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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20세기 최후의 기마전 코마로프 전투(1920) - 2부

by uesgi2003 2014. 2. 3.


심심할 때마다 외국 드라마를 보는데 주로 미드입니다. 왠만한 드라마는 다 봤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많은 분들이 추천하던 70년대 쇼를 봤습니다. 흔히 시트콤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작품이죠. 아쉽게도 피날레 시즌에서는 주연 한 명이 빠지면서 크게 힘을 잃더군요. 마치 오피스와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마지막까지 힘이 빠지지 않았던 프렌즈가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에 일본 드라마는 시대극이나 공포물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큰 재미를 못 붙이겠습니다. 우선 호흡이 무척 느리기 때문이죠. 그게 정석일 수 있지만 과장과 속도감 중심의 국내 드라마에 익숙하다보니 상당히 싱겁습니다. 

최근에 시작한 역사드라마 칸베에는 제가 좋아하는 시대이고 마이너한 인물이라 기대가 컸는데 1편 시작부터 바람이 쭈욱 빠지더군요.


예를 들면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호죠 가문의 오다와라 성이 이런 한심스러운 규모로 표현된다던가...



16살 모습이라고 우기는 노안이라던가... 



그렇지 않아도 너무 선남선녀만 나오고 모델급 신체때문에 감정이입이 안되는 판에 이런 무성의까지 겹치니까 1편에서 접게 됩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판타지 수준의 역사물에 비하면 명작입니다만...



20세기 최후의 기마전 코마로프 전투(1920) - 2부


제1 기마군은 7월 말에 로프노를 떠났고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했지만 무질서했다. 보급로는 늘어지거나 아예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약탈하고 다녔다. 양 진영이 민가를 약탈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주로 유대인 마을이 희생되었다. 

코나르미야의 독단적인 진격은 길게 늘어진 돌출부를 만들었고 폴란드군은 그들이 브로디Brody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후를 차단했다. 

그제서야 위기를 느낀 부디욘니는 함정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았고 다행히도 이번만큼은 올바른 판단을 했다. 역사가 아담 자모이스키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와 보로실로프는 그 시기에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위기가 보이는 모든 곳을 돌아다녔다. 볼로실로프는 사기를 올렸고 부디욘니는 앞장서서 돌격했다." 이들은 함정에서 빠져나갔지만 병사들의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났다. 



바르샤바로 진격하던 제1 기병군의 모습인데... 정규군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죠? 다양한 출신배경의 코사크족으로 구성된데다가 내전을 겪다보니 온갖 군복이 다 동원되었습니다. 


남쪽에 배치되었던 폴란드군이 북군의 투카체프스키를 상대하기 위해 대거 이동하면서 코나르미야의 앞은 활짝 열렸다. 여기에서 적군의 복잡한 정치문제가 다시 불거졌는데, 레프 카메네프Lev Kamieniev(볼세비키 혁명가로 소련대회 의장을 역임했지만 스탈린에게 밀려나면서 숙청당했습니다.)는 북군의 작전수행을 위해 코나르미야에게 루블린까지 진격해서 투카체프스키를 기다리라고 명령했지만 예고로프(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스탈린과의 친분이 두터웠지만 대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는 코나르미야를 북쪽으로 보내지 않고 르포프를 거쳐 남서쪽을 점령하는 계획을 계속 진행했다. 

8월 12일, 카메네프는 스탈린과 예고로프에게 코나르미야를 북군 휘하로 배치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렸지만 부디욘니는 이미 르포프(폴란드어, 러시아어, 영어 발음이 따로 있으니 정말 난감합니다. 현재의 Lviv입니다.)에 있었고 명령서를 간단하게 무시했다. 카메네프의 명령은 어디로 진격하라는 구체적인 지시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코사크 기병은 부그 강을 건너며 폴란드 잔병을 처리했다. 8월 15일이 되자 폴란드 영토 안으로 전장이 옮겨졌고 폴란드 국민의 저항이 거세졌다.  자드포르제Zadworze 마을에서는 폴란드 학도병이 전투에 합류했다. 학도병의 무장은 막대기와 화염병 수준이었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대단했다. 그리고 폴란드의 빈약한 공군력도 큰 힘이 되었다.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3일 동안 200회의 출격을 하며 코사크군을 공습했다. 심지어 저공비행을 하며 비행기 바퀴로 코사크 기병을 쓰러트리려고 위협하기도 했다. 



자드포르제 전투는 폴란드판 테르모필레 전투로 불립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바르샤바 방어를 위해 남부에는 겨우 2.5개 사단병력이 적군 3개 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르포프를 방어에 많은 시민병이 지원했고 정규군 1개 대대가 적군에게 점령당한 자드포르제 마을의 기차역을 탈환했다가 전멸당합니다. 

이들이 전멸당하던 8월 17일, 약 500명의 지원병이 기차역에 도착했고 반격에 나서 330명의 병사가 기차역만 탈환합니다. 부디욘니의 휘하 제6 기병사단은 6번에 걸쳐서 공격을 했고 탄약이 다 떨어진 폴란드 병사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차역을 빠져나가다가 기병사단과 육박전을 벌입니다. 330명의 병사 중 겨우 12명만 본대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11시간의 전투를 벌이며 제6 기병사단을 하루 동안 붙잡아두면서 르포프가 방어를 보강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무엇보다도 제1 기병군이 제 시간에 바르샤바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대전과를 올렸습니다. 만약 이들이 전멸당하며 버티지 않았다면 피우드스키 원수의 기적적인 반격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디욘니는 바르샤바 전투에서 북군이 참패한 후에야 도착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제6 기병사단은 시민군을 상대로 무려 600명을 잃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르포프 방어에 지원한 학도병입니다.



자드포르제 전투 모습입니다.



지도를 보면 적군은 폴란드를 거의 점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북군은 전선을 제대로 정찰하지도 못했고 보급부대는 뒤에 한참 처져 있었다. 8월 16일, 피우드스키는 북군의 측면과 후방에 결정적인 반격을 가했다. 그런데도 북군의 투카체프스키는 부대에게 바르샤바를 향해 진격하라며 재촉했다. 반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병사들은 명령을 무시했고 중립지대인 독일로 달아나거나 강을 건너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그 동안 코나르미야는 르포프를 향해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8월 18일, 부디욘니는 투카체프스키의 재촉을 무시했고 다음 날에는 아예 레온 트로츠키(적군 총사령관)의 전신까지 날아들었다. 그는 북군과 남군의 긴밀한 협력을 당부했다. (당시에는) 레닌의 뒤를 이을 트로츠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고 르포프를 코 앞에 두고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북군을 밀어낸 피우드스키는 코나르미야가 이미 기운 전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어도 바르샤바에 상당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부디욘니의 진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남쪽의 율리우스 롬멜Rommel에게 기병을 이끌고 코사크 기병군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발목을 조금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그 동안 여유병력을 긁어모아서 분쇄할 계획이었다. 


아직 북군의 참패소식을 모르고 있던 적군 최고사령부는 코나르미야에게 북쪽의 자모스크Zamosc로 이동해서 북군의 부담을 덜어주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고사령부에서 직접 내려온 명령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8월 26일의 공격을 준비했다. 

자모스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폴란드 제10 사단과 3개 민병대대가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고 8월 30일까지도 이들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제13 사단과 몇개 포병 부대가 접근하고 있었고 롬멜의 기병대는 코나르미야의 얇팍한 후방통로를 막으려고 쫓아오고 있었다. 

제1 기병군은 다시 한 번 포위되어 전멸할 위기에 몰렸다. 


자모스크 방어병력이나 기병 모두 상대하기 힘들지 않았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폴란드 구원군이 몰려들 것이 분명했다. 부리욘니와 보로실로프는 체스니키 마을을 통해 동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브로디에서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도록 코마로프 부근의 고지를 선점해서 측면을 보호하기로 했다. 그러나 롬멜의 기병이 고지를 먼저 차지했다.


롬멜은 코마로프로 적군 기병이 탈출할 것을 염려해서 브르제조프스키Brzezowski 대령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들여보냈고, 대령은 고지(255)가 관건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제2 후사르 연대를 배치했다. 겨우 200명 밖에 안되는 연대에게는 전멸하더라도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고지를 떠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부디욘니는 고지에 소수의 기병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정예 6사단에게 고지를 청소하라고 지시했다. 고지 255를 점령한 다음에는 나머지 본대가 빠져나갈 때까지 후위엄호를 맡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정찰병력을 보내 다른 탈출로를 찾게 하는 한편, 제11 사단 대부분을 남쪽으로 보내 폴란드 증원군을 막게 했다. 그들도 6사단과 함께 측면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다. 


코마로프 전투는 진흙밭 위에서 벌어졌다. 오전 7시 45분, 적군 제7 여단이 200명의 후사르 연대를 포위했고 후사르 연대는 작전명령보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이던 중에 제8 창기병 연대가 증원되어 전투에 합류했다. 고지에서는 총성, 칼의 충격음 그리고 비명이 울려퍼졌다. 다급해진 브르제조프스키 대령은 제9 갈리시아 창기병 연대를 이끌고 고지로 달려갔다. 적시에 밀어닥친 폴란드 창기병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돌격해 들어가서 체스니키 숲까지 6사단을 밀어냈다. 제6 창기병 연대의 모든 장교가 전사했을 정도였다. 


전열을 가다듬은 6사단은 다시 한 번 고지를 공격했다. 한 폴란드 병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자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예 정신이 나갔기 때문에 두려움도 없었고 부상당해 쓰러진 아군이 말발굽에 밟혀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큰 피해를 입은 양쪽은 모두 뒤로 물러선 후에 대치했다. 그리고는 지휘관이 나서서 마치 중세시대 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대결을 벌였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칼이 아닌 권총을 사용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두 지휘관 모두 상처를 입지 않았는데, 폴란드 대열에서 갑자기 한 명이 뛰어나가 코사크 장교를 베어 떨어트렸다. 흥분한 코사크 병사가 달려들면서 다시 한 번 난전이 벌어졌다. 


중과부적인 폴란드군은 전멸직전까지 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코나르미야의 제11 사단 그리고 소련독립여단은 남쪽에서의 전투를 중단하고 급히 달려와 고지전투에 가세하면서 폴란드 수비군을 협공했다. 브르제조프스키 대령은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제12 폴도리아 창기병 연대를 투입했지만 적군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폴란드군의 위기는 계속되었는데, 다행히도 롬멜이 보낸 2개 기병연대가 도착했다. 이들이 합류하면서 코나르미야는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코마로프 기병전 모습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던 부디욘니는 북쪽 경로를 통해 후퇴하라고 명령했지만 최정예라고 자부하던 코나르미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고지 255는 작전이 아닌 코사크 기병의 자존심이 걸린 목표였고 제6 기병사단은 다시 한 번 공격하기로 했다.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고지를 차지하면 북쪽 경로로 탈출할 생각이었다. 

롬멜은 북쪽으로 경로를 바꾼 코사크를 붙잡으려면 고지에 투입한 증원연대를 빼내야 했다. 오후 5시 30분, 증원연대에 이동명령이 내려졌고 만신창이가 된 제8 창기병과 제9 창기병연대가 30분 후에 고지를 벗어나려는 순간에 약 700m 밖에 있던 숲에서 코사크 기병들이 쏟아져나왔다. 제6 사단이 마지막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삭 바벨은 마지막 공격에 참가했었던 모양이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그의 부대는 지역 과수원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보로실로프가 "폴란드 놈들을 다 죽여라"라고 외치며 권총을 흔들었다. 코사크 기병은 무서운 속도로 고지로 올라갔는데 놀랍게도 고지 위에 남아있던 폴란드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진 바벨은 "그들은 고지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대열을 갖추고. 단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썼다. 


제9 갈리시아 창기병 연대 200명은 언덕을 달려내려와 해일과도 같은 코사크 기병대열 속으로 부딪혀 들어갔고 그렇게 사라졌다. 제9 연대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제9 연대의 무모한 돌격은 코사크 기병의 속도를 늦췄고 그 뒤에 나타난 제8 창기병연대가 다시 달려들었다. 제9 연대의 용기에 기세를 잃었던 코사크 기병들은 대열을 무너트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브르제조프스키 기병여단은 코나르미야 전병력의 70%를 맞아 고지를 지켜냈고 유럽역사의 마지막 기병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롬멜 휘하의 6개 연대 1,700명은 코나르미야 20개 연대 17,500명을 맞아 퇴로를 열어주지 않았고 500명이 전사했습니다. 코나르미야는 약 4,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러시아 내전, 러시아-폴란드 전쟁에 대한 그림을 설명없이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클릭하면 커집니다. 기병 위주로 정리했는데 몇 장면은 그냥 인상적이어서 포함시켰습니다. 끝에는 자드포르제 전투와 러시아-폴란드 전투에 대한 동영상을 추가했습니다. 

중간에 스파이(?)가 하나 있습니다. 재미삼아 넣었으니까 웃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자드포르제 전투에 대한 동영상인데 자료화면은 별로 없고... 그냥 자드포르제 전투에 대한 애절한 노래를 감상해보세요.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편집한 동영상입니다. 폴란드 관점이기 때문에 감상적이고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독립을 지키려는 그들의 희생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꾸 뭐라 하면 안되는데... 독립당시부터 전차와 전투기를 사용하던 폴란드인데 근위기병대 운운하며 폄하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주의를 하게 됩니다.  

러시아, 특히 스탈린의 서쪽 진출은 이렇게 막혔고 2차대전 당시의 폴란드 분할점령으로 한풀이를 하게 됩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해서 전선을 둘로 나누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스탈린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 이유가 바로 러시아-폴란드 전쟁입니다. 그를 포함한 볼세비키 지도부는 공산혁명을 최소한 독일까지 확장하려고 마음먹었고 독일과는 많은 원한이 쌓인 상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