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이 600만 관객을 돌파했고 한국영화의 기록을 갱신 중입니다. 처음에는 그 분을 그리워하는 관객 외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했었는데 기세를 보니 심지어 그 분을 싫어했고 지금도 싫어하는 분들까지 상영관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영화개봉의 가장 큰 대목인 연말연시의 상영작들이 모두 지지부진해서 상영관을 오히려 늘려가고 있습니다.
SF장르로 큰 기대를 했던 엔더스 게임은 용두사미의 영화이더군요. 긴장감도 없고 엔딩조차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아주 평범한 SF영화입니다. 굳이 많은 돈을 내고 상영관은 찾지 않아도 될 영화입니다.
용의자도 개봉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 액션물로 기대를 모았지만, 본 시리즈와 너무 비슷하고 총탄세례를 뚫고 달리는 모습에 할 말을 잊습니다.
의외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어바웃 타임이 조용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러브 액추얼리를 내세워서 데이트 영화인 것처럼 포장했고 낚시질에 걸린 연인들의 불평이 대단합니다만, 영화는 좋은 메시지를 담고 있고 가족영화로 강추입니다. 영국영화답지 않게 유머도 꽤 재미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프리드리히대제가 유럽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낸 7년 전쟁이야기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에 정리하기로 하고 슐레지엔전쟁과 같이 참조자료로 간단한 설명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7년 전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경영 갈등에서 본격적으로 발발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전통적인 동맹관계가 완전히 뒤바뀌면서 복잡한 형태가 되는데,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느라 오스트리아와 맺었던 동맹을 깨고 신흥강국 프러시아를 지지했고, 프랑스는 놀랍게도 전통적인 적대국 오스트리아에 가담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의 지도와 같이 전세계 곳곳에서 7년 전쟁이 벌어졌고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작센, 스페인, 스웨덴(녹색) 동맹과 프러시아, 영국, 포르투칼, 헤센, 하노버 동맹(청색)이 맞섰습니다. 당연히 양쪽 동맹의 사이에 있었던 프러시아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1756년 10월 1일, 보헤미아 북쪽에서 벌어진 로보지츠Lobositz전투에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흉갑기병이 교전을 하고 있습니다. 프러시아군 31,800명(보병 21,000명/기병 10,800명/중포 97문)이 오스트리아군 34,000명(보병 26,500명/기병 7,500명/중포 74문)을 상대했습니다. 이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영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작센을 선제공격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작센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고 양쪽 모두 2~3,000명의 가벼운 인명피해만 내고 물러났습니다. 작센은 이 전투 후에 항복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척탄병입니다.
1757년 5월 6일, 보헤미아의 수도부근에서 벌어진 프라하Prague전투입니다.
프러시아군(65,000명-보병 47,000명, 기병 17,000명, 중포 214문)이 오스트리아군(62,000명-보병 48,500명, 기병 12,600명, 중포 177문)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14,300명의 피해를 입었고 프라하를 포격하던 중에 다시 오스트리아 구원군과 콜린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쿠르트 폰 슈베린Schwerin 원수가 동요하는 보병을 이끌다가 쓰러지는 장면입니다.
슈베린원수의 전사장면입니다. 프러시아군 깃발을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군도 브라운원수가 치명상을 입으면서 지휘체계가 무너졌고 결정적인 패인이 됩니다.
헨리 공이 프러시아 보병연대의 도강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그는 익사할 뻔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가 참패를 당했던 콜린전투를 끝으로 1부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1757년 6월 18일, 보헤미아에서 벌어진 콜린전투입니다.
32,000명의 프러시아군(보병 18,000명/기병 14,000명/중포 88문)이 44,000명의 오스트리아군(보병 28,960명/기병 14,000명/중포 145문)을 상대했습니다. 프러시아군은 절반에 가까운 14,000명을 잃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라하 수비군까지 합류시켜서 100,000명의 대군을 편성했고 위기에 몰린 프러시아군은 보헤미아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프러시아 근위보병대의 모습입니다. 칼 뢰흘링Carl Rochling의 그림입니다. 매우 인상적인 독일역사의 한 장면을 많이 남겼습니다.
작가를 알 수 없는 그 당시의 콜린전투화입니다.
프러시아의 근위보병대 모습인데 수세에 몰린 모습입니다. 프러시아군은 늘 공격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모습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프러시아군 기병여단이 오스트리아 보병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단장인 폰 크로시크Krosigk 장군은 전사했습니다.
오스트리아 보병연대의 모습입니다.
콜린전투 후에 충격에 빠진 프리드리히 대제가 정신을 잃고 진흙을 뒤적이는 모습입니다. 흉갑기병 한 명이 물을 떠다주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프라하 포위를 풀고 보헤미아 북부로 퇴각했습니다. 기세를 올린 오스트리아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엘베 동쪽의 아우구스트 빌리아(프리드리히의 형제) 군대를 작센으로 밀어냈습니다. 1757년에, 프리드리히 대제는 50,000명의 병력으로 100,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헨리공의 만류덕분에 대재앙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콜린전투의 참패소식은 적대국에게 퍼져, 스웨덴이 포메라니아를 위협했고 러시아군은 오데르강 건너편에 나타났습니다. 프러시아군의 동맹인 하노버와 개신교 독일군은 1757년 7월 26일, 하스텐베크Hastenbeck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했고, 다른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프러시아 국경을 위협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슐레지엔에 40,000명의 병력을 남겨서 오스트리아군을 막도록 하고 자신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을 로스바흐Rossbach에서 상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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