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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7년전쟁

미치광이로 모두를 의심했던, 그러나 위대했던 프리드리히 2세

by uesgi2003 2013. 12. 26.


프리드리히Frederick 2세는 1740년에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왕좌에 앉자 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온 국민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프리드리히 자신도 잘 훈련된 군대, 넘치는 국고 그리고 왕국을 일으키려는 욕망이 있으니 전쟁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 후 25년 동안 그는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에게 도전했고 빛나는 승전도 거두었지만 왕국은 물질과 정신 모두에서 대격동을 겪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러시아의 표트르대제처럼 쉽지 않은 인생이었고 상당한 정신과 신체장애를 겪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분의 초상화는 좀 무서운 표현이 많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에서도 왜 그렇게 째려보는지...


약 25만 명의 프러시아 병사가 죽었고 민간인의 피해는 훨씬 많았다. 지방은 황폐해졌고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화폐가치는 바닥을 쳤다. 프러시아 왕국을 그 동안 지켜주었던, 봉사와 충성대신에 안정과 보호를 제공한다는 사회계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통치한 1786년까지, 군 지휘관은 훈련과 규율에 집중했고,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에 충성했다. 

그는 장교가 적보다 더 무서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장군의 행동 하나 하나를 일일이 통제해서 아무도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프레드리히는 수 십 년 동안 군대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사령관의 솔선수범이 당연하던 시절에, 프리드리히는 두 번(1741년 몰비츠Mollwitz, 1756년 로보지츠Lobositz)이나 뚜렷한 이유없이 전장을 이탈했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강인한 전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다. 1757년 콜린Kolin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그는 막대기로 진흙을 몇 시간 동안 헤집다가 휴식이 필요하다며 군에서 이탈했다(그림 참조). 


1759년 쿠네르스도르프Kunersdorf에서도 패전한 후에, 부하에게 지휘권을 넘긴 후에 자신은 패배를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며 과장된 한탄을 했다. 관대한 후대의 역사가는 그의 태도를 트로마의 스트레스때문이라고 옹호하기도 하지만 18세기 분위기는 이런 행동을 절대로 두둔하지 않았다. 

이런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3번의 큰 전쟁을 통해 프러시아를 일으켜세워 재무장시키고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켰고, 결국 근대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당시 프러시아는 라인강에서 폴란드 왕국 깊숙이 늘어져 있었고 프리드리히는 유럽의 열강과 결국에는 충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러시아(프로이센)은 간단하게 현재의 독일로 생각하면 되고 1600~1795 기간 동안 이런 확장을 했습니다. 

브란든부르크-프러시아에서 프러시아로 1701년에 통일되었고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르기 불과 40년 전의 일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슐레지엔Silesia를 두고 오스트리아 등과 오랜 전쟁을 치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왕국은 열강들 사이에서 당당히 서기에는 군사력, 경제력과 외교력이 모두 부족했다. 

프러시아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확장해야만 했다. 


프리드리히는 왕위에 오르던 1740년에 익명으로 반마키아벨리론Anti-Machiaviel를 출간하고 국제관계의 법과 윤리는 군주나 국민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마치 시계를 수리하고 동작시키듯이 이성적인 계산 그리고 학습이 가능한 원칙에 따라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통치기간 내내 이런 사상을 고수했고 계몽절대군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이런 통치철학에 따라 전쟁을 미리 계획하고 전쟁에 돌입하면 단기전으로 완승을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충분하지 않은 자원(인력)을 보존하고 패전국이 재도전할 생각을 갖지 않게 하는 동시에 다른 적대국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선제공격으로 초반에 승부를 낼 수 있는 돌격형 군대가 필요했다. 


프리드리히는 전쟁을 즐기는 정복왕까지는 아니었어도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물론 오랜 전쟁을 겪은 적대국도 가능한 경우에는 언제나 유리한 상황과 지형을 찾아 프리드리히의 전술을 방해하려고 했다.

전쟁 초기에는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1741년 몰비츠 전투에서, 프러시아 보병의 마지막 돌격으로 판세를 역전시키기 전까지는 참패하는 것처럼 보였고, 1745년 조르Soor 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러시아 진영을 기습했고 병사들의 분전으로 간신히 승리했다. 1758년의 호크키르히Hochkirch 전투에서는 전초기지에서 빼앗긴 포대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포격을 퍼부을 때까지도 적의 동태를 모를 정도로 완벽하게 기습을 당했고 참패했다. 


그는 프러시아군의 전력을 최대한 높여서 나중에 군사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불확실성과 소모'라고 부르는 요소를 최소화시키려고 했다. 평화시에도 프러시아군에게 공공지출 중 3/4를 지출할 정도였다.

18세기의 프러시아에서는, 모든 시민이 왕정의 부름에 봉사할 의무가 있었다. 군역은 주로 농부와 비숙련 도시노동자와 같이 당장 자리를 비워도 문제가 없는 국민이 맡았고 전국에서 체계적으로 병사를 징집했다. 강제로 징집하기도 했지만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매년 어느 정도의 젊은이를 자발적으로 내놓았고 지역관리는 누구를 언제 내놓을 지에 대한 지역사회의 결정에 크게 간여하지 않았다. 


국민의 지지를 바탕삼아, 프리드리히는 왕국의 경제를 전쟁체제로 바꾸었다. 그는 매년 야전훈련을 실시했고 1753년에 44,000명까지 훈련규모를 키웠다. 기동훈련은 단순히 겉치례가 아니었다. 병사들은 대형과 전술을 시험했고, 대규모 기동을 훈련했고, 연대간의 협동을 조율했고, 지휘관은 실제 전장에서 부대를 지휘하는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적대국에게 프러시아군의 전력을 공공연히 과시하며 늙은 프리츠Old Fritz와 충성스러운 척탄병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렇지만 군사훈련의 억지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프러시아를 상대로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프랑스가 연합해 7년전쟁(1756~1763)을 일어나면서 프리드리히의 시스템은 본격적인 시험무대에 올랐고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7년전쟁 당시는 아니고 1745년 2차 슐레지엔전쟁의 호엔프리드베르크Hoenfriedberg 당시의 모습입니다. 그림에서와 같이 지휘관이 가장 앞장서서 적진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상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와 작센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고 양쪽 모두 약 60,000명의 병력이 맞붙어서 프러시아는 5,000명의 피해로 적에게는 11,000명의 피해(포로 포함)를 입히며 승리를 거뒀습니다. 

7년전쟁의 인상적인 그림은 따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병사들에게 강압적으로 군복은 입힐 수 있지만, 명령만으로는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상황에서 병사의 대열을 유지할 수 없다. 특히 양쪽이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죽는지를 놓고 대결했던 7년전쟁에서는 병사를 통제하기 매우 힘들었다. 

생사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에 병사의 무한한 충성심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는 30년 동안의 복무계약을 받아들였지만 그 기간 동안 전장에서 항상 충성스럽지는 않았다. 전투가 거듭되고 피해가 늘어가면 병사들은 조국과 맺은 계약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까지의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독일용병) 시대 그리고 30년전쟁(1618~1648) 동안, 병사는 칼을 무장하고 괴상망칙한 군복을 입고 마치 농부나 인부출신이 아닌 것처럼 과장된 행동을 보였다. 나중에 통일된 군복이 도입되고 부대규율이 엄격하게 적용되면서 병사들의 일탈이나 자유는 제한되었다. 동시에 국가는 병사에게 급여와 복지를 제공하고, 병사는 국가에 충성하는 상호의존관계가 만들어졌다. 


프리드리히는 상호의존관계를 다른 국가보다 더욱 강화시켰다. 프러시아의 군복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좋았다. 야전병원도 민간병원보다 월등히 좋은 수준이었다. 전역용사는 공무원이나 주둔지의 영내에서 정착할 일자리를 받았다. 

그렇지만 7년전쟁이 격화되면서 병사들의 충성심을 붙잡아두려면 물리적 대가보다는 강력한 지도력이 더 효과적이었다. 1757년 콜린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대열을 향해 최후의 총공격을 가하면서, 프리드리히는 기존에 고수했던 기계적인 리더십을 버리고 인간적이고 직접적인 리더십을 보였다. 


프러시아군은 로보지츠, 콜린과 프라하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동 프러시아를 침공했고, 프랑스군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군을 받아 서쪽에서 프리드리히를 공격해왔다. 프리드리히는 작센을 공격해 약탈했고 그 여파로 독일내에서 어느 누구도 프러시아를 지지하지 않았다. 프러시아의 운명이 다한 것처럼 보였다. 


1757년 11월 5일, 로스바흐Rossbach(프러시아가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에게 거둔 대승)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프리드리히의 혁신은 귀중한 열매를 맺었다. 프랑스 장교가 프리드리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폐하의 군대는 진정한 군대입니다. 우리는 유랑 매춘꾼에 불과합니다." 

프랑스군의 수송마차에는 실제로 시종, 하인, 요리사, 미용사, 신부와 연기자까지 탔고 그 안에는 잠옷과 앵무새까지 있었다고 한다. 프러시아는 이런 사실을 과장하며 자신의 검소함과 금욕을 부각시켰고 프리드리히는 전설처럼 부각되어 심지어 펜실바니아의 여인숙과 거리까지 그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 수송마차를 노획한 프러시아군의 모습입니다. 앵무새까지 정확하게 묘사했군요. 


그렇지만 프리드리히가 전장에서 몸소 경험했듯이, 승세는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었다. 프러시아군은 지역 원정에서 실패하면서 1757년 11월 25일에 브레슬라우에서 항복했고 베를린이 위협을 받았다. 12월 2일에 슐레지엔에 도착한 프리드리히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승리했다. 

프리드리히는 그 이후에 보여준 결단력과 행동으로 늙은 프리츠의 신화를 만들어갔다. 그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는 병과 피로 속에서 야영지를 누볐고 적의 공격에도 놀라지 않았고 병사들의 불만에 귀기울이며 충성의 대가를 약속했다. 그는 12월 3일에 사령부로 장군 그리고 연대와 대대장까지 모두 불러들였다. 


장교 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위대한 군주의 자신감이나 활력은 찾아볼 수 없었고 피로에 지쳐 서있기도 곤란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공격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승리하지 못하면 죽음 뿐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영광을 위해, 명예를 위해, 아내를 위해, 자식을 위해 싸울 것이다... 나와 함께 하는 병사는, 비록 전사하더라도 내가 유가족을 보살필 것이다. 달아나고 싶은 사람은 가도 좋다. 그렇지만 앞으로 내 호의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나약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는 임무를 다하지 못한 기병연대는 말을 몰수해서 보병으로 만들 것이며, 임무를 다하지 못한 보병연대를 부대기, 군복의 장식 그리고 칼까지 모두 몰수하겠다고 단호하게 경고했다. 


2일 후인, 1757년 12월 5일에, 프러시아군은 로이텐Leuthen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우회기동해서 격파했다(지도참조).



기동전은 로이텐 전투가 마지막이었다. 조른도르프(1758) 전투, 슐레지엔 쿠네르스도르프(1759) 전투, 호크키르히(1758) 전투, 토르가우(1760) 전투에서는 근접전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다. 프러시아군은 1759~60년 겨울을 슐레지엔 평원의 텐트에서 보냈고 부족한 보급과 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하지 않았다.

다음 해 여름에도 한 달에 걸쳐 강행군을 하면서 많은 낙오자가 생겼지만 탈영병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1756년 전쟁을 시작할 당시의 병사는 대부분 사라졌다. 1761년 당시, 병력의 3/4는 신병, 외국인 또는 전쟁포로였고 장교도 절반이상이 교체되었다. 심지어 13살짜리 신병도 있었다.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점점 불어나는 연합군의 병력 앞에서도 프러시아군의 결집은 여전했다. 1763년에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왕이 급사를 하면서 7년전쟁이 끝났고 프리드리히는 왕국과 명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차르가 된 표트르 3세는 평소 프리드리히를 흠모했었기 때문에 바로 협정을 맺고 종전했으며, 한축이 무너진 오스트리아와 작센도 더 이상의 전쟁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1763년 2월 후베르쿠스부르크 조약으로 프러시아의 슐레지엔 합병을 인정했습니다.)


프리드리히의 리더십덕분에 오랜 전쟁에도 불구하고 프러시아군은 전장을 지켰다.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하며 자신도 고난을 견뎌냈다. 행군이나 야영지에 늘 그가 함께 있었다. 호크키르히 전투에서는 왕이 나서서 무너지는 대열을 바로 잡았고 토르가우에서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는 병사들과 일상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존경을 받은 위대한 지휘관이었다. 


프러시아의 장교도 관료나 궁전귀족이 군복을 입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군인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계급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에 장교의 계급장도 뒤늦게 달았고 일선 장교에게도 직접 명령을 내렸다. 왕의 분노가 언제 쏟아질 지 몰랐기 때문에 장교들은 항상 긴장하고 유대감을 높였다. 


프리드리히의 군주답지 않은 일탈행동은 병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의 전쟁은 전투력보다는 누가 더 인내심을 가지고 버티느냐로 결정이 났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하루 안에 끝났지만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사격하고 백병전을 벌이는 근접전은 병사들의 인내심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동 프러시아와 중앙 유럽의 황무지 원정은 전투보다도 오히려 더 고달펐다. 


프리드리히는 야전행군에서 보기 좋은 행진을 강요하지 않았고 초병과 경계병도 최소한만 세웠고 각 중대에서 특혜없이 공평하게 경계를 섰다. 행군 중에는 규율을 강요하지 않았고 병사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며 독일 사투리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지만 야영지가 세워지면 권위와 규율을 강조했다. 마치 신이 인간의 군복을 입고 강림한 것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토르가우 전투에서 야영을 하는 프리드리히 대제입니다. 


1763년의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에 체결되면서 프리드리히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장군, 정치가,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을 받았다. 실제로 그의 차가운 태도때문에 오히려 더 큰 매력을 느꼈다. 프러시아의 성공은 독일 전역에서 병사와 인재를 끌어들였다. 

그의 장교는 참패와 승리를 모두 겪었지만 프리드리히를 군사천재로 추앙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는 비평가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프리드리히 대제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