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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러시아

비잔틴제국 황제와 키에프 대공의 대결 (2부)

by uesgi2003 2014. 9. 28.


치미스케스와 공범자들은 969 12 10일 밤에 니케포루스를 공격했다. 황제이자 전사였던 니케포루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지만 결국에는 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치미스케스는 죽은 황제의 시신을 훼손시킨 후에 거리에 내던졌고 다음날 병사가 끌고 가서 매장했다.

 

치미스케스는 바로 황제즉위를 서둘렀다. 그리스인 대주교는 3가지를 요구했다. 먼저 황제 시해자를 처벌하고, 황비를 추방하고, 마지막으로 동방정교회가 황제에게 양보한 특권을 회복시켜달라는 요구였다.

치미스케스는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공범자를 멀리하고 테오파노 황비를 추방시켰다. 대주교는 치미스케스의 태도에 만족해서 970년에 요하네스 1세 황제로 즉위시켰다.

치미스케스는 니케포루스의 왕관과 함께 다뉴브 문제를 물려받게 되었다. 970, 발칸 지역으로 다시 돌아온 스뱌토슬랍은 불가리아 차르 보리스 1세를 붙잡았다. 그리고 필리포폴리스로 가서 완전히 약탈한 후에 20,000명이 넘는 시민을 모두 학살했다. 비잔틴 제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스뱌토슬랍은 콘스탄티노플을 목표로 삼았다.

 

치미스케스는 황제가 된 직후에 스뱌토슬랍과 협상을 벌였지만 기세가 오른 키에프 대공은 막대한 황금을 요구하면서 로마인은 서부로 떠나고 상관없는 콘스탄티노플은 동부로 넘기라고 선포했다.

치미스케스는 첫 번째 부인의 오빠인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와 캄프 페트로스 포카스의 공동 지휘하에 12,000명을 파견해 루시족의 콘스탄티노플 침공을 막았다.

 

스뱌토슬랍은 병력을 넓게 펼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지만 루시, 마자르와 페체넥 용병으로 구성된 38,000명의 별동대가 아르카디오폴리스Arcadiopolis(현재의 불가리아 룰레 부르가스)에서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을 받고는 행군을 멈췄다.

비잔틴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겨우 25명 만을 잃었다고 할 정도의 완승이었다. 별동대의 패잔병은 불가리아로 후퇴해서 휴식을 취하며 상황을 엿보았다.

 

스뱌토슬랍은 비잔틴제국 내부의 어지러운 상황을 이용하고 있었다. 바르다스 포카스가 970년 말에 소아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스클레로스가 반란을 처리하러 발길을 돌려야 했다. 황제의 조카 요한 쿠크쿠아스John Kourkouas가 스탸보슬랍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스클레로스와는 달리 무능했다. 결국 스뱌토슬랍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마음대로 침공했다.

 

스클레로스는 반란진압에 성공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먼저 추방당한 황비 테오프라노가 탈출해 황궁으로 돌아와 치미스케스를 모욕하고 의회 의장 바실리오스Vassilios를 야만인 출신이라고 폭로했다.

치미스케스는 어렵게 테오프라노를 붙잡아서 이번에는 아르메니아 오지로 추방했다. 그리고 선황콘슨탄틴 7세의 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비잔틴 국민은 콘스탄틴 가문을 후계자로 정하는 결혼이라며 기뻐했다.

대주교가 급사했고 황제는 971 1 18, 친구 바실리오스를 새 주교로 선택했다.



스클레로스와 포카스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기록입니다. 

 

자신의 황제자리와 함께 모든 문제를 봉합한 치미스케스는 스뱌토슬랍을 처리하기로 했다. 971 3 28, 그는 15,000명의 보병과 1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수도를 떠났다. 그리고 그리스 불을 무장한 300척의 함대가 다뉴브강을 따라 함께 이동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스뱌토슬랍은 결정적인 판단착오를 일으켰다. 전력을 모아 치미스케스를 상대하지 않고 대신에 병력을 다뉴브강을 따라 분산배치시켰다. 새로 획득한 다뉴브 지역을 간직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 공격 위주의 북방 노르만과 슬라브 전사들을 그렇게 방어시설에 주저 앉혔다.



스뱌토슬랍의 군대라고 하는데... 이교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비잔틴군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치미스케스는 신속한 기동을 펼쳐 4 3일에 그랜드 프레슬랍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차르 보리스가 아직도 갇혀 있었는데, 배신자 칼로키로스는 키에프군에게 비잔틴 기독교인은 부활절에 전투를 하지 않을 테니까 도시 밖으로 나가 선공하라고 조언했다.

키에프군은 그의 조언에 따라 기습에 나섰지만 치미스케스 정규군의 반격을 받고 8,500명을 잃었다. 이튿날, 비잔틴군은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격전을 벌여 7,000명을 더 죽이고 도시를 장악했다. 비잔틴군도 8,000명을 잃었지만 보리스 차르가 풀려났다고 선포하며 비잔틴군을 불가리아의 해방군으로 불렀다.

 

패잔병이 도리스톨론(실리스트리아Silistria) 항으로 몰려들어 스뱌토슬랍에게 패전을 알렸다. 그는 이미 후퇴하기에 늦었다고 판단하고 300명의 불가리아 피난민을 죽이고 나머지는 가두라고 명령했다.

치미스케스는 쉬지 않고 행군해서 4 23일에 도리스톨론 앞에 나타났다. 스탸보슬랍은 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전을 선택했다. 치미스케스는 보병을 중앙에 놓고 양쪽에 기병을 배치시켰고 궁수는 뒤에 놓았다. 전투의 주도권이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격전이 벌어졌고 황제가 직접 이끄는 기병이 마지막으로 키에프군의 대열을 무너트리고 도리스톨론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

이 전투에서 스뱌토슬랍은 최고의 부관을 잃었다. 치미스케스는 도시 앞에 진영을 차리고 함대로 도시를 봉쇄했다.

 

그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포카 가문이 다시 한 번 황실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벌어졌다. 모반시도는 실패했고 치미스케스는 귀국하지 않고 키에프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

보급로까지 끊긴 채로 도리스톨론에 고립된 스뱌토슬랍은 과감한 기습으로 공성전을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는 밤에 다뉴브강을 건너 보급품을 구하는 동시에 많은 비잔틴군을 살해했다.

치미스케스는 해군 지휘관에게 다시 한 번 봉쇄를 뚫리면 사형시키겠다고 경고했다.


 

그래도 시간은 치미스케스의 편이었다. 7 22, 굶주림에 지친 키에프군은 밖으로 나와 비잔틴군을 공격했다. 함께 원정왔던 요한 쿠르쿠아스가 전사할 정도로 격전이 벌어졌지만 결국 키에프군은 도시로 다시 밀려들어갔다. 이튿날 다시 한 번 공격에 나섰지만 키에프의 유명한 지휘관이 전사하자 사기를 잃고 물러났다.

스뱌토슬랍은 지휘관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모욕을 당하지 말자. 우리가 죽으면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가 달아나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참고 견뎌라. 내가 죽게 되면 여러분이 알아서 하라.”

지휘관과 병사들은 울며 전하와 함께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날 밤, 비잔틴 병사들은 적이 동료의 시체를 불태우고 가족을 죽이는 공포스러운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7 24일 날이 밝자, 키에프군은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치미스케스의 친위대 아네마스Anemas가 스뱌토슬럽을 찔렀지만 갑옷을 뚫지 못했다. 키에프 병사가 달려들어 그를 죽이자 비잔틴군은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치미스케스가 바로 나타나 전열을 가다듬었다.

갑작스런 광풍이 불어 양쪽이 물러섰고 키에프군은 전장에 15,000명의 시체와 20,000개가 넘는 방패를 남겨두고 도시로 들어갔다.

 

그리스 병사가 광풍 속에서 고대갑옷을 입은 인물이 나타나서 비잔틴군을 도와주었다는 소문을 퍼트렸고 치미스케스는 그 인물이 성인 테오도로스Theodoros라고 주장하며 도리스톨론을 테오도로폴리스Theodoropolis로 바꿨다. 11세기 말에, 황제 알렉시스 콤네누스가 다시 실리스트리아로 바꿨다


패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스뱌토슬랍은 치미스케스와의 면담을 요구했다. 황제는 4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뉴브 강변에서 배를 타고 온 그를 만났다. 스뱌토슬랍은 머리 한 가닥만 남긴 대머리였고 다이아몬드와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황제는 관대한 제안을 했다. 키에프군은 다뉴브강 일대에서 완전히 떠나 발칸반도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비잔틴군은 모든 포로를 석방하고 남은 군대도 무기를 소지한 채로 다뉴브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콘스탄티노플과 키에프공국 간에 조약을 체결한다는 제안도 했다.


스뱌토슬랍은 페체넥족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허가장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치미스케스는 허가장은 동의했지만 페체넥의 행동에 대한 어떤 보장도 하지 않았다. 그는 비잔틴 황제답게, 키에프군이 패잔병 신세로 도망칠 때에 페체넥에게 마무리를 짓게 할 생각이었다.

스뱌토슬랍도 황제의 음흉한 속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울지 마라. 병사들이여.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스뱌토슬랍은 페체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예정된 퇴각로로 갈 수 없었다. 그는 배를 타고 드니에페르강을 내려가 겨울을 보냈다. 972년 초, 모든 보급품이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귀국길에 올랐지만 페체넥군이 퇴각로를 이미 막고 있었다.

지치고 병든 키에프 보병은 페체넥의 기마전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스뱌토슬랍과 키에프군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스뱌토슬랍은 키에프로 가져가려던 온갖 보물 속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페체넥은 그의 머리를 잘라 해골에 은과 보석을 입힌 후에 페체넥 칸의 술잔으로 만들었다.



페체넥 궁기병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스뱌토슬랍입니다. 

 

요하네스 치미스케스는 2.5개월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불가리아는 7개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보리스 1세는 비잔틴제국의 총독 신세로 전락했다. 황제는 973년에 동부군이 아랍민족에게 패배를 당한 보복을 하기로 했다. 974년과 975년 두 차례의 원정을 한 후에 아르메니아 아소트 3세에게 시리나와 레바논 전역을 그리스군이 점령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요하네스 치미스케스는 스뱌토슬랍과 달리 원정 중에도 내정을 관장할 수 있었다. 그는 소아시아 이민족을 키에프군이 떠난 필리포폴리스로 보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비잔틴제국 영토를 위협하는 오토 1세와 분쟁을 해결했다.

니케포루스는 오토를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왕으로 칭해서 분쟁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 기병은 너무 무거워서 날렵한 시리아의 궁기병의 상대가 되지 않으며 오토는 함대도 없다고 얕잡아 보았다.  

치미스케스는 첫 번째 부인의 조카인 테오파노 공주를 미래의 오토 2세와 결혼시켜 두 제국 사이의 관계를 개선했다.

 

치미스케스는 마지막 원정 길에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바실리오스(의회의장)의 소유라는 말을 듣고는 황제와 병사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을 벌이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환관 놈의 소유라는 것이지?”라고 말했다.

치미스케스는 병사의 전역 후에 먹고 살 농장을 마련하는데 주력했고 부자와 정치인이 은퇴한 병사들의 땅을 사들이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했다. 자신도 황제가 된 후에 가문의 땅을 부근의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집의 굴뚝에 매기는 세금도 폐지했다.

 

아마도 그의 파격적이지만 특권층을 위협하는 정책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마지막 원정에서 돌아온 후에 갑자기 병들어 누웠다. 그는 몇 개월 후인 976 1 18, 51세의 나이로 죽었다. 장티푸스 증세를 보이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특권층을 개혁하는 정책에 반발한 정적에게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스뱌토슬랍의 통치기간은 964~972년으로 겨우 8년밖에 안되었지만 방대한 영토를 획득하며 러시아 건국의 초석을 놓았다. 아들 중 한 명인 블라디미르 스뱌토슬라비치Vladimir Svyatoslavich는 다른 형제를 죽이고 키에프와 노브고로드공국을 장악했다.

 

7년 후, 키에프공국과 비잔틴제국은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결과가 완전히 달랐다. 987, 블라디미르는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와 협정을 맺고 동방정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루시족의 개종을 열정적으로 추진해서 러시아의 성인이 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의 즉위장면입니다. 

 

비잔틴제국의 영광은 그 후로도 오랜 동안 지속되었는데, 바실리우스 2세는 선황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1014 7, 스트루마강에서 불가리아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그는 14,000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100명 중 길잡이를 할 한 명만 빼고는 나머지 99명의 눈을 뽑아 불가르족을 죽인 자라는 무서운 별명을 얻었다.

바실리우스 2세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아르메니아를 합병했고 1025년에 죽어서 비잔틴 황제로는 가장 긴 재임기간을 자랑했다



바실리우스 2세가 조지아(그루지야)군을 격파하고 있습니다. 



바실리우스 2세 당시의 비잔틴제국입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확인해보세요. 

마지막으로 바실리우스 2세와 근위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