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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6.25전쟁 - 알기 쉬운 질문과 답변

by uesgi2003 2013. 6. 25.


뉴라이트가 득세를 해서 올해는 6.25전쟁이 상당히 떠들썩하게 지나가겠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조용하네요? 아마도 국정원 정치개입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NLL 삽질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는 모양입니다. 


'NLL 포기'라고 1면 톱 기사로 충격을 주었던 조중동 찌라시들은 '그 때는 그런 줄 알았다니깐'으로 일관하겠군요. 공개된 회담자료를 잘 읽어보면 연합뉴스의 보도 그대로입니다. 어떻게든 왜곡을 해서 잘못을 덮고 싶은 새누리나 그걸 그대로 따라하는 51%나 서로 정말 잘 만났습니다. 


盧, NLL "옛날 '기본합의' 연장선상서 협의" 강조

'기본합의'는 '해상분계선 확정 때까지 쌍방이 NLL 존중'연합뉴스 | 입력 2013.06.25 17:10 | 수정 2013.06.25 17:39
http://media.daum.net/issue/499/newsview?issueId=499&newsid=20130625171009601
그래서 문재인씨가 깔끔하게 다시 정리했군요.

 이번 이야기는 6.25 전쟁(한국전쟁 또는 6.25사변)의 배경에 대해 온라인 세미나의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알기 쉽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워낙 많은 주제라... 그냥 참조자료로만 생각하시는 것이 편할 겁니다. 
6.25전쟁 - 알기 쉬운 질문과 답변
1. 전쟁의 원흉 김일성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김일성이 가공의 인물, 그러니까 실제 독립운동을 한 분은 따로 있고 소련이 내세운 가짜라는 설이 한동안 유력했었지만 외국 자료를 보면 김일성이 실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맞습니다. 

무장단체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국단체를 거쳐 소련군 특수저격부대에 입대하게 되고 소령계급을 달게 됩니다. 김일성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을 정도이니까 상당한 활약을 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북한이 선전하는 슈퍼 히어로는 날조된 것입니다


일본패망과 함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김일성을 내세워 위성정권을 세우려고 하지만 당시 북한에는 조만식선생이라는 민족주의 지도자가 있었고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어서 소련과 김일성은 무척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대중집회에서 당시 인식으로는 새파랗게 어린 김일성 그리고 뭔소리를 하는 지 모를 정도의 나약한 모습으로 북한 시민과 소련을 실망시켰습니다. 


소련은 조만식선생과 김일성을 연합시키기 위해 군부만 김일성에게 맡기는 연정을 제안하기도 하고 암살위협도 하지만 조만식선생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김일성에게 1946년에 연금되었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후에 암살되었습니다. 



남한의 유명인사들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사진과 같은 맞교환 협의까지 했었지만 김일성의 기만 또는 이승만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2. 그럼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승만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워낙 명암이 뒤섞인 인물이라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여러분이 직접 판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매우 비판적이고 자극적인 동영상 자료입니다. 



그리고 KBS가 제작한 상당히 부드러운 동영상 자료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동영상과 부분 부분 통한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젊었을 때에는 어땠던 늙어가면서 그리고 권력을 잡으면서 추악하고 무능한 모습만 보였고 결국에는 6.25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6.25 전쟁 후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았지만 6.25 전쟁만 놓고 본다면 그는 5가지 결정적인 잘못을 했습니다. 그 중에 마지막 3가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 북침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북한과 미국을 자극시켰습니다. 
미국이 남한을 무장시키지 않은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현실도 모르고 반공과 북진통일을 외치는데 공격용 무기를 대줄 리가 없죠. 그리고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이 양쪽이 사소한 분쟁을 계속 일으켰습니다. 

-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도 국방을 등한시했습니다. 
북한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가 계속 수집되었지만 아무런 준비태세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에게는 내정문제가 더 시급했을 것이고 미국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북진통일은 고사하고 자주국방조차 안되고 있었습니다. 

- 시민을 버리고 탈출했습니다. 
수도가 위협받았기 때문에 탈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대전으로 도망친 상태에서도 시민들에게 수도에 남으라는 방송을 하고 성급하게 한강철교를 파괴해서 수많은 시민이 북한에 협력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부역자라고 처벌했습니다. 
일개 조폭 행동대장이라도 부끄러움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자체가 없어보였습니다. 

- 무고한 국민을 학살했습니다.
제주 4.3학살사건부터 보도연맹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적게는 50만~100만 명의 국민을 학살했습니다. 그가 직접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각료가 내린 결정이었고 그는 최고결정권자로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서울수복 후에 벌어진 황당한 부역자 처벌은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 망명정부를 협의했습니다. 
부산으로 내려간 그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 제주도, 일본, 서사모아 등의 망명정부를 검토했습니다. 

그는 그냥 조선의 왕이 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3. 김일성이 남침결정을 했다고 해도 당시 세계최강이던 미군이 있었는데 전쟁을 일으켰네요?

소련의 스탈린은 전쟁에는 반대하면서도 북한군을 중무장시켰습니다. 최신형 전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T-34/85와 야크 전투기 등으로 현대화시켰죠. 스탈린은 계속 반대를 했고 김일성은 무려 48차례나 허락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이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더구나 북한 인민군 정도는 한 팔을 묶고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다(맥아더)는 판단에 따라 미군을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스탈린은 한국에서 전쟁을 벌여도 미군은 참전하지 않는다는 오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박헌영이 전쟁 발발 시에 남한의 공산주의자 20만 명 이상이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장담도 김일성이 오판하게 만든 한 원인이었습니다. 
당연히 공산주의자의 무장봉기는 없었습니다. 

1949년에 중국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끝나고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전쟁에 대해 조언을 하려고 하지만 김일성은 매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전쟁이 발발한 후에 마오쩌둥에게 참전할 수도 있으니 병력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4. 그렇다면 소련군과 중공군도 참전했겠군요?

중공군의 참전은 워낙 유명하지만 소련군 참전기록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마지못해 승인은 했지만 병력지원은 하지 않았고 위기에 몰리자 중공군의 투입을 요청했습니다. 중국(중공)이 압도적인 연합군의 공군전력을 상대하기 위해 소련의 공군지원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웠고 소련은 최신예 제트기와 정예조종사를 투입해서 중공군과 인민군의 이름으로 북한 북부에서 공중지원을 했습니다. 

5. 6.25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워낙 많은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냥 지도로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모든 지도는 클릭하면 커지니까 큰 지도로 잘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역사와 달리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에 유투브 등에 한글 다큐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6. 남한의 국방군 전력이 얼마나 허약했기에 단 40일 만에 낙동강너머로 밀려났죠?  미군까지 투입되었었다면서요.

미국 극동사령부의 '남한은 아시아 최고수준의 전력'이라는 과대평가 (베트남에서도 월남군이 아시아 최고라고 또 헛소리를 했었죠)와 달리, 그리고 이승만의 북진통일 호언장담과 달리 남북한의 전력차이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습니다. 


당시 북한에 비해 유일하게 앞섰던 전력은 해군이었습니다. 해군은 성금으로 구입한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었죠.  600톤 급의 
백두산함은 개전 첫 날부터 북한의 무장수송선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렇지만 전차와 항공기에서는 0대 100이라고 할 정도의 전력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장갑차가 있었지만 정찰용 장갑차에 불과해서 구시대의 유물이지만 아직은 전력가치가 있었던 T-34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미군은 한국과 같이 도로가 없는 산악지형에서는 전차가 소용없다고 판단했지만 인민군의 전차는 미니 블리츠크리그(독일의 전격전)라고 부를 정도로  전선돌파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리고 중화기도 없는 국방군은 훨씬 우세한 적을 기습을 받았으니 순식간에 궤멸될 수 밖에 없었죠. 더구나 6월 25일은 군인들이 외출하는 일요일이었습니다. 


 

전쟁발발 약 10일 후에 일본주둔 중인 미병력중 최약체인 24사단의 선봉대인 스미스대대가 오산부근에서 인민군과 첫 교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역시 훈련과 장비부족 그리고 심각한 인종차별의 오만함으로 순식간에 궤멸되고 맙니다.

T-34가 나타나자 "전차가 보이는데, 우리 전차는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황당한 보고를 했고 다른 연대에서는 "이제 맥아더 장군의 첫 승리를 기록할 것입니다."라고 기자들에게 큰소리치던 연대장이 T-34를 보고서는 "우리는 전차를 안가져왔는데?"라는 헛소리를 한 것이 유명합니다. 


7. T-34가 알려진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무적의 전차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군이 보유한 대전차포로는 힘들었어도 2.36인치 M9 로켓포로는 충분히 부술 수 있었습니다(위의 도표에서의 적전차 파괴불가능은 오류입니다.) 2.36인치는 100m 유효사거리 내에서 102mm의 장갑을 뚫을 수 있었고 2차대전에서도 독일전차를 상대로 위력을 발휘했었습니다. 



국방군이나 초기의 미군 모두 훈련부족으로 T-34의 약점을 제대로 노리지 못하고 당황했거나 인민군의 전차와 보병 협동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남은 탄약을 오래 보관하는 과정에서 불발탄이 다수 발생했다고 합니다. 

M20 슈퍼 바주카가 보급되고 미군도 M4 셔먼과 M-26 퍼싱을 전개하면서 T-34는 그 위력을 완전히 잃게 됩니다. 물론 그 이전에 공군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전차가 사라진 후였습니다. 


8.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을 왜 결국 돌파하지 못했을까요?


그 덕분에 저나 질문자나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겠죠. 인민군은 전략및 전술에서 많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우선 도강할 수 있는 장비가 없었고 병력을 요충지에 집중시켜 돌파하기 보다는 전선 전체에 걸쳐 차례로 나누어 소모전을 펼칩니다. 


이 당시 망명정부를 고민하던 이승만 일행과 달리 미군과 국군은 죽은 후에나 전선을 내주겠다고 필사의 방어전을 펼쳤고 심지어 8군 사령관 워커는 정찰기를 타고 날아다니며 부대를 지휘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연합군의 융단폭격으로 최전선으로 향하는 인민군의 보급로는 끊긴 상태라 전선을 돌파해 확대할 전력이 바닥나있었습니다. 천혜의 방어선, 연합군(국방군포함)의 필사적인 방어, 보급과 공군력의 차이, 인민군의 오판 등으로 전선은 그대로 고착상태가 된 것입니다.


9.  인천상륙작전으로 대반격의 계기를 잡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렇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남북한 최대의 요충지인 서울을 탈환했고 배후가 끊긴 인민군은 전 전선에 걸쳐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맥아더 편에서 정리했듯이 성공했다는 것이 천운일 정도로 운이 좋은 작전이었습니다. 중국이 일주일 전에 정보를 파악해 김일성에게 넘겨주었지만, 중국과 사이가 나빴고 낙동강전선에 집중하고 있던 김일성이 무시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전선이 언제 붕괴될 지 모르는 상태에서 핵심전력이 해병대를 포함한 약 75,000명의 병력을 후방으로 빼냈다는 것 그리고 인민군포위섬멸보다 서울탈환에 중점을 두었던 것, 마지막으로 8군 사령관 워커와 인천상륙작전의 10군단 사령관 알몬드로 지휘권을 양분한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너무나도 위험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작전이기도 했습니다. 75,000명의 병력을 낙동강전선에 투입해서 반격을 했더라도 충분히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전차를 앞세운 반격작전으로 최전선에 매달려있는 인민군을 포위해 각개격파했다면 더 심각한 피해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10.  지원병 수준으로 개인화기도 없는 중공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중공군이 개인화기도 없는 오합지졸이라는 것입니다. 중공군은 위기에 몰린 김일성을 구하기 위해 갑작스레 투입된 것이 아니고 이미 전쟁 전부터 김일성에게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고 7월에는 정식으로 스탈린의 요청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미국자료에 따르면 중공군은 최정예군인 제4야전군에서 3개군을 차출해 36개 사단, 총 70만 명의 병력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7개 포병사단과 고사포부대까지 투입했습니다. 불과 1년 전에 국공내전을 끝냈고 미국의 군수지원을 받던 국민당군의 무기를 모두 흡수했기 때문에 개인화기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포로에게서 나온 개인화기가 너무 깨끗한 것이라 놀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도 미군을 상대로 총 20만 명(6만 명 전사)의 인명피해를 예상했었으니까 개인화기도 없이 나팔만 주고 전장에 내몰리가 없었죠. 


종전을 앞두고 의욕이 넘쳤던 맥아더는 중공군 포로의 자백을 애써 무시하고 연합군의 진격을 계속 몰아붙였습니다. 당시 중공군은 평등사상에 따라 일반병사들까지도 작전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자백은 대단한 정보였습니다. 

중공군과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질 때 조차도 원래 북한에 주둔하던 최대 3,4만 명의 병력에 불과하며 본대가 압록강을 넘어오는 순간에 공군력으로 궤멸시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미 30만 명 이상이 연합군의 배후 깊숙이 들어와 주요 고지를 장악하고 연합군이 무방비로 포위망 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연합군의 강점이자 최대약점은 기동력이었습니다. 북한의 얼마 안되는 도로만 이용하다 보니 중공군은 전장터를 고르기 너무 쉬웠고 그리고 퇴로를 막기도 너무 쉬웠습니다. 아래의 장진호 전투처럼 고지를 점령하고 후퇴하는 연합군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북한의 도로는 남한의 도로보다 훨씬 열악해서 차 몇 대만 주저앉으면 연합군은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공군측 주장에 따르면 장진호전투에서만 약 13,0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습니다. 


맥아더가 해임되고 릿지웨이가 지휘권을 잡으면서 고지를 선점하고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소모전으로 전략을 변경했고 이것이 중공군에게 제대로 먹혀들어갔습니다. 

남한 원주까지 내려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연합군의 공습을 피해 산악으로만 보급품을 나르다보니 1개사단이 한 달에 40톤의 보급도 못 받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미군 1개 사단은 600톤의 비교도 안되는 보급을 받았죠.


무엇보다 중공군의 전력을 약화시킨 것은 식량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식량을 구할 수도 없어서 굶주림이 극심했다고 합니다. 아마 고지를 둘러싼 소모전에서 개인화기도 없는 중공군이 대거 등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11.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외국에서 부르는데 왜 그런가요?


미국에서는 Forgotten War라고 부르며 참전용사들이 제 대접을 못받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2차대전과 베트남전 사이에 낀 전쟁이고, 당시 한국은 극동의 거의 의미없는 국가이었고, 미국도 중국과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억지로 끌려들어갔고, 트루먼과 맥아더의 극심한 적전 분열도 있었고, 3년 간에 걸친 희생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과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한국에서도 이미 잊혀진 전쟁이 되었는데 외국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섭섭해 할 문제는 아닙니다. 


대신에 전사가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전장이었습니다.


먼저 세계최초로 제트기의 공중전 무대가 된 곳이 바로 한국의 압록강 일대로 미그기 계곡(Mig Alley)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제트기를 먼저 투입한 쪽은 연합군으로 미군은 F-84 선더제트, 영연방의 글로스터미티어와 같은 초기 제트기가 북한 상공에서 프로펠러 야크기를 격추시키고 다녔습니다. 

소련은 중공군과 인민군을 지원하고 자신들의 최신형 전투기를 테스트해보고 싶은 욕심에 Mig-15를 대거 투입합니다. 물론 국제분쟁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말입니다. 


 

성능이 월등히 앞선 미그기때문에 공습에 나선 폭격기와 호위기가 큰 피해를 입자, 미군도 서둘러 최신형 제트기를 투입하게 되면서 세계최초의 제트 공중전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F-86 세이버입니다. 




 

"그림 잘못 올렸는데요!"하시는 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 전투기이기 때문입니다. 원형은 2차대전 독일의 제트기 ME-262(바로 직결되는 원형은 Ta-183이지만 실전에 투입되지 못한 프로토타입이라 후퇴익기의 원형으로 ME-262를 인용합니다)였고 소련은 영국의 황당한 결정덕분에 귀중한 제트 엔진을 손에 넣어 Mig-15를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Heinkel HeS 011) 독일의 제트기 기술자들은 거의 서방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핵심인 제트엔진을 개발할 수 없었죠. 그런데 영국이 우호증진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돈이 필요했던지(설마?) 소련에 이 엔진을 고스란히 넘겨주는 기적이 발생합니다. 스탈린도 황당해 했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입니다. 



두 제트기는 성능은 세이버가 조금 낫고, 무장은 15가 조금 나은 난형난제였으며 미군은 세이버 78기 손실에 미그기 792기 격추라는 압도적인 전과를 발표했었지만 소련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그 비율은 1:1.5 정도로 낮춰졌습니다. 


그리고 독일:러시아, 독일:미국이 아니라 미국:러시아 전차전을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전장이었기에 지금도 외국의 아마추어 전사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한국의 좁은 도로와 산악지형때문에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질 전장이 없었고 연합군의 전차가 본격적인 활약을 할 때에는 이미 인민군의 T-34/85는 거의 정리된 상태라 소규모의 전차전 정도만 벌어졌었습니다.


먼저 미군이 T-34를 상대로 급한 나머지 M24 채피 경전차를 투입했고 본격적인 전차전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전차입니다. 



겉모습만 봐도 이 전차와는 상대가 안되죠?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하고 맙니다. 1:7의 비율로 격파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후에는 거의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M-4 셔먼과 M-26 퍼싱입니다.

셔먼의 경우에는 독일군을 상대로 좀 안쓰러운 전차였지만 한국에서는 나름 귀중한 전력이 되었습니다. 연합군 전차에는 이렇게 호랑이 그림을 그려넣은 것이 많은데... 실전에서는 이런 화려한 무늬는 표적역할만 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많았던 것을 보면 인민군의 전차나 대전차 무기가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서울수복에 나선 M-26 퍼싱입니다. 퍼싱부터는 T-34와 1:1 대결에서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개발시기 자체가 다르니까요. 이 전차는 독일군을 상대로 개발된 전차여서 90mm 포와 중장갑을 자랑했습니다. 



12.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한국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로 그런가요?


설마요!. 맥아더였기 때문에 오히려 개전 초기에 그렇게 당하고 중공군에 당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듯이 그는 한국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욕을 위해 도쿄에서 한국의 전선을 좌지우지했을 뿐, 실제로 온갖 고생을 다해 인민군을 막아내고 중공군에게서 탈출하고 전선을 회복한 지휘관들은 따로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어도 서울은 탈환되었을 것이고, 서울을 다시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개인이 판단할 일이기는 합니다만.


13. 한국전쟁 영화로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있나요?


저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고지전을 추천합니다. 특히 고지전은 반드시 볼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