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동네 상가를 나갔더니 아웃도어 매장 큰 곳이 폐점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겁고 답답합니다.
제 개인도 답답한 상황이고, 동네도 우울하고, 우리 경제와 정치도 태풍 전 먹구름입니다. 무기력한 소리라 다시
한 번 답답하지만, 젊은 세대가 웃으며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은 사람사는 세상을 배워가고, 일할 의지만 있으면 일자리를 쉽게 찾고, 경제가 아닌 자아를 찾아 인생을 살아가고, 다음 세대에게 사람사는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구국영웅, 알렉산드르 넵스키
알렉산드르 넵스키Aleksnandr Nevsky가 태어난 1219년 5월 30일, 루스Rus인(중세 러시아인)은 동쪽에서는 몽골에게, 북쪽에서는 스웨덴에게, 서쪽에서는 독일인의 위협을 받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는 수즈달Suzdal 대공집안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야로슬랍Yaroslav 2세는 류리크Ryurik(스칸디나비아 바이킹으로 러시아에 이주해 860년 노브고로드Novgorod를 통치) 가문의 일원이었다.
루스는 중세초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살던 사람들로 북유럽에서 내려왔다는 설이 지배적이고 남동부 슬라브부족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미드 바이킹 최근편에 자신의 자식이 키에프에 정착했다는 대사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국가를 이루지 못했고 바이킹과 슬라브족이
서유럽 크기와 맞먹는 방대한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북부 본토에서 우크라이나까지 정착촌을 넓힌 루스인은
슬라브어와 동방정교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했다.
대공Kaniz이 정치와 행정 중심지인 도시를 통치했고 루스, 독일인, 투르크인, 불가리아인, 폴란드인과 용병을 고용해 도시를 지켰는데 블라디미르Vladimir가 그 중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진 도시(공국)였다.
노브고로드(신도시라는 의미)는 러시아와 유럽의 통상로에 위치한 경제 요충지로 야로슬랍의 영토에 있었다. 길드마스터, 지주와 베체Veche(성직자)가 중산층을 이뤘는데 흥미롭게도 의회는 통치자인 공을 선택하거나 축출할 권리가 있었다.
1222년, 야로슬랍이 노브고로드공으로 선출되어 이주를 했다. 베체는 성 소피아 성당에 일주일 3번 모였고 어린 알렉산드르는 성직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을 지켜보며 정치역학을 배웠다. 베체는 그의 아버지를 4번이나 고향 페례슬라블Peryeslavl로 보냈다가 다시 불러 들였고 알렉산드르는 그런 경험을 하며 갈등의 해악을 깨닫고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한한 신앙심도 가지게 되어 하루에 몇 시간씩 구약과 신약성서를 읽었다.
중세 노브고로드의 시장모습입니다.
성 소피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설전에 질린 야로슬랍은 1228년에 노브고로드를 떠나 어쩌다가 잠깐 들르기만 했다. 9살이 된 알렉산드르와 형 표드르를 귀족 후견인에게 맡겨 교육을 시켰는데 표도르는 1228년, 결혼식 전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야로슬랍은 1236년에 키에프Kiev대공을 상속받았고 알렉산드르가 노브고로드 영지를 상속받았는데 어릴 때에 겪었던 골치거리는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베체의 불화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게 되었다. 1237년, 몽골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북부 루스영토는 정착 후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징기스 칸 Genghis Khan이 원정에 나선 1225년, 러시아와 쿠만Cuman 투르크족은 칼카Khalka강에서 몽골 선봉대를 격퇴한 적이 있었다. 루스는 이 사건을 큰 경고로 받아들이고 단합해도 운명을 바꿀 수 없을 판에, 그 후 12년 동안 공과 보야르Boyar(러시아 지주귀족)는 여전히 분열, 음모와 내전을 벌였고 쿠만 투르크와의 동맹관계도 취소하는 결정적인 악수를 뒀다.
몽골은 중국을 점령하고 인류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다진 후, 1237년에 서진을 시작했다. 징기스 칸은 아들들에게 깃발과 함께 다스릴 영지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1243년, 바투Batu에게는 금장깃발을 주며 러시아로 보냈고 그렇게 금장칸(한)국Golden Horde(킵차크칸국)가 생기게 되었다.
루스 남부에서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유목기마부족은 오랜 동안 스텝초원을 두고 슬라브 농부와 충돌해왔는데 바투는 겨우 4,000명의 전사만 데리고 이들을 전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금장칸국은 순수 몽골인보다는 투르크인이 훨씬 많았다(지도참조).
몽골전사는 창이나 칼보다 복합궁을 선호했고 말을 여러 마리 가지고 다니면서 이동 중에 갈아타 장거리 원정을 할 수 있었고 실제 규모도 더 많아 보였다. 몽골은 공포를 하나의 전략으로 즐겼는데 징기스 칸은 순순히 항복하는 도시나 왕국은 남겨두었지만 격렬하게 저항하는 지역은 관용을 베풀지 않고 모두 고문하고 죽였다. 몽골은 전투 중 포로를 잡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는 공물로 받았다.
타타르Tatar는 중국어에서 유래된 말로 싸움, 싸움의 뜻인데 중앙 아시아와 유럽은 몽골족을 타타르라고 불러 몽골족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동용 텐트와 마차 숙영지가 몽골의 도시였다. 금장칸국은 점령지에 모두 정착할 수 없었기때문에 바투는 순순히 항복한 슬라브 영주를 그대로 인정했다. 금장칸국은 볼가강과 돈강이 가까워지는 사라이Sarai(지금의 볼고그라드Volgograd 부근)를 수도로 정했고 주변 국가에서 세금과 노예를 공물로 받았다.
100년 후의 몽골제국 지도입니다. 킵차크, 차가타이, 일과 원(대) 칸국으로 분리된 후에 내전과 반목을 거듭했습니다.
1237년, 랴잔Ryazan이 처음으로 몽골의 공격을 받고 다른 도시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고 랴잔은 잿더미로 변했다. 다른 도시도 저항하다가 차례로 같은 운명을 맞이했고 다음 차례는 노브고로드였다. 몽골군은 노브고로드 80km 지점까지 접근했다가 말이 늪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는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났다.
알렉산드르는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성직자의 정치력과 보야르의 경제력을 통제했다. 그는 털가죽 공물을 직접 거둬들여 행정권도 강화했다. 그리고 1239년에는 폴로츠크Polotsk공 가문과 결혼했다.
1240년 여름, 몽골이 키에프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21살이 된 알렉산드르는 발등의 불이 더 급한 상황에 몰렸다. 교황 그레고리Gregory 9세가 로마 카톨릭교회(루스는 동방정교)를 받아들이면 몽골을 상대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하자 노브고로드가 핀란드 이교도개종을 방해했다고 비난하면서 1237년 12월 14일, 스웨덴 유프살라Upsala 주교에게 십자군 원정을 명령했다.
교황의 칙령을 받은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2년 반 동안 기사, 병사, 성직자와 폭력배 무리를 모았고 조카 비르게르 마그누손Birger Magnusson이 아보Abo(핀란드 투르쿠Turku)에 상륙했다. 그 지역의 지원병을 더 모은 그는 스웨덴 함대를 네바Neva강 상류로 몰아 노브고로드 북쪽에 상륙한 후에 알렉산드르에게 개전을 알렸다.
“용기가 있다면 여기로 와서 싸우자. 나는 네 땅을 점령해 가질 생각이다.”
알렉산드르는 위급한 키에프 구원을 미루고 노브고로드뿐만 아니라 라도가Ladoga호수, 카렐리안Karelian과 잉그리아Ingria에서도 병력을 모았다. 핀란드 피난민까지 합쳐도 그의 병력은 많이 모자랐지만 스웨덴군이 네바강에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전에 공격해야 했다.
그는 병력을 이끌고 출발하기 전에 “신은 병력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의 편에 서신다”라며 신앙심에 호소했다.
잉그리아 족장(동방정교로 개종한)이 스웨덴군의 위치와 상황을 알려주었고 습지대를 건너며 강행군한 루스군은 1240년 7월 15일 새벽에 도착했다. 잉그리아 족장은 순교자 보리스와 글렙이 형제 알렉산드르를 돕기 위해 오는 것을 봤다고 주장했다.
스웨덴군은 수즈달군이 몽골군을 상대하느라 노브고로드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가 기습을 할 때에도 비르게르와 기사단은 텐트 안에서 편하고 쉬고 있었고 대부분의 병력은 강 건너편에 그대로 있었다.
루스군은 공황상태에 빠진 스웨덴군을 휩쓸면서 강건너편과 연결된 부교를 잘라 구원군이 오지 못하게 했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르는 비르게르에게 일대일 대결을 선언하고는 창으로 그의 얼굴을 찔렀다고 한다(그림 참조). 말에서 떨어진 비르게르는 병사들이 강건너로 옮겼다.
루스군에게 저항하던 나머지 스웨덴군은 그날 밤에 본국으로 달아났다. 비르게르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1248년에 영지를 받아 1253년에 스톡홀름Stockholm 을 건설했다.
1938년 영화 속의 알렉산드르 넵스키입니다. 그는 국가위기 상황에 애국과 민족주의 상징이 되었고 공산정권에서도 이용했습니다.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는 네바강 승전 후에 넵스키로 개명했다. 노보고로드 시민은 그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강화하고 타타르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며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가 스웨덴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몽골군은 키에프를 약탈하고 불태웠고 성직자와 시민의 분노를 극에 달했다.
키에프 공국의 전투 장면입니다. 아래는 포로로 잡힌 키에프대공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알렉산드르는 대중의 압력에 굴복해 몽골군을 상대하는 만용을 부릴만도 했는데, 어릴 때부터 보고 겪었던 정치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현명하게 누구와 전투를 벌일 것인지 그리고 누구와 친교를 맺을 것인지를 잘 판단했고 몽골군과의 평화를
선택하고 복종과 공물로 그들을 달래기로 했다. 유럽은 그의 선택을 나약함과 반역으로 간주했고 노브고로드
성직자 회의는 그를 거부하며 시민을 자극시키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르는 친위군을 동원해 진압할 수도 있었지만 고향 수즈달로 돌아가기로 했다.
1241년, 알렉산드르는 노브고로드가 위기에 몰리면서 다시 한 번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튜트Tuton기사단, 리보니아Livonia기사단 등이 이즈보르스크Izborsk를 점령한 후에 프슈코프Pskov를 향해 다가왔다. 이 곳은 페이푸스Peipus호수 남쪽에 있는 도시로 노브고로드의 동생이라고 불렸다, 기사단이 도시 외곽을 불태우자 보야르는 성문을 열었고 이제 다음 목표물인 노브고로드 성직자와 보야르가 알렉산드르에게 간청했다.
튜튼기사단은 다른 종교무장단체와 같이 성지를 탈환하는 십자군원정에서 만들어졌다. 성요한기사단 등은 다국적단체인 반면에 튜튼기사단은 순수 독일인이었고 십자군원정지에서는 다른 무장단체와 종교와 정치분쟁을 일으키며 심지어 무력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튜튼기사단은 영지 대부분을 잃자 발트해 동부의 이교도 지역으로 정복과 전도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프로이센 원주민부족을 몰아내고 독일 동부를 차지한 후에는 세속적인 단체로 변했다.
알렉산드르는 수즈달에서 병력을 모으고 노브고로드에서 군자금을 거둬들인 후에 튜튼기사단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튜튼기사단이 떠난 프슈코프를 탈환하고 침략군에게 협조한 사람들을 처벌했다. 튜튼기사단이 돌아오면 시민이 다시 성문을 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페이푸스호수(지금의 에스토니아Estonia)에 있는 기사단을 상대하기로 했다.
1242년 4월 5일이었는데도 호수는 아직 꽁꽁 얼어있었다, 평원이 적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호수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었다. 튜튼기사단은 반대편 호숫가의 좁은 길목에 오합지졸의 농부와 루스 병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황당해했다. 호수의 얼음길이 버텨준다면 중무장 기사단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70년 전 영화의 페이푸스 전투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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