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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2부)

by uesgi2003 2013. 5. 16.

 

 


남양유업이 재발방지 결의대회를 열고 대표이사가 눈물까지 흘렸다는군요. 


그런데... 경찰소환된 영업사원들은 혐의를 부정했다고 하던데... 그럼 뭘 재발하고 왜 눈물을 흘린 것일까요?

다시는 대리점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재갈을 더 단단히 물리자고 투쟁결의를 하고, 대표이사까지 되어서 이 짓을 하자니 너무 분통해서 눈물을 흘린 것일까요?


오늘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관련업계에서 비정규직 비율이 압도적인 차이로 1위인 기업이 남양유업이고, 반대로 평균연봉은 밑에서 두 번째(그것고 아주 작은 차이)가 남양유업이라고 하는군요. 우리나라는 노비가 건너 마을 김대감집 걱정해주는 선한 사람들이 많아서 월세도 못내는 강북 노인들이 강남 아파트 종합부동산세 걱정해주던 '인지부조화'가 또 생길겁니다. 


왜 소비자가 악성기업 걱정을 해야 하는지???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2부)


공군의 준비


독일군은 성채(Citadel, 독일측 작전명) 작전을 위해 동부전선에서 띄울 수 있는 비행기 중 2/3이 넘는 1,800대를 준비시켰다. 소련군의 진지를 정확하게 폭격할 스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엄호를 위해 Bf-109 G와 FW 190 A 형이 대거 동원되었다. 소련군의 전투기 성능이나 양이 이미 대등한 수준에 올라왔지만 아직은 조종사의 경험과 운용전술 면에서 상대가 안되었다. 

성채 작전에는 남과 북 두 방면에서 항공지원을 하기 위해 2개 항공대(Luftflotte)가 만들어졌고 공군은 동부전선에서 처음으로 헨셀 Hs 129 대전차 전폭기를 대거 전개시켰다. 이 기체는 '전차 킬러' 전용으로 만들어졌으며 대단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7.92mm 기관총 2정, 20mm 기관포 2문에 조종석 아래에 30mm 포를 달고 있었다. 







지상공격기로는 FW 190이 대인 집속탄과 20mm 기관포를 장착했고, 하인켈 He III, 융커스 Ju 88과 하인켈 He 177 등의 폭격기도 준비되었다. 원래 이 장거리 폭격기는 우랄 산맥 너머에 있는 공장지대를 폭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사상최대의 기갑군의 연료를 위해 장거리 폭격은 제한되었다. 

스투카는 원래의 급강하 폭격 외에 양쪽 날개 아래에 37mm 포를 달고 소련전차의 고질적인 약점인 엔진을 노려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아무리 폭격기가 적의 공격을 잠재워도, 신형 전차가 전선을 돌파해주어도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독일 보병과 소련 보병일 것이다. 독일 보병사단은 1942년의 피해를 벗어나 재건되었지만 병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보병사단은 예전의 9개 대대에서 6개 대대로 축소되었고 포병전력도 25% 수준으로 줄었다. 한 개 사단의 병력은 6,000~8,000명에 불과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소련군이 투항해 의용군(Hiwis)로 참전했었지만 그 때는 독일군의 승리가 예상될 때였고 승패가 불투명해진 성채 작전에서도 전력이 될 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보충설명을 합니다. 스탈린의 농업과 산업혁명 그리고 대숙청때문에 무려 7,000,000명의 농민이 목숨을 잃었고, 전쟁 초기에는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습니다.약 1,000,000명의 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이 독일군 의용부대로 참전합니다.

그러나 슬라브 민족을 열등 민족으로 무시하고 점령군으로 착취와 탄압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고 소련의 정치공세로 저항세력이 생기면서 강제동원이 아니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소련군은 탈환한 지역의 남성을 바로 징집해서 전력피해를 바로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보병사단의 대전차 포는 상당히 부족했다. 강력한 75mm 대전차포가 보급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37mm 포가 주력이었기 때문에 판저파우스트(Panzerfaust)를 사용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200,000명 이상의 병력(추축 동맹군까지 포함하면 800,000명)을 잃었지만 히틀러의 총동원령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배치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는 1943년 1월 13일, 16~45세의 모든 남성과 여성을 군과 공장에 동원했다. 남자가 떠난 자리에는 노인이나 외국인 강제노동자로 대체되었다. 총동원령덕분에 성채 작전 직전에는 총 9,500,000명의 병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지금은 쿠르스크 작전까지의 배경 설명이어서 독일과 소련 전체 이야기입니다. 성채 작전에는 약 800,000명이 투입되었습니다. 그리고 9.5백만 명에는 비전투요원과 다른 추축군 병력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원래 1943년 당시의 기갑사단은 130~180대의 전차로 2~3개 전차 연대, 1개 기갑척탄병 여단, 1개 포병 연대와 사단지원부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방군 사단의 전차는 100대를 넘지 못했고 무장친위대 사단의 경우에는 130대의 전차와 35대의 돌격포를 보유해서 훨씬 좋은 전력을 갖췄다. 

각 사단에는 14대의 타이거로 구성된 중전차 중대가 설치되었고 나머지 타이거 전차는 특수 중전차 대대라는 이름으로 군이나 군단에 배치되어 긴급한 상황에 투입되었다. 

성채 작전에는 약 533대의 돌격포가 준비되어 기갑사단에 배치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약 30대 정도씩 별도의 돌격포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타이거와 판터 등의 신무기덕분에 다시 한 번 독일의 전술이 유효할 것처럼 보였고 전격전을 약간만 변형해서 시도하기로 했다. 이전과 다른 점은 타이거를 앞세워 적진을 돌파하되 보병과 포병의 지원거리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조심스럽게 돌파해야 했다. 

먼저 항공기와 포병이 제압한 지역을 중전차부대가 돌파하고 손상된 전차는 이동 포대로 사용하고 나중에 회수하기로 했다. 선봉 돌파부대의 측면은 3호와 4호 전차, 기갑척탄병이 박격포와 경포의 지원을 받으며 엄호할 예정이었다. 

북쪽 돌파를 담당한 9군 사령관 발터 모델은 전차를 돌파용이 아니라 확대용으로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는 방어전의 대가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당연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독일군의 주력이 북쪽이라고 판단하고 그곳에 더 치중하고 있었다. 

남쪽 돌파를 담당한 만슈타인은 처음부터 전차부대를 돌파용 쐐기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대규모 기갑전력을 치밀하게 배치하고 신무기를 기다리느라 작전은 계속 연기되었다. 그리고 5개군이 중앙 집단군 (클루게)와 남부 집단군 (만슈타인)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오른쪽의 할아버지가 2차대전 최고의 명장 만슈타인 집단군사령관입니다. 스탈린그라드 패전 이후 반격작전으로 승패를 원점으로 돌린 그는 쿠르스크와 같은 대규모 공세를 반대하고 방어와 기동전으로 소련에 최대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세를 취해야 한다면 시간이 관건이라고 판단한 그는 즉시 실행에 옮기자고 주장했지만 히틀러의 반대로 작전은 계속 지연되었고 쿠르스크에서 사실상 패전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중앙집단군의 공격은 제9군 모델에게 맡겨졌다. 모델의 병력은  독일군 21개 사단과 3개 헝가리 사단, 약 335,000명이었는데 헝가리 사단은 파르티잔 소탕과 경비 임무를 맡아서 실제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21개 사단 중 6새 사단 (2. 4. 9. 12. 18, 20)이 기갑사단이었고 제10 기갑척탄병 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14개 사단은 보병사단이었다. 

제9군은 총 590대의 전차와 424대의 돌격포를 보유했다. 



(사진에서 오른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발터 모델 상급대장입니다.)


남부 집단군과 중앙 집단군을 연결하는 제2 군은 8개 보병사단, 3개 대전차 분견대(Detachment), 4개 경비사단과 제8 SS 기병사단을 보유했지만 중화기, 전차와 대전차 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작전기간 내내 수비역할이 주어졌고 지휘는 발터 바이스(Weiss)가 맡았다. 


남부 집단군의 제4 기갑군(헤르만 호트)과 켐프(Kempf) 특수군(Army Detachment, 발터 켐프)이 주역을 맡았다. 만슈타인은 350,000명의 병력, 1,269대의 전차와 245대의 돌격포를 보유했고 예비병력도 준비되어 있었다. 

3개 사단의 52군단은 왼쪽에서 수비 역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