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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7년전쟁

프리드리히, 프러시아 그리고 1/2차 슐레지엔 참조자료

by uesgi2003 2013. 12. 30.


언어의 장벽때문에 국내에 극히 일부 그리고 심지어 왜곡된 자료만 출간되고 공유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제 서재를 열었고 여러분과 블로그를 통해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지식전달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해도 제 이야기는 일관된 주제가 있습니다.


1. 리더십 학습

재미와 흥미때문에 역사/전사를 배우기도 하지만, 역사의 반복성을 이해하는 분은 과거의 성패의 교훈과 패턴을 배워서 자기계발을 합니다. 특히 과거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가장 값싸게 롤모델을 정하고 배울 수 있는 자기계발서입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성공한 위인보다 실패하고 실수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시야가 좁은 분은 '그럼 당신이 그 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것 같아?'라고 생각할테고, 멀리보고 배우려는 분은 '성공배경보다는 실패분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라고 귀중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성공한 리더십에 대해서는 기존에도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한 리더십도 소개하는 제 블로그가 더 귀중할 겁니다. 


2. 인성계발

요즘 인문학의 위기라고 합니다. 전세계 공통적인 추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부터 풍부한 인문학 지식이 보물창고처럼 곳곳에 쌓여 있고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주요국가와 달리 우리나라는 고유의 인문학이 발아도 하기 전에 냉혹한 경쟁이라는 콘크리트로 덮이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에서는 역사를 통한 시민혁명과 권리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건을 통한 사람사는 이야기도 알리고 있습니다. 제가 철학자도 아니고 종교지도자도 아니고 성공한 사회지도자도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함께 배우고 노력해보자' 정도에 불과합니다. 


1번 항목과 마찬가지로 '당신이나 잘해'라고 한다면 자신의 배움 그리고 인성계발은 멈추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외국의 재벌이 수 천억을 사회에 기부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매우 다양한 반응이 나올 겁니다. 천인천색이고 획일적인 반응은 오히려 경계를 해야겠죠. 그렇지만 '나한테 그런 돈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당연한 생각 정도가 아니라 '세금을 피하느라... 얼마나 악랄하게 돈을 벌었는데... 외국이니까 그렇지'라는 편협한 생각을 한다면 중요한 배움과 실천의 기회는 무의미하게 흘러갈 것입니다. '나도 돈을 벌면 사회를 도와주어야지'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그래, 나도 지금부터 한 달에 만원이라도 사회에 환원하자'라고 실천한다면 자신의 인성계발은 물론이고 사회의 인성계발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열고 유연한 자세로 제가 던지는 화두를 함께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한다면, 더 안타깝고 더 슬프고 더 분노할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애써 부인하며 사고와 행동의 범위를 자신의 앞과 옆으로만 국한시킬 것인지 아니면 최소한 주변으로 좀 더 넓힐 것인지는 우리의 판단이고 자유의지입니다. 그리고 제가 유치한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그 결론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언제 정리하게 될 지를 몰라서 1/2차 슐레지엔전쟁 그리고 7년 전쟁의 인상적인 그림을 모아봤습니다. 



1741년 4월 10일,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의 몰비츠Mollwitz 전투 장면입니다. 당시에는 연대 지휘관과 장교가 선두에서 이끌었기 때문에 우리의 오해와 달리 사상률이 꽤 높았습니다. 물론 적진까지 그대로 돌파하지는 않고 근접거리에 들어가면 대열 뒤로 빠지게 됩니다. 

대열의 발밑을 보면 포탄이 터지기 직전이군요. ㅡ.ㅡ 



몰비츠 전장의 지도입니다. 프러시아군 21.600명(보병 16,800/기병 4,000)이 오스트리아군 19,000명(보병 10,000명/기병 8,000명)을 공격했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슐레지엔의 인구는 150만 명으로 당시의 프러시아 국민 220만 명에게 반드시 합병해야 할 지역이었습니다. 슐레지엔을 두고 22년 동안 오스트리아와 다른 독일 군주국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Breslau로 들어서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몰비츠 당시의 프러시아 보병입니다. 


프러시아의 용기병입니다. 용기병Dragoon은 기병이라기 보다는 말을 탄 보병에 가깝습니다. 

보병이 적진을 위협하면, 용기병이 그 지역으로 급히 달려가 말에 내린 후에 보병부대와 합류해 적진을 무너트리는 기동타격대 역할을 했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기병처럼 그대로 보병의 대열에 돌격했습니다. 중기병대에게는 상당히 취약한 병과였습니다. 















1742년 5월 17일, 보헤미아 북부 코투지치Chotusitz 전투의 지도입니다. 프러시아군 27,000명(대포 85문)이 오스트리아군 30,000명(대포 50문)을 상대했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프로이센군은 4명 중 1명이 전사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완전히 궤멸되었을 정도로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오스트리아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브라슬라우 조약을 맺고 슐레지엔 대부분을 병합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프랑스는 프러시아의 동맹국이었습니다. 


프러시아 흉갑기병의 모습입니다. 코투지치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2차 슐레지엔전쟁 중 1745년 6월 4일에 벌어진 호엔프리드베르크Hoenfriedberg 전투지도입니다. 

슐레지엔을 포기할 수 없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60,000명의 오스트리아군과 작센군을 동원하면서 2차 전쟁이 벌어졌고 프리드리히 대제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전투는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기습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 전투에서는 프러시아군 보병 42,000명, 중기병 14,500명 경기병 2,300명과 대포 192문이 투입되었고 오스트리아-작센 연합군은 59,000명과 대포 122문을 투입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용기병의 돌격그림이 많은데, 그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작센군이 전장을 떠난 틈을 노려 오스트리아 보병대열에 뛰어 들었고 겨우 94명의 피해만 입은 채로 오스트리아군 보병대열을 무너트렸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포로로 잡힌 오스트리아와 작센 장교가 프리드리히 대제 앞을 지나고 있습니다.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영어식 발음)군의 군목입니다.

재미있게도 프러시아군의 군목은 전투에도 참가했고 맹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슐레지엔전쟁에서 프러시아군의 포병에게 많은 피해를 입은 후에 대대적인 개편을 해서 7년 전쟁 중에는 오히려 프러시아군보다 더 강력한 화력을 보유했습니다. 
















1745년 9월 30일, 슐레지엔 국경근처, 보헤미아 북동쪽에서 벌어진 조르Soor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경기병Hussar가 프러시아군 진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프러시아군 22,500명(보병 16,700명/기병 5,800명)이 오스트리아-작센 40,200명(보병 23,500명/기병 12,700명.비정규군 4,000명)을 상대했습니다. 프러시아군이 초반 고전을 견디고 승리를 거뒀고 양쪽의 피해는 포로를 포함해서 4,000/7,000명으로 다른 전투에 비해 가벼운 편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나중에 프랑스 대사에게 "호헨프라드부르크전투에서는 슐레지엔을 위해 싸웠지만 조르전투에서는 살기위해 싸웠소"라고 말할 정도로 초반에 고전을 했습니다. 



조르전투의 지도입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아래 지도와 같이 중/동유럽의 대부분을 통치하던 제국으로 합스부르크군주국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워낙 이질적인 국가, 민족과 종교가 얽히다보니 당연히 프러시아와 같은 강력한 신생군주국에게 계속 밀려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총 동원령은 내리면 다른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병력을 모을 수 있었지만, 이민족 부대 간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안되었고 오스트리아 지휘관과 이민족 병사간의 갈등이 워낙 심해서 심지어 내전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조르전투에서는 헝가리 정규군 말고도 아래 그림처럼 발칸반도에서 동원한 판두르Pandour 비정규군이 참전했습니다. 




이들은 비정규군의 특징을 그대로 지녀서 귀향길의 모든 곳을 약탈하며 다녔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지였는데도 말입니다. 당시의 농부들 삶은 이래 저래 살기 힘들었습니다. 전장이 된 곳은 말할 것도 없고 몇 만 명의 병력 이동로에 놓인 지역은 약탈의 대상이었습니다. 


헝가리 경비병과 판두르 비정규군은 프러시아군 진영에 돌입해서 80,000두카트(유럽공통금화)가 담긴 상자를 노획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러시아군은 무려 1백만 두카트를 약탈당했고, 프리드리히 대제의 개인식기, 플루트와 개까지 빼앗겼다고 하니까 어느 정도로 위기였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차 슐레지엔 전쟁을 끝낸 케셀스도르프Kesselsdorf 전투지도입니다. 1745년 12월 15일, 드레스덴의 북부 작센의 엘베강에서 프러시아군 보병 21,000명/기병 9,000명/중포 33문이 오스트리아-작센 보병 24,000명/기병 7,000명/중포 42문을 상대했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프러시아군의 사상자 수가 많았지만 훨씬 많은 포로를 잡았습니다. 


프러시아군이 처음부터 공격목표로 삼았던 작센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수도 드레스덴은 프러시아군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작센을 잃은 오스트리아는 단독 전쟁을 단념하고 슐레지엔을 프러시아에게 넘겨줍니다. 오스트리아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방대한 국경에서 온갖 전쟁을 동시에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여력이 없었습니다.


드레스덴 조약 후에, 프리드리히 대제는 개를 돌려받았습니다. 



케셀스도르프 전투의 지휘관 안할트-데사우 레오톨트 1세가 전투직전에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71세의 나이로, 18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