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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20세기 최후의 기병전 코마로프 전투(1920) - 1부

by uesgi2003 2014. 2. 2.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요즘 다음 아고라의 자동차 섹션을 자주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도 어김없이 종북, 좌빨 색칠이 대단하더군요. '자동차에 왠 종북? 누가 정치글을 올리나?'라는 의문이 드실텐데... 현대와 기아차를 욕하면 종북주의로 색칠하고 진흙탕 싸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미꾸라지들이 커뮤니티를 와해시키는 방법이죠. 현대와 기아차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모두 종북주의자로 빨간색 색칠을 하고 분탕질을 하면 소란을 싫어하는 눈팅회원들이 다른 커뮤니티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아고라 담당자가 신속하게 대처를 못할 때에는 현대와 기아차 비난글이 올라오면 바로 사진 한 장 딸랑 올려놓는 글을 연거푸 올려서 글을 밀어내더군요. 

다행히 요즘에는 담당자가 대처를 제대로 해서 그런지, 분탕질은 사라졌습니다. 


종북주의자가 유행어가 되다보니 이제는 대기업의 탐욕을 비난하는 당연한 권리에도 종북딱지가 붙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종북주의자를 보시거나 겪으신 적이 있나요? TV에서 보도되는, 인터넷에서 날뛰는 관심종자말고 실제로 보시거나 겪으신 적이 있나요? 진보나 좌파는 종북주의가 아닌 것은 아실 겁니다. 


종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늘 이야기가 러시아의 볼세비키가 10월 혁명 후에 아직 내전이 종식되지 않았던 1920년에 폴란드와 벌인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뒤로 돌려, 만약 제가 30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글로 썼다면 저는 바로 조사를 받았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정리해도 불려갈 때였습니다. 그보다 시간을 뒤로 더 돌리면 심지어 타미야의 T-34 플라모델 등은 아예 수입되지도 못했었죠.


재미있는 것은 북한의 위협이 대단할 때 그리고 소련이 미국과 함께 세계를 주무르고 있던 당시보다 오히려 지금이 좌익빨갱이와 종북주의자가 늘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회가 개방된거지!' 또는 '그만큼 잃어버린(?) 10년동안 문란해진거지!'라는 분들이 있는데... 소련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진 지가 30년이 되었고, 북한은 매년 굶주려 죽어가고 있고,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명동에는 한국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아졌는데도 공산주의 그리고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이 더 늘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나요?


그냥 간단하게 요즘 대학생 중에 맑스 자본론을 읽는 사람이 있나요? 주변에서 북한에 가서 살고 싶은 사람을 보신 적이 있나요? 30년 전이었다면 공산주의 추종자로 조사를 받았을 저도 북한의 금강산, 백두산, 개성은 놀러가고 싶어도 살고 싶은 생각은 0.1mg도 없습니다. 


20세기 최후의 기병전 코마로프 전투(1920)


1920년 8월 30일, 볼세비키Bolshevik 장군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디욘니와 코사크 군 코나르미야Konarmiya는 폴란드에서 재앙을 겪고 있었다. 16km의 공간에 갇혀 사방에서 폴란드 군의 포화를 맞고 있었고 어떻게든 탈출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끊이지 않아서 도로는 진흙밭으로 변해 있었다. 

체스니키 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길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 그 지역에는 폴란드 군이 많지 않았고 일시에 돌파한다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체스니키와 코마로프 사이의 고지를 최대한 신속하게 확보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고지대를 제 시간 안에 확보한다면 코사크 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지대로 후퇴할 수 있었다. 부디욘니의 코사크 병사는 다음 날 오전의 돌파작전을 준비하면서 유럽역사상 마지막 기병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795에 독립을 잃은 폴란드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1920년의 러-폴 전쟁은 1차대전 그리고 베르사이유 조약이 도화선이 되었다. 자결주의의 기치 아래, 1795년에 프러시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게 분할되었던 폴란드는 부활했다. 서쪽 국경선은 비교적 분명했지만 동쪽과 남동쪽 국경선은 오랜 분쟁역사때문에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지경이었는데 특히 공산주의 러시아와의 갈등이 심했다(소비에트 연방국가 중 서쪽 지역은 늘 주인이 바뀌었고 인근국가가 서로 역사근거를 주장하며 합병하려고 했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벨라루시를 나누는 폴란드와 러시아를 비난하는 만화로, 자립권이 없던 군소국가는 슬픈 상황이었죠). 



폴란드 건국의 아버지, 유제프 피우드스키Jozef Pilsudski(사진 참조. 리투아니아 출신이었지만 모국에 대해서는 무관심했고 폴란드의 부흥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원수는 볼세비키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폴란드의 후원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것을 알았다. 실제로 폴란드가 전쟁에 돌입하자 영국은 무관심했고 프랑스만 군사조문단과 약간의 무기를 원조했다. 독일군이 물러난 동부지역에는 아직 소련의 내전이 번지지 않아서 피우드스키는 폴란드의 옛 영토를 되찾기에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격언을 따르기로 했다. 

그의 목표는 2가지였다. 먼저 동부 국경선을 분할당하기 전인 1795년 상황으로 회복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크라이나를 해방시켜서 볼세비키 러시아와 공동전선을 펼치는 것이었다. 폴란드는 1919년 2월에 전쟁을 시작했고 공격은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지금의 빌니우스Vilnius, 민스크와 드빈스크를 1년 만에 모두 점령했고 1920년 4월에는 우크라이나에 진입했다. 5월 6일, 폴란드군은 독립우크라이나군의 지원을 받아 키에프를 점령했다(지도 참조). 



그렇지만 백군을 궁지에 몰아넣고 여유가 생긴 적군은 병력을 돌려 폴란드의 침공에 반격하기 시작했다. 북군과 남군, 2개 기동군이 편성되었고 이번 이야기의 코나르미야는 남군에 속했다. 

러시아의 대규모 병력동원은 단순히 폴란드만을 상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북군 기동군 지휘관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서쪽으로 눈을 돌려라. 세계혁명은 서유럽에서 판가름난다. 폴란드의 시신 위로  공산혁명의 길이 열린다. 총검으로 안녕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공언했듯이 볼세비키 러시아는 독일까지 노리고 있었다. 



1920년 8월에는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몰려 수도 바르샤바가 위협받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지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프랑스는 주로 폴란드 출신의 지원병인 청군을 폴란드로 수송하고 300명의 군사조문단을 지원하는 정도였습니다. 헝가리가 30,000명의 기병군단을 지원하려고 했지만 분쟁상태였던 체코가 국경선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산되었습니다. 

프랑스는 무기를 지원하다가 군사동맹을 맺게 됩니다. 



바르샤바 전투에서는 피우드스키 원수가 이끄는 20,000명이 방심하던 러시아군의 포위망을 뚫었고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위의 그림이나 아래 그림이나 선전목적의 그림입니다. 혁명이나 기념비 적인 전투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하죠?



제1 기병군의 정식명칭인 코나르미야는 요세프 스탈린의 후원을 받아 1919년 11월에 편성되었다. 원래의 목적은 백군 기병과 차르 코사크를 상대하는 역할이었는데 적군 코사크는 대부분 농부출신이었고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던 유대인 저자 이사 바벨은 1920년 일기에 "도대체 우리 코사크군을 뭐라고 해야 하나? 출신이 너무 다양한데다가 약탈하거나 무모할 정도로 대담하거나 전문적이거나 혁명심히 강하거나 야만스럽다. 우리는 파괴자다... 모든 사람이 증오하는 용암과도 같고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기록했다.


코나르미야는 정치장교 클리멘티 보로실로프 그리고 제국군 기병장교 출신인 부디욘니가 공동지휘했지만 코사크 병사는 부디요니의 명령을 따랐다. 



부디욘니는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보기 드물게 숙청에서 살아남아 대전 후까지 소련군을 이끌었고 원수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소련 최초의 원수 5명 중 한 명이었는데 다른 원수 3명은 숙청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제국군 기병장교 출신답게 혁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전차는 절대로 기병을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차대전 초기에 참패를 당한 후에 스탈린이 패전 책임자로 비난하며 현역에서 교체했지만 숙청당하지 않고 전쟁영웅 칭호를 받은 것을 보면 폴란드 전쟁 때부터 스탈린과는 각별한 사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디욘니는 1917년 혁명이 벌어지던 중 볼세비키에 동참했고 능력있는 지휘관이 필요하던 적군에서 빠르게 승진하며 코나르미야가 창군될 때부터 지휘를 맡았다. 그는 성급하고 무모한 면이 있었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의 용기와 결단력에 대해서는 정적까지도 인정할 정도였다. 


백군에 대해 승세가 굳어진 1920년 봄이 되자, 제1 기병군의 규모는 4개 사단 18,000명, 52문의 야포, 5량의 무장열차와 15대의 비행기(조종사도 없는데 말이다)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지만 개인무장은 기본적인 수준이었다. 폴란드 편에서 전투기를 조종하던 한 미국인 지원병은 "모두 긴 칼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고 등 뒤에는 비스듬히 기병용 소총을 맸다"라고 기록했다. 

이들의 전술도 기본적이었지만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에는 아주 적당했다. 기관총 진지와 같이 치명적인 방어시설은 피하고 방어선의 취약한 부분만 노렸다. 일단 허점을 관통하면 배후로 넓게 퍼져 적의 방어선에 대혼란을 일으켰고 1920년 당시의 코나르미야는 불패의 명성을 누렸다. 



르포프에 있는 제1 기병군 기념물입니다. 제1 기병군을 포함해서 러시아 적군 기병에 대한 인상적인 그림은 끝부분에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적군의 규모에 대해 이견이 많은데, 폴란드 전쟁에 투입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는 적군 115,000명이 95,000명의 폴란드군을 상대했다. 러시아의 반격은 5월 중순부터 시작되었고 코나르미야는 중앙 우크라이나의 남부에 투입되었다. 작전계획은 제국군 당시에 부디욘니의 상관이었던 알렉산드르 카르닉키Karnicki가 이끄는 3,000명의 우크라이나 저항세력을 진압하고 키에프로 진격한 후에 다른 군과 함께 폴란드 제3 군을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카르닉키는 폴란드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코나르미야에게 절망적인 기습을 여러 차례 시도했고 미처 퇴각하지 못한 폴란드 부대는 방어태세를 갖췄다가 적군기병이 충분히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코나르미야의 돌격은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엄격한 규율과 용기가 필요한 전술이었다. 한 폴란드 장교는 코사크 기마부대를 처음겪고는 "지평선 멀리 몇 km에 걸쳐서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오는데 그 위세에 결국에는 겁장이가 되고 만다"라고 기록했다. 



부디욘니는 병사들의 사기문제도 걱정되었고 인정받을 만한 전과를 올려야 했기 때문에 병사들을 이끌고 폴란드군에게 직접 뛰어들었다. 지형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기가 떨어져 있던 폴란드군의 방어선은 부디욘니의 맹렬한 기세에 무너졌다. 



폴란드 방어선을 돌파하는 부디욘니입니다. 수 천 명의 기병돌격을 지켜볼 수 있는 병사는 많지 않고 당시의 소총으로는 빠르게 움직이는 기병을 맞출 수도 없었습니다. 적의 취약한 지점을 노리고 돌파하는 기병이 2차대전 동부전선에서도 맹활약했던 이유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1920년 6월 6일, 부디욘니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북쪽으로 돌아 키에프의 폴란드군을 포위하지 않고 지토미르와 베르디체프의 손쉬운 먹이감을 노리기로 했다. 폴란드군에게 당했던 피해를 우크라이나에 보복하려 한 것이다. 베르디체프의 병원에서만 600명의 환자와 간호원이 불타 죽었다. 스탈린은 제1 기병군이 저지르는 만행을 6월 8일까지 말리지 않았고 그 귀중한 48시간 동안 키에프의 폴란드군은 질서정연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를 통과한 적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7월 2일, 코나르미야는 호린Horyn 강을 건너 로브노에 들어가 군수품을 노획했다. 7월 중순이 되자 적군은 폴란드 국경을 위협했고 공산주의 선전물은 세계혁명이 다가왔다고 떠들었다. 한 선전물은 "계속 싸워나갈 것이다. 러시아는 도전장을 던졌고 유럽을 휩쓸고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일반 코사크 병사의 마음 속에는 공산주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코사크 장교는 "이 전쟁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라 코사크의 반란이다. 그냥 주머니를 채울 수 있으면 된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훨씬 대규모인 북군의 투카체프스키Tukhachevsky(나중에 숙청된 원수 중 한 명으로, 부디욘니의 맹렬한 비난을 샀습니다)와 남군의 지원군 사이의 통신도 문제가 생겼다.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양쪽 지휘관의 대립도 큰 원인이었다. 양쪽 지휘관이 직접 통신하지 않고 전령을 복잡한 지휘통로를 통해 주고 받았고 당연히 재앙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급조한 계획에 따르면, 코나르미야는 갈리시아Galicia 지역을 관통해서 바르샤바를 노리는 북군과 합류해야 했지만 스탈린과 부디요니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아군의 희생을 담보로 스탈린의 명성을 높이려는 미친 생각이었는데, 독일점령보다는 그래도 실현가능한 목표였다. 적군이 노리던 독일은 서유럽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테니까.

목적과 이유가 무엇이던 상관없이, 이렇게 해서 북군과 남군의 협동작전은 완전히 끊어졌고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