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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부)

by uesgi2003 2013. 5. 15.

 

지난 역사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100% 전사를 다루었고 3시간 내리 설명을 했는데도 동부전선의 주요 전장인 레닌그라드나 쿠르스크는 건너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상 최대, 최악의 전장이었던 동부전선 그리고 그 중에서도 추축군과 소련의 정예부대들이 전력을 다해 일전을 벌였던 쿠르스크를 한 번 정리해볼까 합니다.

 

전장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동원된 부대와 인력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과 대응을 설명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겁니다. 아주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고 축약버전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자세한 사진과 동영상과 함께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이제부터는 다음 뷰 손가락 도장을 붙였습니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이야기 마지막 부분의 손가락 도장을 꼭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1부)

 

독일군 전차의 재무장

 

1939년 9월 전쟁을 일으킨 독일군은 전격적(Blitzkrieg)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적의 강력한 저항선을 피해 공격속도를 줄이지 않고 적의 뒤로 돌아 통신과 보급선을 끊어 놓았고 포위망에 갇힌 보병은 상황파악도 하지 못한 채로 전멸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먼저 폴란드를 필두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프랑스에 이어 저지대 국가(네덜란드 등)가 정복당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작전도 비슷한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워낙 거친 지형때문에 전차전을 벌일 여지가 없었고 독일군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기습, 절대적인 항공전력, 천재적인 지휘관 그리고  잘 갖추어진 교통망 덕분에 1941년에는 자신들도 믿지 못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유럽의 정교한 도로와 철도를 통해 독일 공장에서 나온 무기가 바로 최전방으로 달려 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련의 경우에는 그런 교통망이 없었다. 그리고 소련의 철도 폭은 서유럽보다 넓어서 화물을 옮겨 실어야 했고 도로는 마차를 위해 만들어진데다가 비가 오면 진흙수렁으로 변했다.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 개시에 독일은 17개 기갑사단, 총 3,000대의 전차를 동원했다. 그렇지만 전차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약한 1호와 2호 전차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전차전에서 주력이 되어야 할 3호와 4호 전차의 수량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체코에서 노획한 38(t) 전차가 귀중한 전력이 되어 주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3호 전차는 거의 모두 37mm에서 50mm로 공격력을 높였지만 4호 전차는 75mm 단포신을 그대로 유지했고 1941년 7월에 소련의 T-34와 KV-1 전차는 독일군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소련은 6월까지 900대 이상의 T-34와 500대 이상의 KV-1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운용하지 못해 거의 모두를 잃고 말았다. 이 전차가 제대로 사용된 곳에서는 독일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전설적인 88mm 대공포를 전용하거나 75mm 대전차포를 동원해서야 막을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의 T-34로 초기형과 다른 포탑모양입니다.)

 

 

소련 전차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독일은 주력 전차의 공격력과 방어력 모두를 획기적으로 높여야 했고 4호 전차에는 장포신 75mm를 장착했지만 3호 전차의 포탑은 너무 작아서 50mm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고 소련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회복하고 있었다. 전차 공장은 철도로 우랄 산맥 너머로 옮겨져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생산을 시작했다.

독일의 전차 생산속도는 의외로 늘어나지 않았는데 히틀러의 배려가 큰 원인이었다. 그는 독일시민의 생활에 큰 지장을 주고 싶어하지 않았고 독일 여성을 공장에 동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42년 후반 동부전선 곳곳에서 급한 요청이 빗발치자 점령국 시민까지 동원해 1교대 원칙을 무너뜨리고 생산을 늘렸다.

그래도 1942년 11월 4호 전차의 생산량은 겨우 100대에 머물렀던 반면, 소련은 같은 시기에 무려 1,000대의 T-34를 전방으로 보내고 있었다.

 

독일의 산업생산력은 군수장관에 알버트 스피어(Albert Speer)를 임명하면서 급증했고 모스크바 공격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구데리안이 기갑군총감(Insptector of Armoured Forces)을 맡으면서 독일군 전차부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구데리안은 1943년 초에 타이거와 판터를 제외한 다른 전차의 생산을 중지시키려는 총사령부를 설득해서 4호 전차를 계속 주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3호 전차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1942년 12월부터 돌격포(일명 구축전차)로 전환해서 생산되었다.

 

 

1943년에는 타이거와 판터가 전장의 전면에 서게 되었다. 타이거는 1942년 레닌그라드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히틀러의 생일이었던 4월 20일에 포르쉐 형과 헨셀 형 두 가지를 모두 선보인 후에 헨셀 형이 선택되었다. 타이거는 동부전선에서 얻은 모든 교훈이 투입된 궁극의 전차였다. 

88mm KwK 36 주포는 소련 전차 사거리 밖인 1500m에서 당시의 모든 소련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고 장갑은 최고 100mm 두께였으며 심지어 차체 밑의 장갑도 26mm로 지뢰나 자폭견(폭탄을 달고 전차 밑으로 들어가도록 훈련된 개)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전차로는 처음으로 넓은 트랙을 사용해서 56톤의 체중으로 소련의 열악한 지형을 19km/h의 속도(도로에서는 36km/h)fh 달릴 수 있었다. 

타이거의 결정적인 약점은 너무 비싼 제조가(300,000 노동시간)와 회수하기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타이거는 설계목적인 전선 돌파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판터는 T-34의 교훈을 그대로 독일판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동안 직각이었던 독일군 특유의 전면장갑은 경사장갑으로 바뀌었고 도로에서 54km/h의 속도로 T-34가 가진 무장, 장갑과 기동력 모두를 그대로 빼닮았다. 판터도 만(MAN)과 다이믈러 벤츠 형이 경합을 벌여 만이 채택되었고 매달 250대 이상을 생산한다는 계획었다. 

그러나 요구가 계속 추가되어 실전에 투입되었을 때에는 지나치게 무거워졌고 기어와 트랜스미션이 쉽게 닳아버리는 한계를 드러냈다. 그래도 타이거에 비해 두 배나 빨리 생산할 수 있었고 크게 개선된 75mm 주포로 타이거와 거의 비슷한 관통력을 자랑했다.  

 

 

타이거 경합에서 탈락한 포르쉐형은 장포신 88mm를 무장한 69톤의 괴물 자주포 전차인 페르디난드(Ferdinand)로 재탄생했지만 기관총과 같은 부무장이 일체없었고 지나치게 느린 속도때문에 소련의 대전차병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소련 전차병이 가장 두려워했던 상대가 바로 페르디난드였다. 

 

 

3호와 4호 전차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쉬르첸(Schurzen)이라는 사이드 스커트가 추가되었고 쿠르스크에서는 841대의 4호 G형이 주력전차로 투입되었다. 무장이 강화된 4호 전차는 T-34와 충분히 맞대결을 벌일 수 있었다. 

 

 

3호 전차는 장포신 50mm로 업그레이드되어 432대가 투입되었는데 근거리에서 T-34를 격파할 수 있었다. 약 60대의 3호 전차가 화염방사 전차로 전용되었고 건조기였던 쿠르스크 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돌격포는 구데리안이 아닌 포병 계통의 결정을 따라 보병을 근접지원하는 이동식 포대로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단포신 75mm를 무장했다가 대전차 능력이 입증되자 장포신 75mm로 무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전차와 자주포가 개발되었는데 사진과 함께 설명하도록 하자.  

 

 

그리즐리 곰(Brummbar). 4호 전차 차체에 단포신 150mm 곡사포를 장착. 주로 적의 방어거점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 총 306대 제조.


 

코뿔소(Nashorn). 4호 전차 차체에 88mm 대전차포 장착. 473대 제조.

 

 

왕벌(Hummel). 4호 전차 차체에 장포신 150mm  곡사포를 장착. 714대 제조.

 


말벌(Wespe). 38(t) 전차 차체에 105mm 곡사포를 장착. 682대 제조.

 

 

담비(Marder) II. 2호 전차 차체에 장포신 75mm 장착. 651대 제조.

 

생산량이 증가하고 유지보수 작업을 거쳐 대부분의 기갑사단은 1943년 6월 당시에 100~130대의 전차를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단이 같은 수준의 장비를 보급받은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SS 친위사단이 가장 우선적으로 최신식 장비를 받았다. 기갑척탄병(Panzergrenadier) 사단인 라이브스탄다트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 다스 라이히(Das Reich), 토텐코프(Totenkopf)가 기갑사단 수준의 전차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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