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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3부)

by uesgi2003 2013. 5. 17.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3부)


소련의 준비


스탈린그라드의 승전은 독일군이 무적이 아니며 적군(Red Army)도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다는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소련의 선전전도 공산주의 색채를 버리고 러시아의 전통적인 애국심에 호소했다. 애국심과 조국해방전을 부각시키기 위해 적군은 공산주의 혁명 이후에 버렸던 군복과 휘장을 다시 도입했다. 특히 어깨끈은 1918년 차르군의 반혁명의 상징으로 낙인찍혀 금지되었었는데 복고풍 군복은 그렇게 환영을 받지 못했다. 어쨌든 소련군 그리고 스탈린의 태도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독일 남부 집단군이 하르코프를 재점령하고 전선을 안정시키자, 스탈린과 바투틴(보로네즈 전선군 지휘관)은 독일군의 기동전을 사전에 봉쇄시킬 선제공격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주코프와 다른 지휘관의 강력한 반대로 적군은 공세를 멈추고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943년 동부전선 지도를 보면 오렐(Orel) 남부와 하르코프 북부에, 독일군  방어선 안으로 깊숙히 들어간 상당히 큰 돌출부가 있고 그 중심에 쿠르스크가 있는 것을 바로 볼 수 있다. 

세 도시는 교통 중심지로 이 도시를 거치지 않고서는 어떤 작전도 시도할 수 없었다. 

(정확한 부대 배치와 지휘관 이름은 지도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정보원의 보고가 모스크바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독일군이 조만간 쿠르스크 돌출부를 제거할 대규모 작전을 시작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탈린은 스위스의 루시(Lucy)라는 반 나찌 첩보원을 통해 히틀러의 작전명령 6호를 통째로 입수할 수 있었다. 영국도 루프트바페 통신감청으로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해독해냈고 모스크바에 전달해주었다. 

독일군의 주력부대가 돌출부 북부에 집중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전선 지휘관에게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방에서 수집된 정보는 매우 정확했다. 독일군이 남과 북 두 방향에서 협공을 해서 전선을 250km 이상 줄일 계획이며 5월 초로 작전일을 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4월 8일 주코프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고 스탈린의 동의를 받아냈다. 

"적의 작전을 무산시키기 위해 선제공격하려고 공세로 나서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방어를 하면서 적의 기갑전력을 소모시킨 후에 예비병력으로 포위섬멸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4월 12일에 쿠르스크 일대를 난공불락의 요새화시킨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독일군의 주공은 보로네즈, 중앙, 남서와 브리안스크 전선군에게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었고 기갑군이 배후로 돌지 못하도록 종심 방어선을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될 5월까지 방어선을 얼마나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였다. 만약 독일군이 작전을 연기한다면 하늘의 축복이나 마찬가지일텐데... 실제로 그런 축복이 내려졌다. 



(소련군은 그 일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민간인을 모두 징집해서 사진과 같은 대전차 방어진지 공사를 시작합니다.)



(독일 최고사령부의 작전 연기로, 소련군이 준비한 대전차 진지의 한 단면입니다. 이런 진지는 계속 이어져서 결국 독일의 모든 예비전력이 쿠르스크에서 소진되는 겉으로는 무승부, 그러나 대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1941~42년에 입은 소련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지만 귀중한 교훈을 얻었고 1943년부터는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감행한 30년대의 대숙청은 일선 군지휘관의 머리에서 상상력과 전략적 사고를 지워버렸고 전장 주도권이라는 말은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않을 정도로 물 위에서 사냥을 기다리는 오리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히틀러와 달리 위기를 겪고 그리고 벗어나면서 귀를 열었고 성공을 경험하면서부터는 상급 지휘관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41년에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은 1942년 1월 7,700대에서 1943년 초에는 20,600대로 급증했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 막강한 독일 기갑군을 상대하는 임무는 T-34와 KV-1에게 맡겨졌다. T-34는 개전초에 가지고 있었던 결정적인 약점, 무선장비와 3명의 승무원 체제를 보강하면서 가장 신뢰성높은 전차전력이 되었다. 

반대로 개전 초에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괴물전차 KV-1은 여러 번 생산중단을 검토했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타이거 전차가 등장하면서 그 수명을 연장했는데 기동성 부족, 열악한 험지돌파 능력과 과도한 체중(44.7톤)으로 소련의 다리를 무너뜨리기로 유명했다. 

독일의 타이거에 대항하기 위해 KV-1 차차에 152mm 곡사포를 얹은 SU-152가 단 25일 만에 설계도면을 벗어나 1943년 1월에 실제 전차로 태어났다.  




















1943년 최초로 4개 구축전차 부대가 만들어졌고 48대가 배치되었다. 쿠르스크 전투 후에 소련군은 동물 사냥꾼(Zveroboi), 독일군은 깡통 따개(Dosenoffer)라고 부를 정도로 성공적인 데뷰를 했다. 동물 사냥꾼은 독일군 중전차가 호랑이, 표범, 코끼리였기 때문이었고 깡통 따개는 단 한 방으로 타이거 포탑을 날려버렸기 때문에 붙여졌다. 그리고 60mm의 전면 장갑은 대부분의 독일군 대전차 화기로는 버거운 두께였다. 


T-60과 T-70 경전차는 생산을 줄이고 T-70 차체에 걸작 다용도포 76.2mm를 얹은 SU-76M을 만들어냈다. 


이 자주포는 처음에 "병신 전차"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없었지만 대전차 성능뿐만 아니라 보병지원 화력으로도 성능을 인정받았다. 


해외원조(Lend-Lease) 차량도 소련군 전력에 대거 편입되었다. 1943년 중반까지 미국에서만 100,000대 이상의 수송 차량이 인도되었는데 영국산 처칠과 미국산 M3는 극악의 평가를 받았다. 소련 전차병은 M3를 "일곱 동무의 묘지"라던가 "야전 화장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래도 한 대의 전차가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1943년에는 소련 전차여단 전력의 20%가 렌드리스 차량이었고 10%는 아예 렌드리스로만 무장했다.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돌격포와 구축전차가 급하게 만들어져서 소량이라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자주포였던 육중한 KV-2 (52톤)는 122mm나 152mm를 탑재하고 보병지원 화력용으로 사용되었지만 3m가 넘는 거대한 차체로 참담한 결과만 보이다가 생산중단되었을 때에는 반대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SU-152 구축전차와 거의 같은 시기에 T-34 차체에 단포신 122mm를 장착한 SU-122도 생산을 시작했다. 원래 목적은 보병지원과 대전차 전투용이었지만 대전차 위력이 낮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43년 1월 동일한 전력을 갖춘 전차군 창설이 결정되었다. 서류 상으로는 1개 전차군은 2개 전차군단, 1개 기계화군단과 지원 부대로 450~600대의 전차와 48,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5개 전차군마다 맡겨진 임무와 보급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탈환 이후에 벌어진 장거리 추격전에서 기갑군의 존재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1개 전차군단은 3개 전차여단, 1개 기계화보병여단과 다양한 지원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자주포가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차여단은 53~65대의 대대가 2~3개로 구성되어 1개 군단은 총 200~230대의 전력을 보유했다. 


소련은 신형 자주포 전차를 다양하게 구성했는데, 초중자주포연대는 12대의 SU-152,  중자주포연대는 16대의 SU-122와 1대의 T-34, 경자주포연대는 21대의 SU-76과 1대의 T-34를, 혼성자주포연대는 17대의 SU-76과 8대의 SU-122로 구성되었다. 152mm 보유 연대는 보통 돌파임무가 맡겨진 연대에 배치되었고 경자주포연대는 전차군단에, 혼성자주포연대는 기계화군단에 배치되었다. 

그렇지만 성채 작전 후에나 분명하게 나누어 구성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