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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6부)

by uesgi2003 2013. 5. 25.

 

정리하다가 올라온 다른 분의 의견에 답변하면서 그만 글이 다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10분 마다 저장하는 버릇을 들여야 하는데... 그나마 자동 저장된 글도 최신 것을 눌렀다가 이전 것을 날렸습니다. 자동 저장이 두 건 밖에 안되어서 실수에 실수가 겹쳐진거죠.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6)


첫 날 - 남부 집단군


켐프(Kempf) 군과 호트의 제4 전차군은 예정보다 3시간 늦게 공격을 시작했다. 4군은 다음 날까지 오보얀 남쪽의 프셀(Psel) 강 너머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48 전차군단과 2 SS 전차군단이 북쪽 길을 따라 포크로프카와 오보얀을 점령한 후에 쿠르스크로 향할 계획이었다. 48 전차군단의 첫번째 목표는 체르카스코에 마을로 페나 강의 남쪽 강변을 따라 구축된 소련의 첫 번째 방어선을 돌파해야 했고 선봉의 중심은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 사단, 제3 전차사단과 제11 전차사단이 있었다. 그리고 양 옆은 제332와 167 보병사단이 엄호했다. 

제3 전차사단과 332 보병사단은 소련 제71 근위 보병사단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어선을 뚫고 집요하게 버티던 소련군을 몰아냈다. 소련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독일 주력은 북쪽으로 향했기 때문에 71 사단은 동쪽에 다시 방어선을 펼칠 수 있었고 3 전차사단은 예정대로 페나 강변까지 진격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새벽 5시에 체르카스코에를 향해 타이거 중대를 앞세우고 진격했다. 왼쪽에 투입된 제10 전차여단의 판터 200대는 습지대에 숨겨진 지뢰밭을 지나고 말았다. 늪에 빠지고 파괴된 전차는 소련 대전차포의 좋은 목표물이 되었고 전차를 구하려던 공병들도 많으 피해를 입었다. 36대의 판터를 잃었는데 이건 공병의 잘못이 아니었다. 공병은 12시간 동안이나 공격을 받으며 지뢰제거 작업을 해서 길을 열었지만 그 넓은 지역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포병장교의 말이다.

"우리 전차는 어디있는거지?... 진흙에 빠져 있다... 갑자기 전차가 뒤에서 나타나더니 점점 많아졌다. 매우 긴포신을 가진 못 보던 신형전차다. 그래. 신형 판터!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의 흥분은 바로 싸늘하게 식었다."


궤멸직전이었던 판터 여단은 제11 전차사단이 소련 방어선을 토막내고 체르카스코에 마을을 점령하면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의 타이거 중대가 소련 제67 근위 보병사단을 밀어냈지만 치열한 전투때문에 호트의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했고 48 전차군단은 첫 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하우저의 II SS 전차군단은 지뢰밭을 잘 정리한 후에 356대의 전차와 195대의 돌격포를 투입했다. SS 사단 화력의 중심에는 8 공군군단의 비행기와 네벨베페르(Nebelwerfer) 여단이었다. 네벨베페르는 다중로켓 발사기로 2.5kg 탄두의 로켓을 6발 발사할 수 있었다.


(탄두의 크기와 발사기는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었습니다. 연합군에는 독특한 발사음때문에 '울부짓는 미미'라고 불렸는데 대규모로 사용할 경우에는 그 위력이 대단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최대 8km까지 발사할 수 있었고 정확한 명중이나 관통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보병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발사 후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위치를 완전히 노출당하기 때문에 그대로 버려두거나 바로 이동시켜야 했습니다.)



3개 SS 사단이 우측에 나란히 전개되었고 모두 선봉에는 타이거 전차를 세웠다. 이들을 상대로 소련 제52 근위 보병사단과 375 보병사단이 방어를 했는데 소련군 중에서는 상당한 정예부대라 최고사령부의 기대가 컸다.

 

라이브스탄다르테(Leibstandarte)의 선봉대가 비보브카(Bybovka)로 진격하면서 제5 근위 박격포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소련군은 카츄샤 다연장 로켓의 각도를 최대한 낮춰서 돌격해오는 독일군에게 근거리 포격을 했지만 비보프카는 오후 4시 10분에 함락되었다. 첫 번째 목표지점에 도착한 병사들에게는 잠시의 숨돌릴 시간도 주지 않고 "두 번째 방어선으로 진격하라... 프셀 강 너머에 교두보를 설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모처럼 스캔하는군요. 당시 소련군의 방어선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세 번째 방어선을 돌파하면 독일군의 장기인 기동전을 벌일 수 있는 무인지대가 나옵니다. 그래서 방어선 돌파에 모든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라이브스탄다르테 사단은 결국 극심한 저항을 만나 다음 날 아침에 공세를 이어가기로 하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다스 라이히(Das Reich) 사단은 초반에 생각보다 쉽게 풀려서 오보얀-벨고로드 도로를 끊었지만 제96 전차여단의 저항을 만났다. 토렌코프(Totenkopf) 사단은 제155 근위 보병연대를 밀어냈지만 완전히 궤멸시키지는 못했다. 

소련의 정교한 방어선 그리고 예상과 다른 집요한 저항때문에 호트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다. 그래도 첫 날에 20km를 진격해서 두 번째 방어선까지 구멍을 냈고 제52 보병사단도 완전히 둘로 쪼개놓았다. 

가장 남쪽에 있었던 켐프 특수군은 호트의 우익을 엄호하는 역할이 맡겨졌는데, 켐프가 제대로 측면을 보호해주어야 모든 병력을 전면에 투입해 공격력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짧은 포격 후에 켐프 특수군은 도네츠(Donets) 강 북단을 넘어 벨고로드 근처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에 제19 전차사단은 도네츠 강 건너 소련군 방어선을 돌파했고 이른 오후에는 제7 전차사단이 소련 제78 근위 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고지대를 확보했다. 고지대를 손에 넣은 독일군은 좌측으로 10km 이상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교두보가 커지면서 켐프는 제6 전차사단을 투입해서 교두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소련 제7 근위군이 받은 피해는 심각했지만 그렇다고 헛된 희생은 아니었다. 큰 피해를 무릅쓰고 켐프군의 발목을 잡았고, 호트와 하우저의 기갑군과 켐프군 사이가 크게 벌어져서 전면의 보병을 측면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호트와 하우저의 기갑군의 전력은 그만큼 약화되었다. 

바투틴은 계획된 대로 예비군을 이동시켜 반격에 나서려고 했지만 독일군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라 반격까지 시도하지는 못했다. 제1 전차군은 페나(Pena) 강 동쪽의 수비선을 유지하고 제5 근위 전차군은 제51 근위 보병사단을 보강했다. 그리고 31 전차군단은 긴급대응군으로 위험한 전선에 긴급투입될 예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바투틴은 거의 1,000대 정도의 전차를 동원했고 스탈린과 주코프의 비난을 샀다.

 

 

그렇지만 전선에 있었던 바실레프스키와 크루시체프는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독일군은 전면의 강력한 전차부대와 격전을 벌이게 되는 동시에 측면은 더욱 길게 늘어져서 반격에 노출되는데, 여기를 강력한 전차부대로 공격한다면 독일군 선봉은 고립되고 만다.

바투틴은 이것을 위해 밤새 병력을 증원했다.

 

 

(화질이 워낙 안 좋은데, 왼쪽이 남부 집단군, 오른쪽으 중앙 집단군입니다. 양쪽 상황이 어떻다는 정도로만 참조하시면 됩니다.)

 

보로네즈 전선군을 공격한 남부 집단군의 공격력은 대단해서 소련의 가장 강력한 첫 번째 방어선은 그대로 무너졌고, 반격하려고 남겨두었던 기갑부대는 보병을 지원하는 일에 투입되고 말았다. 그렇더라도 독일군의 측면이 그대로 노출되어서 소련군은 그곳을 파고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