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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5부)

by uesgi2003 2013. 5. 24.


오랜 배경 설명을 마치고 드디어 첫 번째 전투 이야기입니다. 자세한 부대 나열은 피할 것이기 때문에 막상 전투 이야기는 쉽게 끝날 수도 있겠습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5부)


첫 날 - 북부 중앙집단군


5월과 6월 동안, 소련의 지령을 받은 파르티잔이 중앙 집단군 후방에서 테러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소련 공군기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혔다. 수 백량의 기관차이 파손되고 많은 군수품 피해를 입은 추축군은 파르티잔 진압에 나섰지만 오히려 민심을 더 악화시키는 반발만 일으켰다. 

히틀러는 여러 번의 작전연기를 거듭한 끝에 6월 25일 성채(Citadel) 작전을 7월 5일 새벽에 개시한다고 발표했고 7월 4일에는 전군에 메시지를 알렸다. 



(3대 파르티잔의 사진이 유명했었는데, 독일군은 또 하나의 침략군으로 우크라이나에 진군하면서 많은 반발을 일으킵니다. 특히 파르티잔을 처벌해서 전시하는 만행은 공포와 함께 적대감을 주게 됩니다.

스탈린은 현명하게도 공산주의가 아니라 위대한 조국 해방전을 내걸었고 많은 파르티잔을 만들어냅니다.)


"병사들이여! 오늘 여러분은 전쟁의 승리를 가늠할 수 있는 위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승리는 전세계에 독일군에게 저항하는 짓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알릴 것입니다. 내일 새벽에 시작될 대규모 공격은 소련군을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작전의 성공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련군은 독일 스파이 루시를 통해 7월 3~6일 사이에 공격이 시작되는 것은 알았지만 시간은 알지 못했다. 로코소프스키와 바투틴은 즉시 전군에 비상을 걸었다. 독일군이 언제 지뢰제거 작업을 시작하는 지부터 지켜보라는 명령도 내렸다. 7월의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숨막히는 공기가 양쪽 전선을 지배했다. 

특히 "전투전초소"로 부르는 최일선의 긴장은 대단했다. 이들은 독일군의 진격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전투에 휘말리게 되어 있었다. 이 방어선은 아군이 전선에 배치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다가, 만약에(!) 살아남는다면 후방으로 후퇴하는 역할이었다. 


독일군은 보통 공병의 지뢰작업과 함께 정찰대대가 전진하다가 적의 전초소를 만나면 전진을 멈추고 본대를 불러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본대가 배치되는 동안 독일 포병이 포격을 하는데, 소련군에게는 반갑게도 이 순서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7월 4일, 소련군은 공격 직전이라는 증거를 얻었다. 독일 공병대를 탈영한 슬로베이나 병사에게서 지뢰와 철조망제거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5일 동안의 술과 식품을 배급받았고 7월 5일 새벽 3시에 공격이 시작된다는 정확한 정보도 얻었는데 남쪽에서 독일군 정찰대가 보로네즈 전선군의 제52 근위 보병사단의 전초소와 전투를 벌였다는 정도가 들어오면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부터는 독일 전투공병 사진을 대거 올리겠습니다.)



공병의 기본 무장입니다. 



지뢰 탐지기 Wien 41을 사용하는 공병입니다. 철제 지뢰는 가능하겠지만 목재 지뢰는 탐지가 안되었고 지뢰 매설의 대가 독일군에게 배운 소련군도 대전차 지뢰 밑에 대인 지뢰를 바로 뭍어서 공병을 공격했습니다. 



Wein 41의 수납함입니다. 보통 원형의 탐지기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원통형입니다. 



4호 단포신형이 지뢰를 밟은 것으로 보입니다. 


남부집단군의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 제11 기갑과 제3 기갑사단이 저녁 9시까지 소련의 전초소를 모두 밀어냈지만 예상과 달리 쉽지 않았다. 48기갑군단이 집결했다. 새벽 1시 15분에 제2 SS 기갑군단이 무력정찰을 시작해서 2시간 만에 전초소를 제압하고 위치를 시작했지만 갑작스런 폭우로 유명한 "검은 땅"이 진흙밭으로 변해서 전진에 애를 먹었다. 


(자세한 부대 배치와 출발지점은 아래 지도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바투틴은 독일군의 무력정찰과 함께 포로에게서 계속 들어오는 정보에 따라 7월 5일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에 독일군의 전격작전이 시작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남쪽의 바투틴과 주코프에게 반격을 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북쪽의 모델도 행동에 나섰다. 지뢰제거와 무력정찰이 7월 4일 밤새 진행되었다. 소련군 전투정찰대가 지뢰제거를 하던 공병과 전투를 벌였고 한 명을 포로 잡았다. 그의 입에서 작전은 새벽3시에 시작된다는 결정적인 자백이 나왔다. 정보부는 주코프에게, 주코프는 다시 로코소프스키에게 선제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스탈린에게도 전투가 시작된다는 보고를 했다.

보로네즈 전선의 전 포대가 새벽 1시 10분에 불을 뿜었고 중앙 전선군은 2시 20분에 선제포격을 시작했다. 포격 대상은 이미 파악되었거나 알고 있거나 의심되는 독일 집결지와 포대였다.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독일군의 작전이 시작도 되기 전에 혼란을 준 것은 분명했다. 

소련의 선제포격을 보고받은 최고사령부는 중앙집단군은 2시간 30분, 남부 집단군은 3시간 작전을 연기시켰다. 그리고 독일군이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주도권을 소련에 빼앗기는 불길한 일이 벌어졌고 작전기간 내내 그런 일이 계속되었다. 




 

소련은 선제포격말고도 루프트바페가 활주로에 비행기를 대기시키는 가장 취약한 시간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다. 야간비행 능력이 없는 소련 폭격기는 밀집대형으로 비행하면서 미리 알려진 독일 공군의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선제공습에는 제2와 17 비행군의 417대가 참여했다.

그러나 독일의 최신 레이더 프레야는 소련군의 대규모 공습을 미리 포착했고 폭격이 시작되기 전에 충분한 전투기를 모을 수 있었다. 소련은 60대의 비행기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소련이 선제공습까지 시도하자 독일 최고사령부는 이미 작전이 누설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상황을 분석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성채 작전을 다시 연기할 수도 없었다.

 

소련의 선제포격에 두들겨 맞은 독일 포대가 4시 30분에 반격을 시작했다. 약 80분 정도 계속되었고 소련 방어선의 4km 이내에 있는 목표물을 공격했다. 소련은 900문의 온갖 화기를 동원해서 5시부터 30분 동안 대응포격을 했다. 루프트바페의 공습이 이어졌다. 휘파람을 부는 듯한 날카로운 폭탄 투하음과 수투카의 급강하 사이렌 소리는 전투를 처음 경험하는 소련 신병들을 기절직전까지 몰아 넣었다.

5시 30분, 첫 번째 독일 지상군이 전진을 시작했다. 제9군의 오른쪽에 있던 23군단이 소련군의 주의를 주력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으로 끌려는 위장공격을 시작했다. 아무리 위장공격이었다고 해도 소련군의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 지를 알 수 있었다. 대인지뢰는 보병들 사이에서 터졌고 공군의 근접지원과 전차의 엄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1.5km만 전진할 수 있었다.

 

모델의 주력은 그런대로 성공을 거뒀다. 모델은 선봉에 제20 전차사단의 3호화 4호전차만 투입했는데 지뢰제거 공병과 함께 20 전차사단이 보브릭 마을까지 5km를 진격했다. 정오가 다 되어서는 타이거와 페르디난드가 포리니(Poryni) 방향으로 진격하는데 성공했지만 보병과 단절되었다. 

로코소프스키는 압박을 받는 제31 군을 구원하기 위해 2개 전차여단, 1개 포병여단과 제21 독립 박격포여단을 투입했다. 푸코프는 제27 근위 전차연대와 전투 공병대를 투입해서 독일군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저지하려고 했고 로코소프스키는 350대의 비행기로 그를 공중엄호했다.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공중지원을 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선봉대의 진격이 막히자 골리아드 원격조종 자폭전차와 함께 페르디난드를 투입해서 방어선을 다시 돌파했지만 소련 제129 기갑여단에게 막혔다.  이 지점에서만 소련 공병은 급하게 6,000개의 지뢰를 새로 매설해서 모델의 작전을 지연시켰다. 



"소련 보병은 타이거와 페르디난드 앞에서도 공포에 질리지 않고 전투를 벌였다... 마치 모든 병사가 유명했던 '전차 공포' 예방주사를 맞은 것처럼 보였다. 소련군은 잘 위장된 개인참호에서 숨어서 전차가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뒤에 따라오는 척탄병을 상대했다. 전차장은 이미 장악했다고 생각한 지역에서 전투가 계속 되었다. 

척탄병을 지원하기 위해 전차와 돌격포를 되돌려야 했고... 밤이 되자 척탄병은 기진맥진했고 전차는 연료가 바닥이 났다."


곳곳에서 전차가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갔지만 보병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다시 되돌아가야했다. 첫날 모델은 소련군의 첫 번째 방어선을 8km 돌파했다. 

중앙집단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투입한 전차 300대 중에 거의 200대를 잃었꼬 20,000명을 잃었다. 첫날치고는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소련군의 저항은 집요했고 방어선은 상당히 두터웠다. 소련이 기대했던 소모전이 효과를 보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기습효과는 없었다. 어디에서도 만만한 곳이 없었다. 소련은 분명히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고 포로의 증언이 그것을 증명했다."


로코소프스키는 몇 주 동안 준비해 온 계획대로 바로 다음 날에 반격을 지시했다. 공격목표는 아주 단순하게 전날에 내준 첫 번째 방어선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17과 18 근위 보병군단, 2 전차군단의 3과 16 전차여단, 19 독립 전차군단, 9 전차군단을 동원하더라도 전선에 펼쳐진 독일군 전력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대담한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