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7부)

by uesgi2003 2013. 6. 29.


광화문을 다녀왔는데, 제가 있을 때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더니 떠난 후에는 많았다고 하는군요. 한 곳에 느긋하니 앉아있는 성격이 아니고 안사람 체력이 딸려서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국정원 정치개입은 개가 식탁 위에 올라온 꼴인데도 일부러 올려 놓고서는 애써 부인하는 새누리나, 식탁 위에 올라온 개를 보고도 개가 아닌 "종북 빨갱이 때려잡자"는 노인들이나 일베충들을 보면 이제는 동정도 안갑니다. 

그리고 개따위가 식탁 위로 올라앉아 "기다려! 기다리라니깐!"의 신분을 잊은 짓을 하는데 잡아야죠. 음지에서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고 만든 조직이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이어진 앞잡이 경비견 권력을 잊지 못하고 국민의 식탁 위에서 날뛰는데 잡아야죠. 


NLL 포기 발언도 없었고 새누리 놈들의 황당한 물흐리기인데도 국정원과 NLL을 혼동하는 분들. 개따위가 식탁 위에 올라 사람인 줄 알고 있다니깐요.


대학 졸업하기 직전에 안전보장기획부(중정부->안기부->국정원)의 대외수사직 지원안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대단한 권력집단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집안 경사(?)로 기뻐하셨고 저는 "그래서 저보고 전두환/노태우의 개가 되라고요?"했다가 얻어맞을 뻔 한 적이 있었죠. 


혹시 제 블로그에 들어오는 국정원 직원이 있다면 선배가 될 뻔했던 사람이 진심어린 조언을 합니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국민의 종이 되어야지, 권력의 개는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야기는 http://blog.daum.net/uesgi2003/343 에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북부전선으로 무대를 잠시 옮기게 되는데 원래 러시아군이 공격에 집중대비했던 곳이어서 모델의 공격이 처음부터 고전을 하게 됩니다. 


사상최대의 전차전 - 쿠르스크와 프로호로프카 (7부)


로코소프스키(Rokossovsky, 새로 개정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로코솝스키... 당분간 그대로 가겠습니다)는 일차 방어선을 되찾기 위해 반격을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6월 5일 저녁에 스탈린에게 보고를 했다. 


1976년에 발행된 로코소프스키 우표입니다. 


최고사령관 동지는 트로피멘코의 제27군을 예비군에서 빼내 보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어서 참모를 보내 군을 맞이하라고 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새 명령을 받았다. 오보얀 근방의 상황이 심각해져서 27군은 보로네즈 전선으로 보낼 것이며 우리 병력만으로 수비하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적이 남쪽에서 보로네즈 전선을 돌파할 경우에 쿠르스크까지 방어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스탈린은 "귀관의 좌익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적이 배후에서 공격을 할 수도 있소"라고 대답했다. 로코소프스키는 제16군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해서 몇 개 부대를 움직였지만 반격을 제대로 하려면 훨씬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제19 독립전차군단이 17군의 우익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했고 쿠르스크 북부의 예비전선Front Reserve에서 9군단이 제2 전차군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19전차군단은 도착하는대로 공격에 합류하고 3전차군단은 포니리Ponyri 역을 방어하기로 했다. 17근위와 18근위보병군단의 일부가 이차 방어선에서 나와 제2 전차군의 3과 16전차군단과 함께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정작 예정된 시간까지 17근위사단과 16전차군단만 준비되었다. 결국 반격에는 제2 전차군의 465대 중 절반도 안되는 숫자만 동원되었다. 

계획보다 한참 모자라기는 했어도 러시아 기갑군의 전력은 1,000대의 전차와 전투차량으로 늘어났다.


포니리 그리고 올호바트카와 사모두로프카 마을 사이의 산등성이를 따라 4일 동안 격전이 벌어질 모든 준비가 끝났다. 러시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산등성이는 쿠르스크 북부로 가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돌출부 중에서도 가장 방어선을 잘 갖춰놓은 곳이었고 올호바트카 마을 근처의 274 고지에서부터 반격이 시작될 참이었다. 


7월 6일, 4포병군단의 포가 새벽 3:50시에 불을 뿜었다. 독일의 관측을 혼란시키기 위해 실제 포진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동시에 다이너마이트를 떠트렸다. 30분 후에 러시아 폭격기가 집결 중인 독일전차와 보병을 폭격하려고 날아들었고 하늘에서는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졌다. 7월 5일에만 러시아군은 100대의 비행기와 독일군 106대의 비행기를 맞바꿨다. 


새벽 4:00시에 16전차군단이 100대의 T-34와 T-70 전차를 투입해 스테프와 부트르키 방면으로 진격했다. 러시아 107 전차여단이 선두에 섰지만 독일군의 포화에 전차와 보병이 단절되었고 2시간의 전투 끝에 107전차여단은 독일군을 밀어내고 포니리-스테프-사보로프카 라인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그 다음이 좋지 않았다. 모델은 제2 전차사단을 끌어올려 505 중전차대대와 함께 방어선을 펼쳤고 16대의 잘 엄폐된 타이거와 4호전차가 107전차여단의 50대 중 46대를 격파했다. 164전차여단은 23대의 전차를 잃고 보병 뒤로 달아났다. 로코소프스키의 강력한 반격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17근위보병군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7군단은 2km를 전진해서 포위되어 싸우고 있던 15와 18사단의 일부와 합류했다. 유리한 위치를 점한 병사들은 적의 전차에 포위되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찌는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지만 계속해서 격퇴했고 반격병력이 제시간에 도착했다. 이제 그들은 전진하는 부대와 합류해서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17근위보병군단은 기갑병력의 지원이 없어서 바로 수세에 몰렸고, 독일 47전차군단이 17군단의 뒤를 바짝 좇아 2차 방어선에 다가섰다. 


후퇴하는 병력의 뒤에 바짝 붙어 오던 적의 시도는 격퇴되었다. 적에게는 중전차가 많았기 때문에 전차를 고정위치에 엄폐하고 보병이나 경전차를 반격할 때 포화로 적의 전열이 무너졌을 경우에만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이거를 상대로 성급하게 맞섰던 우리 전차병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보병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포병의 정확한 포격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M-30 카츄샤 로켓발사차는 방어전에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기동성이 없고 장전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가 목표물을 제 때에 바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23근위박격포여단은 보통은 2~3시간 걸리던 것과 달리 45분 만에 독일군의 침투에 대응사격을 했다. 더구나 가벼운 M-13 카츄샤가 아닌 M-30을 사용했다. 


2차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 47전차군단의 병사들은 목을 축이며 전열을 정비했다. 잠시 후에 재개될 공세에서는 중전차대대 505의 타이거전차가 선봉이 되기로 했다. 머리 위에서는 양쪽의 지상지원기와 전투기가 어지럽게 날았고 뉴벨바페르와 카츄샤의 로켓탄이 독특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으르렁거리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는 전차 안에서 양쪽의 병사들은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명령이 내려졌다. "전차 앞으로!"

타이거는 양쪽에 경전차와 돌격포의 엄호를 받으며 온갖 화기의 포탄이 날아드는 러시아군 진지로 굴러갔다. 소보로프카의 방어선이 뚫렸고 모델은 제9 전차사단에게 돌파구를 넓히라고 명령했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클릭하면 커지니까 부대 위치와 지명을 잘 봐두시기 바랍니다. 북쪽의 상황입니다.)


러시아군의 거친 저항을 무릅쓰고 천천히 전진했지만 복잡한 방어망에 더 얽혀들 뿐이었다. 엄폐와 위장이 잘된 대전차포에 전차들이 불타올랐고 보병들도 기관총 진지 앞에서 쓰러져갔다. 후방의 참호에서는 박격포가 수 백 발의 포탄을 독일군 머리 위로 쏘아 올렸다. 땅에 엎드린 독일군에게 숨을 곳은 없었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에는 어김없이 대인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 

선봉이 지나간 자리에는 마치 마술처럼 숨어있던 러시아군이 전차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반격에 나섰다. 저격병은 장교나 지뢰를 제거하는 공병을 노렸고 독일군은 참호 하나 하나를 모두 뒤지느라 진격속도는 계속 늦어졌다. 


타이거가 전열을 정비하고 전진하면 러시아군도 전열을 정비하고 막아냈다. 불붙은 수 백대의 차량의 검은 연기로 푸른 여름하늘을 뒤덮었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린 양쪽은 전투를 중단하고 피해를 수습했다. 

일찌감치 주저앉은 전차는 회수차량이 투입되어 끌고 갔고 탄약보급이 계속 이어졌다. 부상자가 후방으로 옮겨지면서 전장의 소음은 신음과 고통의 소리로 바뀌었다. 양쪽 진지에서 너무 가까이 쓰러진 부상병은 부상의 고통과 갈증으로 죽어갔다. 


41전차군단이 다시 러시아 제13과 48군을 갈라 놓으려는 시도를 했다. 전차군단의 핵심전력은 제18 전차사단으로 3호와 4호 전차 100대가 고작이었다. 보병 제292와 86사단이 중자주포 지원을 받으며 포니리 마을 근처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다. 기차역 방어를 맡은 러시아군 부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저항했고 독일군은 제216과 78 보병사단 그리고 돌격포 파견부대를 보강했지만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6시 30분에 지뢰밭을 피해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러시아 19전차군단이 반격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 19전차군단의 전차 150대는 보브릭-사모두로프카 지역의 독일군 제20과 2 전차사단의 선봉대를 공격했지만 기다리고 있던 전차와 공중지원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뒤로 물러났다. 


양쪽의 피해는 심각했다. 47전차군단의 505 중전차대대는 거의 모든 전차가 수리가 불가능였고 다음 날의 전투를 위해 잠들었어야 할 독일군은 참호를 모두 수색하느라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공병은 어둠을 틈타 진격로에 있는 지뢰를 제거했고 러시아 공병은 예상되는 침공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벙커를 수리하고 대전차 방어물을 옮겼다. 

로코소프스키는 지상병력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어도 공중에서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어서 위안을 받았다. 공중전이 가열되면서 독일공군은 다른 지역의 전투기를 모두 끌어들여야 했고 소모전은 러시아군에게 점점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러시아의 붉은 항공대가 하늘을 지배할 시간이 되었다. 러시아는 7월 6일에만 90대 손실에 113대 격추전과를 올렸다. 


전선 반대편에 있던 모델은 예상했던대로 러시아군의 방어선이 강력해서 고민에 휩싸였다. 9군의 진격은 보잘 것 없었고 25,000명의 병력과 150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잃었다. 공중정찰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올코바트카와 포니리 방면으로 계속 이동 중이라고 했다. 러시아군의 전력보강이 너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의 전투는 이제 분명해졌다. 독일은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적의 방어선을 뚫어야했고 러시아군은 어이없는 반격을 지양하고 모든 전력을 방어에만 투입했다. 북쪽의 승패는 어느 쪽이 더 많은 전력으로 더 오래 버티는가 하는 소모전으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