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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9부)

by uesgi2003 2013. 7. 5.


이번 주에 많은 영화를 봤습니다. 극장에서는 너무 많이 봐서 스토리를 외우는 주라기 공원 그리고 웹툰, 예고살인을, 그리고 국내개봉이 취소되어서 억지로(?) 보게 된 이블 데드가 기억에 남는군요. 


주라기 공원은 워낙 스토리가 좋아서 지금봐도 어색하지 않고 즐겁습니다. 아이들 영화로 알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때문에 곤란하지만요.

웹툰, 예고살인은 기승전병의 전개가 안타깝습니다. 도입은 120점, 본 이야기는 80점, 결말은 20점의 거꾸로된 느낌입니다. 욕심을 많이 줄이고 반전으로 얽어매는 대신에 에피소드 한 두 가지를 더 추가했다면 강추의 영화가 되었을텐데 아쉽습니다. 이시영씨의 미모는 대단하더군요. 그 얼굴로 권투를 한다는 것이... 말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블 데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입니다. 국내개봉을 취소할 수 밖에 없더군요. B급 정서를 기억하는 올드팬에게는 실망을, 공포를 즐기는 신세대에게는 거부감을 느끼게 할 영화입니다. 장면 장면은 뇌리에 깊게 박힐 정도의 핵펀치급인데 아쉽게도 연결고리가 너무 짧습니다. 강약 중강약 리듬이 있다면 관객도 쉴 틈도 있고 이후에 나오는 공포신의 강도가 클텐데 너무 난타전을 벌이니 질립니다. 웹툰도 그렇고 이블 데드도 그렇고 기대에 비해 아쉽다는 것이지 돈이나 시간 아까운 영화는 아닙니다.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오늘은 대학살극이 벌어지는 지상이 아니라 기사들의 맞대결이 벌어지는 하늘이야기입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9부)


성채(Citadel, 독일작전명)작전 초기에 투입된 루프트바페는 총 1,800대로 동부전선 전체의 70% 가량이었으며 상당수가 8항공군단으로 편성되어 남부집단군 지원에 투입되었다. 8항공군단은 제4 항공대, 제1 헝가리항공사단과 1 대공포군단으로 구성되어 1,100대의 전력을 갖췄다. 

스투카는 전통적인 전술 그대로 움직이는 항공포대 역할을 하며 전차의 앞길을 터주었다. 거의 수직에 가깝게 낙하하면서 울려퍼지는 사이렌소리는 지상의 적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성채작전은 스투카가 급강하 폭격기로 대규모 투입된 마지막 전투이자 근접지원기(탱크 버스터)로 전환된 최초의 전투였다. 37mm 대전차포를 양쪽 날개 아래에 달았고 한스 율리히 루델은 첫 날에만 12대의 전차를 사냥했다. 


 

루델은 흔히 말하는 사기급 보스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아래 전과로 대신합니다. 전차격파는 완전파괴는 아니고 주로 엔진룸 파괴로 나중에 수거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래도 중요 시점에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도 출격했기 때문에 전투기격추 전과도 많았습니다. 


518 대의 적탱크 격파 
700 대의 트럭 격파 
150 대의 대공포와 포대 격파 
100 개 이상의 다리, 철도, 벙커 파괴 
소련군 전함 "시월혁명호" 반파, 마라(Marat) 격침
70 여대의 상륙용 함정 격파 
적 전투기 11기 격추




기회가 된 김에 제가 좋아하는 스투카를 대거 옮겨와봅니다. 이 폭격기는 제압용 전략폭격기가 아니고 정확하게 적의 방어거점을 무력화시키는 전술폭격기입니다. 당연히 전투기를 상대로는 너무 무기력했고 대공포화망에 직접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손실이 있었습니다. 











포케불크 FW-190 A4와 헨셀 HS 129를 활용한 근접지원기를 대거 투입한 것도 성채작전이 처음이다. HS 129는 기수에 7.92mm 2자루와 20mm 한 자루를 장착했고 기수 아래의 곤돌라에 30mm 기관초를 장착했다. 러시아군 전차 뒤의 엔진룸, 경장갑 승용차, 목재 벙커에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무장이었고 FW 190은 HS 129와 함께 출격해서 SD 1 또는 2 집속탄을 투하해서 보병들을 궤멸시켰다. 


투하되는 모습때문에 나비폭탄이라고도 불린 SD2 탄입니다. 이런 것이 큰 폭탄 안에 여러 개가 들어있다가 집속탄 역할을 했습니다. 


근접지원기의 엄호는 메서슈미트 BF 109 G-6나 FW-190 A5에게 맡겨졌다.  


북부의 공군지원은 제6 항공단(제1 항공사단, 제12 대공포사단과 제10 대공포여단)이 맡았고 730대의 항공기가 투입되었다. 대공포 사단의 주력은 88mm 였지만 대전차포로 많이 전용되면서 비행장을 지킬 대공포가 심각하게 부족했다. 


성채작전을 지원하는 독일공군은 2년 전처럼 러시아 항공을 호령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헤르만 괴링이 제국 내에 폭탄이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하겠다고 맹세했지만 1943년 초부터 영-미 폭격기가 독일의 산업지대를 유린했다. 

괴링은 연합군의 폭격을 막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전투기를 호출하고 전투기생산을 서부전선으로 집중시켰다. 동부전선의 하늘은 그만큼 러시아군의 손으로 들어갔다. 전투기뿐만 아니라 연료도 서부전선에 집중되면서 성채작전에 필요했던 연료의 30% 정도밖에 지원받지 못했다. 

그리고 러시아군 항공기의 성능이 크게 개선되면서 이제 더 이상 훈련과 같이 쉬운 공중전이 아니었다. 


1941년 6월 22일 당시, 적공군(Red Air Force) 서부전선의 전력은 2,770대였다. 바르바로사 개전일 당일에만 1,811대가 파괴당했는데 1,489대는 활주로에서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상태로 당했다. 익명의 러시아 조종사가 대숙청에도 불구하고 1941년 6월에 감히 이런 조언을 했을 정도였다: 


... 국경 근처의 우리 캠프는 마치 검열을 위해 흰색 텐트를 일렬로 세워둔 것 처럼 공중에서 보기좋게 차려놓았다...


심지어 위장이나 도색도 안 한 공장출고 그대로였다. 위장무늬를 넣으라는 스탈린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너무 늦었다. 그리고 공군기지도 루프트바페와 달리 전선에서 너무 가깝게 전개되어 있어서 적의 포격에 노출되었다. 

공습과 포격을 피해 하늘에 날아오른 항공기도 문제가 심각했다. 훈련이 안된 젊은 조종사들은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폭격기처럼 대열을 지키며 공중전을 벌였고 손쉽게 격추되었다. 


소련(USSR, 소비에트 연맹의 약자입니다. 지금은 해체되어 사라진 용어로, 원래 적군을 소련군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지만, 2차대전 동부전선은 러시아가 주력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으로 표현했었습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에서는 개전초반과 후반은 소련군, 중반은 러시아군이라고 했는데 어느 쪽으로 통일해도 상관없습니다.)의 항공기 설계는 독일에 비해 많이 뒤처진 상태였고 개전당시에는 전차와 완전히 반대로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구형 전투기가 전부였다. 항공기의 성능이나 무장이 상대가 안되다 보니 소련 조종사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은 적의 항공기를 들이받는 것이었다.

공중전의 격추비율에 비해 자살공격 격추비율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소련군 지휘부도 반대하지 않았다. 독일 공군 사이에서는 소련 항공기가 이런 목적으로 특수장갑 프로펠러를 장착했다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다. 


1941년 12월부터 근위군이라는 명예호칭이 두드러진 전과를 보인 부대에게 내려졌고 근위군 병사의 오른쪽 가슴 주머니 위에는 "근위군"이라고 각인된 적백색 에나멜 배지가 달렸다. 


 

왼쪽부터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근위군배지입니다. 


근위군은 최신장비와 병력이 가장 먼저 보급되었고 적진을 돌파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소련 언론이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해도 조종사가 자살공격에 대해 보상을 받더라도 적공군이 훈련, 경험과 항공기 면에서 적의 상대가 안된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었다. 항공기 생산량을 아무리 늘려도 거의 2년 동안 하늘은 추축군의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지상군과 마찬가지로 공군도 피를 흘리며 귀중한 경험을 배워갔다. 


1943년, 적공군은 독일 주력전투기와 맞먹는 성능의 라보치킨 La-5FN을 배치시켰고 야코블레프 설계팀은 Yak-9 전투기를 쿠르스크에 대거 배치시켰다. 영국과 미국도 렌드리스 계획에 따라 많은 항공기를 보냈는데 벨 P-39 에어코브라(총 4,000대 공여)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알렉산더 포크리슈킨은 에어코브라를 몰고 59 킬을 기록했다. 

P-39를 작은 면도기라고 불렀고 기수의 37mm 기관포때문에 최고의 전폭기로 꼽았다. 기수의 기관포는 나중에 소련의 전투기 설계에 도입되었다. 

1943년 5월 당시의 적공군은 8,0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했다. 성채작전에 벌어지기 직전에 적공군은 IL-4와 미국의 B-25 미첼 폭격기를 동원해 독일군의 중요한 교통시설을 폭격했다. 5월 3일, 100대의 장거리 폭격기가 민스크의 요충지를 폭격했고 고멜, 브리안스크와 오르샤에도 공습을 했다. 미리 파르티잔이 철로를 파괴해서 군수품을 실은 기차가 정체해 있었기 때문에 폭격효과는 대단했다. 


독일군 병력과 장비가 최전선의 집결지에 모이자, 소련군의 폴리카르포프 P0-2(일명 재봉틀, 아래 그림)의 야간공습을 받았다. 그 중에는 전원이 여성인 제46 근위여성야간폭격연대도 있었다. 적공군에는 1945년까지 여성 연대는 3개가 존재했다.

독일공군 기지도 계속 공격을 받았다. 5월 6~8일동안, 112대의 주간폭격기, 156대의 슈투르모빅, 166대의 전투기가 17개 공군기지를 공습했다. 그리고 다음 2개월 동안 2개 항공군이 독일공군의 전진기지를 간헐적으로 공습했다.

 

 

독일의 성채작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2,500~3,000대의 항공기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방향을 잘못 잡는 오판을 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최고지휘부는 북쪽에서 가장 큰 위협이 닥칠 것으로 예상했고 여기에 주력을 배치했다. 북쪽의 독일공군 전력은 730대가 고작으로 적공군은 숫자에서 크게 앞섰다. 특히 전투기는 2배 이상의 전력을 보유했는데 주코프가 독일의 공세에 맞서 요격할 전투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스탈린그라드에서와 같이, 공군작전은 노비코프 원수가 스탈린의 대리역인 주코프의 지시를 받았다. 현장 지휘체계는 육군사령부와 함께 쿠르스크 돌출부에 차려졌고 육군과의 협의에 따라 공군을 호출했다.

보조와 응급 활주로가 많은 곳에 마련되었고 기존의 기지는 확장되었는데 그 중에 1/3은 독일공군을 속이기 위한 미끼였다. 전체적으로 적공군의 기지는 예전과 달리 독일군보다 더 후방에 있었는데, 독일공군이 최전선에서 18~20, 심지어 전투기 활주로는 5km밖에 안떨어졌던 반면에 적공군의 전투기 활주로는 25~49km, 근접지원기는 60~70km, 폭격기는 120~130km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다.

전체적인 방어전략에 따라 후방에 설치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독일공군의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때에도 18~30대의 전투기를 상공에 띄워서 기습에 대비했다.

 

독일공군의 전력약화덕분에 상당한 사전준비를 해둘 수 있었다. 그리고 정치장교가 끊임없이 조종사들에게 정신교육을 시켰다. 최근에 탈환한 친인척에게서 온 편지를 조종사들에게 읽어주면서 SS 부대가 저지른 만행을 자세하게 설명해서 증오심을 심어주었다. 많은 항공기의 몸통에는 복수, 빌어먹을 파시스트 등의 노골적인 단어가 칠해졌다.

 

7월 5일 작전개시의 새벽이 밝았고 벨고로드, 하르코프, 폴타바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의 활주로에는 JU 88과 HE 111 폭격기가 첫 번째 공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수많은 적공군 무선교신이 감청되었고 하르코프의 프레야 레이더에는 동쪽에서 다가오는 항공기들이 포착되었다.

132대의 슈투르모빅과 285대의 전투기가 엄호 전투기가 아직 뜨지 않은 틈을 노려 독일 폭격기를 노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프레야 레이더 덕분에 기습은 성공하지 못했다. 재빨리 요격에 나선 독일 전투기들은 치열한 공중전끝에 120대를 격추시켰다.

북부전선에서는 독일의 공세에 대한 적공군 전투기의 대응이 오후 늦게서야 시작되었다. 그리고 독일 전투기들은 밤까지 115대의 적공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출격준비 중인 독일공군 파일롯입니다.

 

이른 새벽에 시도했던 기습 그리고 오후의 반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큰 피해를 입은 적공군은 정작 남쪽 주력의 공세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중앙전선군을 엄호하는 6전투기군단과 보로네즈전선군을 엄호할 5전투기군단도 손발이 맞지 않았다.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곳곳이 뚫렸고 뒤늦게서야 조금씩 나타난 적공군 전투기는 계속 격추당했다.

결국 5와 6전투기군단의 사령관이 모두 교체되었다. 근접지원기도 독일전차의 전진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전투기의 엄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IL-2와 PE-2는 격추되거나 적의 전투기 모습만 보고도 달아났다. 공군지휘부는 근접지원기에게 연대단위로 작전에 나서서 숫자로 밀어붙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란히 날아다니게 되면 정밀한 타격은 곤란해도 전투기의 엄호를 받기 쉬운데다가 2~300m 높이에서 폭탄과 기관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다.

 

전투개시 2일차가 되면서 최소한 북부전선에서는 적공군의 혼란이 자리잡혀갔고 독일 전투기를 정신없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7월 7일부터는 제16 공군군이 제대로 투입되면서 독일공군의 손실이 늘어났고 8일부터는 슈투르모빅이 제 역할을 하고 독일공군이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을 120% 가동하던 독일공군은 손실을 바로 메울 수 없었고 결국 적공군이 독일군의 머리 위를 점령하게 된 것이었다.

 

 

쿠르스크 당시는 아니지만 31기 격추, 28기 협동격추를 기록한 미하일 바라노프입니다. 부상 악화로 1943년 1월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세계최고 수준의 독일공군을 상대로 그 전과는 대단한 것입니다.

 

남부전선의 상황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월등한 숫자를 보유한 적공군은 독일공군의 전력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7월 11일에는 프로호로프카로 전진하는 2 SS 전차군단의 진로를 지원하는 정도로 활동범위가 축소되었다. 로트미스트로프는 전쟁일지에 프로호로프카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동시에 전장의 하늘에서도 맹렬한 공중전이 벌어졌다. 소련과 독일 조종사들은 지상군을 지원하려고 애를 썼다. 폭격기, 근접지원기와 전투기는 마치 프로호로프카 하늘에서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한차례의 공중전이 끝나면 바로 다음 공중전이 이어졌다. 하늘 전체가 불타오르는 연기로 어두워졌다...

 

코네프는 프로호로프카를 독일기갑군의 마지막 영광이라고 묘사했는데, 성채작전은 독일공군의 종말이자 적공군의 시대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 전쟁발발 후 처름으로 적공군은 독일공군과 거의 대등한 전투를 벌였고 조국의 하늘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