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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6.25전쟁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의 숨은 이야기

by uesgi2003 2013. 6. 24.

 


내일이면 남북한 합쳐서 300만 명 가량이 죽거나 다친 민족의 최대비극 6.25 전쟁(한국전쟁 또는 한국동란) 63년째이군요. 

요즘 어린 학생들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잘 모르고 있어서 역사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기사가 있었지만 그건 국어교육이 우선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극소수의 학생 외에는 모두 알고 있으며 북이 침공했다고 해서 북침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6.25 전쟁에 대한 오해를 풀어볼까요? 제 목표가 된 불쌍한(?) 분은 더글러스 맥아더입니다. 일베충이나 어버이연합회는 이 분에 대해 한없는 존경심을 보낼텐데 미국의 자료를 보면 그렇게 존경만 할 인물은 아니며 심지어 6.25전쟁의 직접적인 원인까지는 아니어도 개전초기와 중공군의 역습에 대해 상당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알던 것과 달라 불편한 분도 있을텐데, 미국자료이고 상당한 신빙성을 가진 자료이니까 조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6.25전쟁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의 숨은 이야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반드시 등장하는 두 사진입니다. 먼저 필리핀 탈환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죠. 



맥아더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미국이 보유했던 지휘관 중에 상당히 뛰어났고 특히 인천상륙작전은 전사에서도 손꼽는 가장 대담하고 위대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단, 결과만 놓고 본다면요.


그에 대한 평가를 보면 장군으로서는 극찬이 많지만 미국시민으로서는 비난이 절대적이어서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미국의 적은 압도했지만 자신의 적은 무수하게 만들어낸 극과 극을 달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3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정작 그보다 명망이 높았던 맥아더는 공화당 당내경선도 2차례나 탈락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젊은 시절은 어머니의 교육열 또는 배려가 지나쳐서 마마보이에 가까웠을 정도였습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가 오만한 성격과 불운때문에 겪은 어려움이 어머니 메리 맥아더(일명 핑키 맥아더)에게 한이 되었고 아들에게 끊임없이 성공과 한풀이를 강조했습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스페인과의 전쟁에 참전해서 필리핀을 미국 식민지로 만드는데 공을 세웠고 1898년에 벌어진 필리핀 원주민의 독립전쟁을 잔인하게 진압해서 미국의 전쟁영웅으로 떠오르며 필리핀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필리핀의 왕으로 군림하며 워싱턴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를 무시했고 너무 심각한 갈등을 빚어서 결국 해임되었습니다.

그가 필리핀에서 그렇게 무시하고 괴롭혔던 윌리암 태프트가 전쟁상에 오르면서 결국 전역하게 됩니다. 태프트는 24대 대통령에 오릅니다.   


아들이 웨스트 포인트로 입학할 수 있도록 이사를 하고 인맥을 동원한 것도 부족해서 면접과외까지 시켜서 결국은 뜻을 이룹니다. 당시 웨스트 포인트는 폭력사태가 잦았기 때문에 부근 호텔에서 등하교를 시켰던 그녀는 아들의 첫 번째 결혼식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마땅치 않은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자 결혼식 자체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물론 두 번째 결혼식에는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자신의 허락을 받은 여성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어머니의 바램대로 수석졸업을 했고 뛰어난 재질을 보입니다만 무려 대령이 되어서도 어머니의 배려 또는 치마바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맥아더가 너무 오래 대령에 머무르고 있다면서 계속 청탁을 넣었고 인사권을 가진 장성들이 상당히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결국 기록적으로 어린 나이에 별을 달게 됩니다.

 

웨스트 포인트에서의 폭력사태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했던 이유도 있고, 어머니의 치마바람도 있고, 출세지향적인 인간성도 어우러져서 그의 첫 번째 결혼식에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동기들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1명의 동기만 참석했는데 그 정도로 메마른 인간관계였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리고 평생토록 그의 정치야망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932년에 있었던 보너스 군대(Bonus Army) 진압사건입니다.

 

보너스 군대는 1차 대전 참전용사들이 경제불황으로 압박을 받자 보상금을 조기 지급하자는 안건이 제출되었지만 당시 후버대통령이 재정압박으로 거부를 했고 3~4만 명의 참전용사와 가족이 워싱턴으로 행진해 경찰과 심한 충돌을 빚었습니다.

후버대통령은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에게 보너스 군대를 해산시켜달라는 요청을 했고 맥아더는 부관 아이젠하워의 진심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욕심 또는 극우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패튼이라는 미치광이(?)만으로도 모자라서 전차까지 동원해 후버대통령이 요청한 것보다 더 최악의 진압을 했습니다.

 

심지어 설득을 포기한 아이젠하워가 앞으로 나서지 말라는 조언을 했는데도 정복을 입고 자신을 최대한 돋보이게 만드는 실수를 했습니다. 필리핀 주둔 사령관으로 좌천아닌 좌천된 맥아더가 아이젠하워도 데려갔는데, 아이젠하워의 멘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군부대에게 진압되고 있는 시위대입니다. 주변에 구경을 나왔던 시민과 공무원은 이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진압하는 군인들에게 "Shame! Shame!"이라며 수치스러운 행동이라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골수까지 군인이라던 그가 참전용사를 무자비하게 그것도 대통령의 지시를 어겨가며 날뛴 것을 보면 그의 인간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필리핀 주둔 사령관으로 복귀하면서 위아래를 모르는 오만함으로 워싱턴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교훈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호언장담 그리고 작전실패로 필리핀은 일본의 점령직전에 몰렸고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이 말이 군인정신의 대명사인 것처럼 각색되어 찬사를 받고 있지만 사실은 매우 오만한 인간성을 또 보여주는 단면이었습니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가 아니라 미국이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바꾸라고 설득했는데도 끝끝내 자신을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태평양전선의 주도권은 니미치 제독의 해군에게 넘어갔고 승리의 주역도 해군이었지만 맥아더는 지휘권을 둘로 나눈 다음에 화려한 모습으로 전쟁영웅(위의 필리핀 귀환과 같은)으로 자리잡으며 극동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에 사령부를 차립니다.  

그리고는 바탄 갱(Bataan Gang, 우리나라의 하나회)이라고 불리는 측근세력의 요새를 구축합니다. 유능하다는 장교는 어김없이 도쿄 참모부로 불어들여 측근세력으로 키웠고 워싱턴 국방부가 파견한 일선 지휘관은 몹시 괴롭혔습니다.

 

많은 노인들이 우리나라를 구한 전쟁영웅으로 손꼽는 맥아더가 6.25 전쟁 3년 동안 한국에 얼마나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하루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도쿄에서 적을 판단하고 지휘했을 뿐 실제로 한국 땅에 발을 디딘 것은 몇 차례 안되고 그것도 바로 도쿄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1945년 해방 이후 8년 동안의 기간에도 하루도 있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는 북한군의 전력을 미개 원주민 수준으로 얕잡아보며 전쟁발발 가능성을 일축했습니다. 심지어 한 팔을 묶고도 인민군따위는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는 OSS(CIA의 전신)의 인민군 움직임이 심상치않다는 정보를 무시합니다. 군인으로서의 그는 극찬을 받지만, 그 중에서 누구나 동의하는 가장 큰 문제는 정보장악과 왜곡이었는데 6.25전쟁에서도 계속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최전방에서 멀리 떨어진 도쿄에서, 참모지휘를 하고 있었으니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는 원천봉쇄하고 유리한 정보만 계속 워싱턴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호언장담과 달리 필리핀에서와 같이 참패를 하게 됩니다. 맥아더는 대만으로 쫓겨간 장개석군대를 투입하려다가 워싱턴이 미군을 투입해 본격적으로 위기를 막기로 결정했고 맥아더는 일본에 있던 4개 사단 중 가장 허약한 24사단 중 일부를 투입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인민군의 전력에 대해 맥아더도 놀랐고 워싱턴도 놀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다행히 맥아더는 오만하고 완고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오면 유연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장점은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8군 사령관 워커가 동분서주하고 낙동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 덕분에 전선은 고착화되었습니다. 



이 때에 전사에서 손꼽는 인천상륙작전이 기획되었습니다. 미국 자료이기는 하지만 사실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는 일화에 따르면 맥아더가 "내게 해병사단 하나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상륙작전을 감행할텐데"라고 토로했고 2차대전 종전과 함께 해병의 입지가 약화되어 고민이었던 해병대 지휘관이 "그럼 하시죠. 적극적으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라고 부추기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를 제외한 99%가 반대한 작전으로 유명합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심해서 밀물때에 병력을 내려 놓으면 11시간이 지나서야 보급할 수 있을 정도였고 중간에 월미도가 있어서 상륙부대를 양분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륙지점이었습니다. 그리고 해변이 없어서 상륙정에서 내린 병사들은 발이 빠지는 갯벌을 1~3km나 걸어가야 했습니다. 


만약 인민군이 여기에 중화기와 함께 방어부대를 배치시킨다면 대학살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작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정보는 일주일 전에 정확하게 김일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중국은 일본의 스파이를 통해 많은 병력과 배가 집결하는 것을 파악했고 상륙작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문제는 목표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맥아더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던 중국은 인천이라고 확신하고 김일성에게 경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전쟁 전부터 중국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었고 중공군 지휘관은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보를 무시했고 인천상륙작전은 겨우 1,000명의 사상자만 내고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자신을 위한 빛나는 전과가 필요했던 그는 인민군 포위 섬멸보다는 서울 수복에만 집중해서 서울 지역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인민군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게 됩니다. 

여기에 그의 야망이 그대로 드러나는 결정을 내려서 다시 한 번 워싱턴과 불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10군단을 새로 편성했고 지휘관으로 자신의 오른팔 참모인 에드워드 알몬드를 임명한 것입니다. 



사진에서 오른쪽에 맥아더와 바짝 붙어있는 인물이 알몬드 소장입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면서도 아래의 LVT 상륙정을 보고 "저게 물 위에 뜬다는 말이지?"라고 놀라워해서 해병들을 까무라치게 만들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도 지휘권을 8군 사령관 워커에게 넘기지 않고 그대로 10군단을 존속시키면서 알몬드와 워커를 경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 후에 붕괴된 인민군을 파죽지세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종전이 손 끝에 잡혔던 것은 잘 알 겁니다. 바로 이 순간에 중공군이 개입해서 장진호 등에서 연합군이 참패하고 결국 서울을 다시 내주고 말았죠.

이런 역전기회를 내준 것은 맥아더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그는 다시 도쿄로 돌아가 쉴 새없이 두 지휘관을 경주시키며 밀고 올라가라는 명령을 계속 보냈습니다. 심지어 처음보는 군대인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포로를 잡았다는 보고가 계속 들어오는데도 말입니다. 


워싱턴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지만, 맥아더는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오판을 합니다. 중공군 전력은 1~3만 명 수준이며 본격적인 중국개입보다는 북한에 이미 주둔해 있던 부대에 불과하며, 실제로 중국이 참전한다고 해도 우세한 공군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오기 전에 피바다를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한 것입니다.


맥아더가 큰 소리를 칠 당시에 중공군은 이미 30만 명의 전력이, 그것도 연합군 배후 깊숙이까지 침투해 있었습니다. 중공군 사령관 팡드화이는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어놓고 연합군이 들어와주기만을 바랬는데 맥아더가 쉴 새 없이 병사들을 밀어넣었으니 당연히 기뻐했습니다. 


이후에도 자신의 오판을 애써 변명하며 자신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3차대전을 유발시킬 온갖 제안을 날려댔습니다.


예를 들면 압록강 너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던가, 50만 명 정도의 중공군이 투입되었으니까 중국 남부가 비었을테니 장개석을 지원해서 중국 본토에서 전쟁을 벌이자느니 하는 일개 지휘관이 할 수 없는 생각을 했고 결국에는 오래 전부터 해임시키겠다고 마음먹은 트루만이 결정을 내리게 되어 일본의 왕위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역대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유명했는데 후버 대통령부터 루즈벨트 대통령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에 와서는 최악의 항명을 일삼았습니다. 트루먼이 본국으로 소환해서 해임시키려고 훈장서훈과 의회연설을 제안했는데 낌새를 눈치챈 맥아더가 2번이나 거부했었고 트루먼과 중간에서 만났던 회담에서는 대통령에게 경례도 안하는 엄청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겠다는 있을 수 없는 양해를 받아내어서 트루먼이 "내 얼굴에 이렇게 담배연기를 뿜어낸 사람은 없었습니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죠.

미국인의 존경을 받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급사를 하자 "거짓을 일삼았던 사람이 죽었구만"이라고 대놓고 말해서 참모들을 경악시킬 정도로 주제를 모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대통령을 모욕한 데에는 자신이 차기 대통령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민주당에게 내리 패한 공화당은 차기 대통령후보로 맥아더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1944년과 1948년 두 차례에 걸쳐서 당내 경선후보로 밀었지만 모두 참패했습니다. 워낙 극우파 성향에 강경파의 지지세력이 모이다 보니 중도파와 온건파가 모두 반대로 돌아섰던 것이죠.

그나마 유리했던 1948년 경선에서는 자신의 고향에서도 과반득표에 실패했을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1952년 경선에서는 아예 후보로 추대되지도 못할 정도로 인심을 잃었습니다. 


맥아더의 재능이나 업적에 대해서도 책 한권이 나올 정도이지만 그의 인품에 대해서도 책 한권이 나올 정도로 많은 일화를 남겼습니다. 아주 안 좋은 쪽으로요. 


두 번째 부인인 진 맥아더는 남편을 보스 또는 장군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 분위기는 보수일색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데...

문제는 가식적인 맥아더의 연출입니다. 모임이나 파티가 있을 때면 부인이 먼저 나타나 참석자들에게 인사를 나눈 다음에 '장군님이 오십니다'라는 말을 한 후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아내와 인사를 나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와 몇 년 만에 만나는 모습이어서 상당히 불편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까발리면... 1942년에 필리핀 대통령인 마누엘 케손에게서 50만 달러의 개인적인 뇌물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거금인데 필리핀을 후원한다는 명목이었죠. 그 이전에도 받았는데 금액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워싱턴 정가에서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아이젠하워는 정중히 뇌물을 거부하고 기록에 남겼다고 합니다. 

 

많은 미국역사학자가 이런 시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맥아더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라고 생각하는 분은 http://blog.daum.net/uesgi2003/769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