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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8부)

by uesgi2003 2013. 7. 1.


쿠르스크 전투가 남과 북 양동작전인 것은 이제 아시죠? 중요 지명, 부대와 지휘관 이름을 익혀두시면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공부하듯이 외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다시 남쪽 이야기입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8부)


7월 6일 오전이 되어서야 오보얀Oboyan으로의 공세가 재개되었다. 오보얀의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 사령부가 있는 곳으로 프셀강을 건널 수 있는 전략요충지였다. 당연이 양쪽 모두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호트는 제3, 11 전차사단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이 90분의 포격 후에 공격에 나서게 했다. 루프트바페는 200회 이상의 지상공격 출격에 나섰고 러시아군의 최전방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제67 근위보병사단은 동쪽 멀리 2 SS 전차군단과 전투를 벌이던 52근위보병사단까지 밀려나면서 늦은 오후에는 2차 방어선 너머로 후퇴하기도 했다. 

2차 방어선이 워낙 치밀하게 구성되었고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의지덕분에 독일 48전차군단의 8번에 걸친 공격이 막혔고, 오보얀 도로에 올라설 수 없게된 독일군은 다른 시도를 하기로 했다. 



중앙의 작은 체구가 호트입니다. 쿠르스크 당시는 아니고 1941년도 모습입니다. 


라코보근처의 페나강이 처음에는 좋아보였지만 수위는 낮은 반면에 늪과 진흙 강변때문에 전차가 이동할 수 없었다. 호트의 3개 부대는 토마로프카-오보얀 도로를 따라 시르체보Syrtsevo를 지나 북동쪽으로 향하는 진격로를 택했다. 

이에 맞서 러시아 제90 근위보병사단과 3 기계화군단이 맞섰고 제35 대전차연대가 급하게 보강되었다. 독일의 기록에 따르면,


...좌익의 제3 전차사단의 자비도프카 공격은, 알레세에프카와 루카니노에 대한 그로스도이칠란트 공격처럼 실패했다. 모든 지역에 지뢰가 매설되었고 고지대를 선점한 러시아군의 전차가 모든 전선에 걸쳐 포진하고 있었다. 아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제3 전차사단은 반격까지 받았다. 공군의 계속된 집중공습에도 불구하고 적의 방어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2개 보병사단 일부와 2개 기계화여단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약 100대의 전차가 참호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전쟁일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차가 순조롭게 전진 중이며 두브로바 남쪽을 장악할 수 있겠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평원에서 2차 방어선을 지키던 볼쉐비키와 치열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벙커와 잘 엄폐된 T-34 때문에 더 이상의 전진이 힘들어졌다. 아군의 피해, 특히 전차손실이 늘어났다. 보병들은 전차가 전진할 수 있도록 방어선을 일소하려고 노력했고 용감한 기갑척탄병이 밤에 두브로파까지 전진해서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도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아니고 그냥 적의 방어선 안에 머무르고 있는 수준이었다. 많은 전차가 직격탄이나 지뢰로 전장에 버려졌다...


러시아는 오후 5:00시까지 페나강 전투에서 독일군 전차를 74대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7월 6일 오전, 충분한 보급을 받은 하우저의 2 SS 전차군단은 다시 한 번 공세에 나섰다. 왼쪽의 라이스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사단, 오른쪽의 다스 라이히 사단과 함께 전차가 벨고로드-오보얀 도로에 올라섰다. 선두 타이거가 제51 보병사단을 돌파하고 이아코블레보 남쪽의 5근위전차군단의 T-34를 상대했다. 


... 경사면에서 약 1km 거리를 두고 마치 체스판의 말처럼 서로 마주쳤다. 모든 타이거가 포문을 열었다. 엔진음이 울리면서 전투가 치열해졌다. 타이거 안의 전차병은 침착해야 했다. 매우 침착하게 적을 조준하고 재빨리 발사한 후에 빠르게 움직였다. 몇 미터를 더 전진한 후에 우측으로 돌아서 적의 조준을 피했고 다시 적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더 이상 아군에게 포탄을 퍼붓지 못하는 전차의 숫자를 세보았다. 1시간 후에, 12대의 T-34가 불타올랐고 나머지 30대가 이리 저리 급하게 움직이며 포를 발사했지만 우리 전차의 장갑은 매우 단단했다...


전력을 다해 반격했던 근위 전차는 다른 근위보병사단과 함께 동쪽으로 밀려났고 제3 기계화군단의 전차 일부와 51근위보병사단만이 포크로프카와 볼시에 마이아치키를 지키고 있었다. 

2차 방어선을 돌파한 하우저는 고민에 빠졌다. 프로호로프카로 가는 길이 열렸지만 그가 받은 명령은 북쪽으로 오보얀을 향해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측을 엄호할 보병이 아직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출된 상태였다. 하우저는 측면을 보호하기로 하고 프로호르프카로 진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우저의 판단은 옳았다. 초저녁에 러시아 2전차군단이 리포프이 도네츠강을 건너 하우저의 오른쪽을 노렸고 훨씬 남쪽에 있던 제96전차여단도 하우저의 배후를 노렸기 때문이다. 근위군 전차부대의 공격을 로프트바페의 지상공격기가 차단해주기는 했어도 하우저의 측면이 얼마나 취약한 지를 잘 보여주었다. 측면을 보호하기로 되어 있던 SS 기갑척탄병사단 토텐코프는 그날 하루 종일 목표지점까지 이르지 못했다. 


남쪽에 있던 켐프 특수군Army Detachment Kempf도 도네츠강 북부의 교두보를 돌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제19 전차사단이 벨로프스코예를 점령했지만 러시아 81근위보병사단의 마지막 예비병력에 막혔다. 제7 전차사단은 방금 도착한 73근위보병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제6 전차사단이 합세하면서 러시아군은 바트라츠카야 다차까지 밀려난 후에 그곳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타이거 전차 뒤의 남부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입니다. 


켐프 특수군은 쿠르스크 당시에 다음과 같은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제3 전차군단: 6, 7, 19전차사단, 168보병사단

- 제11 군군단: 106, 198, 320보병사단

- 제42 군군단: 39, 161, 282보병사단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켐프는 하우저와 똑같은 고민을 해야했다. 측면을 보호할 것인지 아니면 북부로 계속 진격할 것인지. 원래 보병이 측면을 보호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만슈타인의 기갑전력 중 30%가 측면방어로 전용되고 있었다. 

바라던 만큼은 아니었어도, 48전차군단의 선봉대가 라코프레보 부근의 2 SS 전차군단과 연결되었고 오보얀을 본격적으로 위협하고 있었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있지만 계속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집단군은 상황을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바투틴은 이제 전선 곳곳에 구멍이 뚫렸고 밤이 되자 급하게 중앙전선군의 예비병력을 끌어들였다. 그는 한 밤 중에 4개 전차군단과 2개 비행군단을 호출했다. 

보로네즈 전선군에 파견되어 있던 바실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전선에 시급하게 2개 전차군단을 프로호로프카와 코보차에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 근위전차군을 오스콜강과 스타리이 오스콜 남부에 투입해야 한다...


스탈린은 그 요청을 전화로 승인하면서 "적을 예정된 위치에 고착시키고 서부의 브리안스크와 다른 전선에서 본격적인 작전이 벌어질 때까지 더 이상 물러서서는 안되오"라고 명령했다. 

스텝 전선군의 코네프는 5전차군단을 전진시키라는 명령을 받았고 포포프의 2전차군단도 움직이면서 프로호로프카와 코보차를 향해 급하게 이동했다. 



처칠전차의 러시아군이 파괴된 독일 정찰장갑차를 지나고 있습니다. 연합군의 렌드리스 물품 중 전차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영국전차는 정말 싫어했다고 합니다. 


바투틴은 현재 병력만으로 적을 붙잡아두고 새로 보강되는 2개 전차군단으로 적을 분쇄하기로 했다. 보로네즈 전선군의 항공기는 오보얀으로 다가오는 적에게 투입할 예정이었다.

31전차군단은 2 SS 전차군단의 우측으로 전진시키고 5전차군단은 좌측을 위협하는 동시에 6전차군단과 3기계화군단이 오보얀 도로로 올라오는 독일 48전차군단의 전진을 막기로 계획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