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기타

라스트 사무라이 - 사쓰마 사무라이의 반란

by uesgi2003 2013. 11. 18.


국정원 정치개입과 NLL 포기 사건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시는 분 계신가요? 

국정원 정치개입은 황당하게 내부에서 알아서 넘기고 있고, NLL 포기 사건은 더 황당하게 기록물 고의삭제로 변질되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습니다. 

고 노무현대통령이 NLL을 포기해서 우리의 영토를 북한에 넘겼다고 온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어서 국정원 정치개입을 물타기하더니만 이제와서는 김정일이 그런 요구를 했다고 하면서 '그럼 됐고!'라면서 자문자답과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군요. 이기기만 하면 비정상도 좋고 부패도 좋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이기는 것은 새누리당과 기득권 세력이지 여러분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새누리당이 이겨서, 빨갱이 사냥 10년해서, 부패한 인물과 기업이 부활해서 여러분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앞으로 새누리당이 이겨서, 10년 더 빨갱이 사냥하면 여러분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겠습니까? 


이번 이야기는 일본의 근대사 중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그 동안 일본 근대사를 요청한 분들이 계셨는데 이제야 하나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와 배경이 모두 일본과 일본 영토이기 때문에 간혹 불편한 인물과 일본식 용어를 그대로 사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임의대로 수정하면 그 의미가 많이 퇴색하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옮겨왔다고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라스트 사무라이 - 사쓰마 사무라이의 반란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와 사쓰마 사무라이가 서구식 일본정부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졌다. 


1877년 9월 25일, 가고시마(鹿児島) 외곽의 진흙밭에서 700년 동안 계속되었던 봉건체계가 막을 내렸다. 운명에 순응하며 조용히 사라지지 않고 분노의 포효와 함께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일본역사의 마지막 사무라이 40명은 오전 6시에 참호 밖으로 나와 칼을 뽑아들고, 30,000명의 황실군의 총 앞으로 뛰어들었다. 


23년 전의 일본은 쇼군(장군, 막부)이 전권을 휘둘렀고 천황(일왕)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쇼군 밑에는 다이묘(대명)가 한(번)이라고 하는 지역과 가문을 책임졌다. 사회신분은 피라미드 형태로 고정되었고 농부가 가장 밑이었다. 정치와 사회신분을 유지하는 수단이 바로 사무라이(무사)였다. 

전통적인 봉건체계는 미해군 매튜 페리가 가고시마항에 들어와 무력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한 1854년부터 급격하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강요된 개항에 충격을 받은 일본 지식인들은 개혁에 나섰고, 봉건체제의 구식군대는 당시 최고의 장교인 프랑스와 독일인 장교의 훈련을 받아 현대식 군대로 개혁했다. 1872년, 각 사회계층에서 징집한 46,000명 규모의 황실군이 조직되었고 봉건체제의 중심이었던 2백 만 명의 사무라이는 특권을 잃었다.



매튜 페리 제독의 일본개국 100주년 기념우표입니다. 물론 미국발행입니다. 


일본은 1860년대 동안 보수주의 다이묘와 사무라이가 정부와 외국인을 공격하며 개방에 저항하는 혼돈의 시기를 보냈다. 그렇지만 1868년에 메이지유신이 시작되어 막부정치가 끝나고 천황 무쓰히토가 정권을 잡았다. 수도를 현재의 도쿄로 정하고 헌법도 제정했다. 군의 현대화와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로 성장할 기틀을 잡았다. 

1871년 8월, 다이묘는 보상금을 받고 영지를 반납했고 번은 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공공장소에서의 검착용은 허용되다가 1876년부터 아예 금지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를 잃어 불만세력이 되었던 사무라이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게 되었다. 천황(존왕양이)을 위해 싸웠던 사무라이도 1868년부터는 옛 시절을 그리워했고 그 중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원수도 있었다. 


그는 사쓰마에서 1827년에 태어나 지지자들사이에서는 '위대한 사이고'라고 불렸고 1867년 메이지 유신(이하 유신)을 지지하며 천황을 위해 싸웠다(보신전쟁). 



서양에 굴복한 막부를 반대하고 천황체제를 주장한 존왕양이의 중심지는 사쓰마와 조슈번이었고 보신(무진)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에서 패한 도쿠가와 막부는 정권을 천황파 신정부에게 넘기고 봉건체제는 그 끝을 보입니다.  



보신전쟁 당시의 사쓰마 사무라이입니다. 사진의 모습과 달리, 일본내에서 가장 현대식 무기를 무장했었고 막부군의 공격을 막아내어 막부의 몰락을 이끌어냈습니다. 영화나 만화와 달리, 당시 사무라이는 전국시대에 비해 잘먹던 시절이었음에도 체격이 상당히 왜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사이고의 초상은 아니고 친인척을 모델로 찍은 사진입니다. 


그는 1873년에 조선으로 건너가 일부러 조선왕실을 모욕해서 자신이 죽으면 그것을 빌미로 전쟁을 벌이라고 했을 정도로 천황에게 충성했다. 사이고가 배에 올라 음모를 진행하기 직전에, 일본정부가 그를 불러들였다. 

(사이고의 정한론은 대외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발원이었으며, 대내적으로는 몰락하는 사무라이 계층의 부활이 목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이고와 보수파는 정한론이 무산된 후에도 계속 전쟁과 사무라이 중심의 군대를 획책했지만, 유신정부에서는 개혁과 비둘기파가 힘을 얻었다. 매파는 공직을 대거 사임했고 사이고도 가고시마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1874년, 가까운 친구였던 에토 심페이가 2,000명의 사쓰마 사무라이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며 그에게 합류를 권했지만 거절했을 정도로 은둔했다. 반란은 바로 진압되었고 에토는 사형되었다.  


사이고와 함께, 많은 황실 근위군이 사임했고 그를 따라 규슈로 갔다. 사이고는 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사쓰마번 곳곳에 132개의 사립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수업은 중국고전, 프랑스어와 영어 등이 있었지만 무술, 병법과 무사도가 필수과목이었다. 사이고는 포병학교도 열었다.    


사쓰마번의 사립학교의 성격은 도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유신정부는 이미 크고 작은 사무라이의 반란을 겪은데다가, 사이고가 일본 최고로 명성높은 사쓰마 사무라이를 직접 이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위협이었다

(1600년에 도쿠가와 막부의 길을 열어주었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무사들은 패전이 결정되는 순간에 거꾸로 도쿠가와의 본진을 지나가는 역공으로 공포를 안겨준 일화가 있습니다. 사쓰마 무사의 용맹성은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공과처리에서도 확전을 염려한 나머지 사쓰마와 조슈는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입니다.)

 

막부시절의 사쓰마는 무기수입과 제조에 가장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무기를 쟁여두고 있었다. 1877년 1월 30일, 정부의 배가 사전 통보없이 도착해서 무기와 탄약을 싣기 시작했다. 반란을 사전에 방지하려고 무기를 오사카로 운반하려던 것인데 거꾸로 반란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정부의 획책에 분노한 50명의 학생이 소무타 병기창을 습격해서 무기를 반출하려고 했다. 그 후 3일 동안 1,000명 이상의 학생이 해군시설과 이소 병기창을 공격해서 84,000발의 탄약을 가져갔다. 


유신정부의 관리는 번정부에 공식적인 항의를 했지만 경찰은 한 명의 범죄자도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정작 병기창을 턴 학생들은 노획물을 가지고 거리를 행진하며 기세를 높였는데도 말이다. 관리는 크게 화를 내며 배를 철수시켰고, 학생들은 아예 병기공장을 접수하고 인부를 고용해서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사건당시에 사냥을 나갔던 사이고는 그 소식을 듣고는 급하게 달려와 학생 지도자를 문책하려고 했다가 분위기에 못이기고 학생의 반란을 칭찬했다. 


2월 3~7일 동안 사쓰마 번정부는 58명의 유신정부 요원을 체포했다. 유신정부는 사쓰마 출신의 도쿄경찰에게 사쓰마 상황을 정찰하게 시켰던 것이다. 사쓰마는 외부인이 따라할 수 없는 사투리를 썼기 때문에 사쓰마 출신을 고용할 수 밖에 없었다. 체포소식이 퍼지면서, 유신정부가 사이고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반란을 조장해서 전쟁구실을 삼으려 했다는 소문도 퍼졌다. 학생들은 전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이고는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쿄로 가서 유신정부와 협상하기로 했다. 그는 구 황실군의 원수라는 직위를 방패막이 삼고 호위대를 거부했지만 사무라이 일부가 몰래 도쿄로 떠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커져갔다. 반란군은 사이고의 충성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지휘를 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사이고는 여전히 전쟁을 피하려고 했다. 많은 지원병을 뒤에 남겨두고 12,000명의 학생만 데리고 나섰다. 그리고 다른 번의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가고시마를 무방비로 남겨두었다. 군자금 금고에서는 일행이 한 달 동안 사용할 25,000엔만 인출했다. 그리고 신정부 시절의 군복을 입어서 합법적인 신분을 주장했다. 



사쓰마 반란군이 공격한 구마모토성의 위치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사이고가 가고시마를 출발할 때에는 이미 전쟁을 각오하고 상당한 병력을 동원했는데, 지금의 자료는 사이고가 출발할 때까지도 미온적인 태도였다는 주장입니다. 역사에는 여러 주장과 시각이 있기 때문에 사이고가 불가피하게 전쟁에 휘말리는 시각을 그대로 가져가겠습니다.)


2월 17일, 주군가문에게 인사를 한 사이고는 후위와 함께 가고시마를 떠났다. 본대는 하루 전에 출발했었다. 북쪽으로 향하던 길은 50년만의 폭설로 많이 지연되었다.

구마모토성의 지휘관 타니 다케다장군은 2일 전에 사이고 이름의 편지를 받았다. 간단한 문구로 자신이 통과할테니 수비대는 나와서 자신을 마중하고 명령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편지의 발신인이 정말 사이고인지도 의심스러웠고 일부러 충돌을 유발시키는 내용이었다. 사이고의 소규모 병력만으로는 전투를 벌일 수 없었고, 그가 정말로 전투를 벌일 생각이었다면 미리 타니에게 자신의 행방을 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이고에게서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자신이 통과할 예정이니 시민들이 놀라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첫 번째 편지는 아마도 충돌을 유발하려는 극단주의 학생이 보낸 것이 분명했다. 



가고시마 폭도 진출도입니다. 중앙이 사이고입니다.  


사이고의 의사와 상관없이, 타니는 그들을 통과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유신정부에서도 이미 토벌군을 파견한 상태였다. 2월 21일, 그는 3,800명의 병사와 600명의 경찰을 동원했다. 경찰은 사무라이 계층에서 모집한 반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일반병사와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일본경찰은 여전히 칼과 무술을 선호하고 화기를 혐오했다. 

구마모토의 수비대 대부분은 규슈출신이었고 장교도 대부분 가고시마 출신이었기 때문에 전투 시에 반란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타니는 방어에 주력하기로 했다. 성 주변의 집 수 백채를 허물어 사이고 병력의 엄폐물을 없애고 많은 식량을 저장한 후에, 성안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2월 21일, 작은 충돌이 계속 빚어졌고 유신정부 병력은 모두 구마모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구마모토성은 1598년에 지어진 오래된 성이었지만 일본 역사상 가장 튼튼한 성이기도 했다. 사쓰마 반란군은 구마모토성 안에 틀어박힌 농부출신의 징집병을 얕잡아보고 어설픈 야습을 펼쳤다. 집중사격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반란군은 계속 성벽에 달라붙었다. 2일간의 무의미한 돌격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약 3,000명이 성벽 주변에 참호를 파고 수비대를 아사시키려고 했지만, 성 북쪽에서 유신정부의 구원군이 나타났다. 몇 차례의 격전을 벌이고 26일에는 양쪽 모두 뒤로 물러났다. 



요코하마항에서 승선대기 중인 유신정부의 토벌군입니다. 


3월 3일에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을 때에는 양쪽이 모두 증원을 받아서 10,000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했다. 아리스가와 다루히토 왕자가 유신정부군의 지휘관으로 참전했지만 실제 지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장군이 맡았다. 야마가타(山縣有朋)는 조슈 사무라이 출신으로 유럽에서 군사학을 유학하고 1870년에 전쟁상을 지냈던 인물로 사이고와는 오랜 친구사이였다. 그는 독재정부와 대만, 한국, 만주로의 일본제국주의 확장에 뜻을 같이 했었지만 프러시아와 같은 군 현대화에서 사이고와 다른 진영에 섰다. 3월 4일에 사쓰마 진영으로 총공격을 명령해서 8일간의 타바루언덕 전투를 벌인 것도 야마가타였다.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렸을 정도로 일본 제국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우리와도 좋을 수가 없는 인물입니다. 

3대와 9대 총리를 지냈고, 안중근의사가 처형한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후임총리 10대를 지냈습니다. 


양쪽이 모두 방어벽을 만들었고 서로 팽팽한 대치를 했다. 의외로 총격전은 거의 없었는데 탄약부족이었거나 사무라이 기질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란군과 비슷한 전력의 토벌군도 칼과 총검을 선호했다. 토벌군이 반란군을 밀어냈을 때에는 이미 양쪽이 4,000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사이고는 아리스가와 왕자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도쿄로 가야 할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편지를 보면 아직도 협상을 통한 사태해결에 의지를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유신정부는 협상을 거부했고 병기공장에서는 하루에 500,000발의 총탄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유신정부는 반란을 무력진압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유신정부는 사이고의 배후를 끊기 위해 3척의 전함에 500명의 경찰과 보병 몇 개

중대를 싣고 3월 8일에 가고시마항에 입항했다. 상륙한 병력은 병기창을 접수하고 번 관리를 감금했다. 

배후를 끊긴 반란군은 사쓰마 사령관 명의로 발행된 어음(사진 참조)으로 지역 농부에게서 식량을 사들였다. 어음은 반란군이 밀려나고 사용을 금지시킨 후에도 오랜 동안 유통되었을 정도로 민심은 반란군 편이었다. 이키베 기치주로는 사이고를 본따 설립한 학교의 학생 2,000명을 데리고 반란군에 합류했다. 


타바루언덕의 대치가 길어지자, 야마가타는 별동대를 반란군 배후로 돌려서 협공을 하기로 했다. 2개 보병여단과 1,200명 경찰의 별동대는 3월 17일에 나가사키항에서 승선해 야츠시로만으로 갔다. 

반란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큰 피해없이 상륙에 성공했고 미야노하라로 북진해서 4,000명까지 병력을 늘린 후에 반란군의 배후를 공격해 밀어붙였다. 


타바루언덕 전투 장면입니다. 당연히 오른쪽이 사쓰마 반란군입니다.  



이런 전황도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크게 중요한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토벌군과 반란군의 전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쓰마 반란(세이난 전투)이 전체적으로 이랬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동안 구마모토성의 식량은 바닥이 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탄약부족이 심각했는데 반란군이 쏜 포탄 중 온전한 것을 주워서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반면에 더 이상 반란군의 육탄전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전투는 저격 또는 사무라이의 명예를 건 칼싸움이 전부였다.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타니 장군은 밖으로 나가 불과 몇 km 밖에 있는 구원군과 연결을 시도하기로 했다. 4월 8일 밤, 오쿠 사스카타 소령의 보병 8개 중대가 사쓰마 포위망으로 뛰어들었다. 초병과 반격하는 소규모 병력을 몰아내면서 포위망에 큰 돌파구를 마련해서 구마모토성의 병력의 퇴각로를 마련했다. 

토벌군도 사쓰마 포위망에 접근하고 있었다. 4월 14일에 총공격이 준비되었지만, 구마모토 동쪽의 고지로 물러났다. 토벌군이 구마모토성에 입성하면서 54일간의 공성전이 끝났다.


양쪽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유신정부는 징집병으로 피해를 보충하고도 남았다. 이제 20,000명으로 불어난 반면에 반란군의 규모는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많은 사무라이가 그 자리에서 결전을 치루자고 주장했지만 사이고는 반대했다. 병력을 9개 부대로 편성한 그는 동쪽으로 퇴각했다. 

거친 길을 7일간 행군한 반란군은 히토요시에 들어섰다. 사기가 땅에 떨어져서 탈영하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할복시키겠다고 위협을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수세에 몰려서 참호를 파고 토벌군을 기다리는 형세가 되었다. 



프랑스 르 몽드가 그린 사이고와 사무라이 지휘관입니다. 일본인이 그린 그림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쓰마가 현대식 소총과 대포로 무장했지만 지휘관은 전통적인 무장을 고집했을 겁니다. 


토벌군도 증원을 받았어도 워낙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정비하는데만 몇 주가 걸렸다. 그동안 사이고의 지휘관 한 명이 가고시마로 잠입해서, 토벌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1,500명의 사무라이를 모았다. 허를 찔린 토벌군은 5월 4일에 보병여단을 추가파견해서 경비를 늘렸다. 


정비를 마친 토벌군은 공세에 나서 반란군을 미야자키로 밀어냈다. 규수 고지대에 흩어진 반란군을 소탕하는데 다시 몇 주의 시간이 걸렸다. 7월 24일, 토벌군은 미야코노조의 사이고 본대를 공격했다. 밀려나던 반란군은 미야코노조 북쪽의 해안도시 노베오카에서 멈췄다.

오이타와 사이키에 병력을 상륙시켜서 반란군을 포위했지만 아직도 반란군의 전력은 상당했다. 반란군은 포위망을 한쪽에 전력을 집중시켜 다시 퇴각로를 열었다. 노베오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떠다니는 시체를 밀어나 부교를 보호해야 했다.

미쓰비시에서 일하던 미국인 함장 존 허버드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체 대부분은 반란군의 것이라고 말했다. 


8월 17일, 끊임없는 전투와 퇴각에 시달린 반란군의 전력은 3,000명으로 줄어들었고 현대식 화기는 거의 남지 않았다. 토벌군은 구식 화승총 그리고 나무 대포를 노획했다. 반란군은 에노다케산으로 들어갔지만 바로 포위되었다. 야마가타는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며 포위망을 한층 두텁게 보강했다. 

7대1의 적을 앞에 두고 뒤에는 절벽에 가로 막힌 반란군은 항복아니면 할복자살을 선택했다. 사이고는 에노다케산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포위망을 다시 돌파해서 가고시마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전사하기로 했다. 


8월 19일 저녁, 사이고는 개인물품과 유진정부 군복을 불태웠다. 부상병은 그대로 뒤에 두고, 나머지는 에노다케산의 안개낀 정상을 기어올랐다. 음낭에 병이 있던 사이고는 들것에 실려 안개속으로 사라졌다. 

사이고의 탈출로를 모르는 야마가타는 사방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추적군 중 일부가 8일 동안 추적한 끝에 사이고 병력을 따라잡는데 성공했다.  사이고 일행은 하루 종일 대치하다가 밤에 병력을 둘로 나눠 다시 한 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9월 1일, 50명의 반란군이 폭우를 틈타 경비병을 따돌리고 가고시마에 입성했고 사립학교에서 대포 몇 문을 가져다가 시로야마(야마는 산)에 진영을 차렸다.



시로야마(산) 전투 모습입니다. 여전히 전투의 초점은 사무라이들의 백병전입니다. 실제로는 세이난 전투 기간 동안 하루에 30만 발 이상의 탄약이 사용되었을 정도로 총격전이 심했다고 하는데, 그림에서는 무사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토벌군이 얼마 안 있어서 도착해 다시 한 번 반란군을 포위했다. 야마가타는 반란군보다 60배나 많은 30,000명을 동원했다. 일본전사에도 중과부적을 기적처럼 뒤집은 예가 많았기 때문에 야마가타는 어떤 반전의 기회도 주지 않기로 했다. 

토벌군은 며칠 동안 정교한 포위공사(사진참조)를 했고 대형포 외에도 5척의 전함이 맹렬한 포격으로 반란군의 방어진을 두들겼다. 모두 7,000발의 포탄을 쏟아부었고 만약을 대비해 7,000명의 예비군을 더 보강했다. 

반란군은 시민이 반입하는 철을 녹여 총탄을 만들었다. 목수가 의사대신에 부상병의 팔다리를 자르고 붕대를 감았다. 사이고는 마지막 순간까지 좁은 개인참호에서 포탄을 피했다. 


야마가타는 병력을 둘로 나누어 시로야마를 협공하기로 하고 절대로 다른 한쪽을 돕지 못하게 했다. 만약 어느 한쪽이 반란군에게 밀려나고 반란군이 추격한다면 피아를 구분하지 말고 무차별사격으로 섬멸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사이고의 부관 두 명이 백기를 들고 사이고의 구명을 간청해왔지만 탈영병 취급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그들은 야마가타의 친서를 들고 사이고에게 돌아갔는데 그 안에는 불필요한 학살을 피하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친구의 권고가 있었다. 


사이고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이난 전투에서 토벌군은 6,000명이 죽고 10,0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반란군은 7,000명이 죽고 11,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피를 충분히 흘렸다고 해도 항복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명예였다. 사이고는 부하들과 마지막 술잔을 기울였다. 


9월 24일 밤새 맹렬한 포격이 시작되었고 새벽 3시에 토벌군이 산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전 6시, 겨우 40명의 반란군만이 살아 남았다. 사이고는 넓적다리와 위에 부상을 입은 상태로 출혈이 심했다. 벳푸 신스케의 어깨를 빌려 아래로 내려가던 사이고는 자신의 목을 베어달라고 부탁했다. 벳푸와 나머지 사무라이는 칼을 뽑아들고 토벌군을 향해 뛰어 내려갔고 모두 쓰러졌다. 



아직 전국시대의 사무라이 관습이 남았던지 목을 검수하는 장면입니다. 


오전 7시가 되자, 사쓰마 반란은 끝이 났다. 유신정부 최대의 위협이 사라졌고 1,500년 동안 일본을 괴롭혀온 내전도 모두 끝이 났다. 공교롭게도 사무라이의 명예와 신분을 되찾으려던 반란은 사무라이의 최후를 보다 확실하게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사무라이는 자신들이 하찮게 생각하던 신분계층의 병사들에게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현대식 일본군은 첫 번째 시험무대를 무사히 통과한 다음, 아시아를 침략할 제국군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일본인, 심지어 유신정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유신정부는 사이고를 반란지도자라는 불명예를 없애주었고 아들에게 후작작위를 내렸다. 사이고는 현재 도쿄 우에노 공원의 동상으로 남아 역사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마지막 사무라이로. 


우에노 공원에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입니다. 


우에노 공원은 여러 번 가보았지만 눈여겨 보지 않아서 그런지 위치는 기억이 안납니다. 우에노 공원이 워낙 넓기도 하고요. 


우리에게는 절대로 반가운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꼭 찾아가 볼 사람은 아닙니다. 




















세미나때마다 일본은 그래도 역사를 문화상품화하고 계속 채색을 입혀간다고 설명했었는데 이런 지역행사가 꽤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다양하게 시도는 하고 있지만 아직은 다양성과 깊이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요즘 드라마 사극이 SF 수준을 넘어서 왜곡까지 하는 것을 보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헐리웃 영화 Last Samurai의 전투장면입니다. 이번 이야기와 상당부분이 연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