 2년 만에 스뱌토슬랍은 동쪽으로 원정에 나섰다. 첫 번째 희생물은 볼가 불가리아인이었다. 그들은 투르크민족 카자르Khazar의 봉신국으로 유대교를 믿으며 3백 년 이상 코카서스 산맥의 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볼가 불가리아인은 몇 개월 만에 무너졌다. 스뱌토슬랍은 욱군과 해군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카자르의 주요 도시 사르켈Sarkel과 이틸Itil을 포위했다.

이틸 해전에서 대패한 카자르족은 교역로를 스뱌토슬랍에게 내주게 되었고 카자르왕국은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모두 잃고 겨우 이름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966, 스뱌토슬랍은 첫 번째 목표를 큰 어려움없이 달성했다, 키에프공국은 카스피아 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교역로를 장악했고 수도는 번성일로에 있었다. 그는 간헐적인 약탈보다는 정기적인 수입으로 공국의 재원을 마련하려고 했고 선대와는 완전히 다른 정책을 펼쳤다.

스뱌토슬랍의 꿈은 훨씬 원대했다. 그는 비잔티 황제 니케포루스Nicephorus 2세의 초대를 받아 다뉴브 불가리아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 니케포루스는 6년의 재임기간 동안 크레테섬을 합병했고 아랍인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뒀지만 966년에 불가리아를 점령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불가리아인과 3년 동안 전쟁을 벌이면서 재정을 바닥냈고 결국에는 스뱌토슬랍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칼로키로스Kalokyros라는 그리스인이 막대한 금을 가지고 키에프를 방문했다. 스뱌토슬랍은 초대를 받아들였는데 실제로는 다뉴브강까지 장악해서 스칸디나비아 북부와 연결되는 또 다른 교역로를 장악할 속셈이었다. 이제 막 점령한 이틸에 소수의 병력만을 남겨두고 968년 여름에 16,000명의 전사와 함께 배를 타고 다뉴브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2년 전에 볼가 불가리아인이 그랬던 것처럼, 다뉴브 불가리아인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스뱌토슬랍은 80개 이상의 마을을 점령하고 다뉴브 일대의 지배자가 되었다. 3년 만에, 키에프공국은 3개 민족을 점령하고 비잔틴제국과 맞먹을 정도의 경제력을 확보했다.



스뱌토슬랍 대공의 군대가 니케포루스 2세의 요청을 받아 968년에 불가리아군을 격파하는 기록입니다. 

 

스뱌토슬랍은 이 정도에서 원정을 멈출 생각이었다고 한다. 4년 만에 키에프공국의 영토를 3배로 늘려 남북으로는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동서로는 볼가에서 다뉴브강까지 이으렀다. 대공은 키에프에서 그랜드 플레스랍Grand Preslav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그랜드 플레슬랍에는 그리스의 금, , 와인과 과일이, 체코와 헝가리의 은과 말이, 러시아의 털가죽, 밀납, 꿀과 노예가 모이는 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잔틴제국도 결국 속마음을 드러냈다. 니케포루스도 진정한 동맹이나 협상을 위해 스뱌토슬랍을 초대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다뉴브 불가리아와 키에프공국이 싸우다가 국력을 축내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스뱌토슬랍은 위험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니케포루스는 이제 동쪽으로 손을 내밀어 유목민족 페체넥인Pechenegs에게 키에프가 점령한 카자르 도시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968, 페체넥군은 이틸에 남아있던 소수의 키에프군을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카자르의 묵인 하에카자르를 통과해 키에프공국까지 침입해서 키에프를 포위했다.



이 그림은 키에프군이 아니라 비잔틴군을 공격하는 페체넥군입니다. 키에프공국의 슬라브와 노르만 병사, 비잔틴제국의 동로마 병사, 불가리아와 주변국의 유목민족까지 참 복잡한 구성입니다. 

 

스뱌토슬랍은 다뉴브 지역을 포기하고 군대를 동쪽으로 되돌렸다. 카자르를 통과하며 돌아가던 그는 보복으로 카자르 도시와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스뱌토슬랍이 페체넥군을 상대하는 동안, 키에프에 파견되었던 칼로키로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스뱌토슬랍의 야심에 대해 상당히 과장된 보고를 했다. 실제로는 황제가 되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970, 스뱌토슬랍은 원정을 끝내고 동쪽 국경을 안정시켰지만 키에프공국의 내정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섭정이었던 올가가 1년 전에 죽었다. 원정에만 집중하고 싶었던 스뱌토슬랍은 아들 셋에게 공국을 나누어주고 자신은 60,000명의 바랑기안 병사를 이끌고 서쪽의 다뉴브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기로했다.

그렇지만 다뉴브 지역의 상황도 이제는 달라졌다. 요하네스 1세 치미스케스가 비잔틴의 새 황제에 올랐다. 키에프공국의 확장을 우려하던 그는 다뉴브 불가리아인을 지원해서 스뱌토슬랍과 루시인을 막기로 했다.

 

요하네스 치미스케스는 황제에 오르는 순간부터 야심만만하고 잔인한 스뱌토슬랍과 좋은 상대가 되었다. 925년 카포도키아Cappodocia 에서 태어난 그는 선황 니케포루스의 인척이자 지휘관으로 아랍인을 상대로한 두 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작은 체구였지만 열정적이고 갈색머리와 붉은 수염이 잘 어울리는 미남이었다. 반면에 니케포루스는 그리 잘 생긴 외모가 아닌데다가 과세정책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요하네스의 전기를 보면 여자와 술을 즐기는 두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여자의 경우에는 테로파노Theophano 황비와의 불륜이 큰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요하네스 치미스케스의 황제 즉위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