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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혁신을 외면한 지휘관 - 더글러스 헤이그

by uesgi2003 2013. 12. 15.


모 배송대행업체의 요즘 상황이라고 합니다. 



TV 해외직구 소란에 대해 아시는 분은 한 숨부터 나올 겁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이미 대기업의 호갱이 된 지 오래되었죠.

우리나라 TV를 미국에서 주문하면 55인치부터는 배송비+관세+보험료까지 다 붙여도 100만원 가까이 절약됩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60~65인치를 주문하는 분들도 꽤 많아졌습니다. 


이런 터무니없이 상황에 대해 대기업은 별의 별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마치 현기차가 '제대로 충돌각이 안나와서... 속도가 너무 낮아서... 사용자 실수...' 괴담만 늘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해괴한 주장을 그대로 읊조리며 쉴드를 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국보 1호 숭례문의 최저급 러시아 소나무 사건부터 댓글 대통령까지 도저히 어디부터 해결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철도 민영화에 이어 언젠가는 시도할 의료서비스 민영화까지 진행된다면 그 때에는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도 못하겠죠. 


오래간만에 정리하는 전사로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무능과 오판이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오는 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를 일부러 골랐습니다. 사실, 우리는 5년 내내 강바닥만 파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사기극만 펼친 '5년 계약직 공무원'을 겪어서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볼 필요도 없을 겁니다. 


더글러스 헤이그라는 잘못된 인물을 만나 영국의 역사 한 구석이 심하게 일그러졌듯이, 우리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최악의 지도자를 개탄하는 역사가 정리될 것입니다. 


영국이 꼽은 최악의 지휘관 - 더글러스 헤이그 Douglas Haig 


프랑스 북부의 솜Somme 전장을 방문한다면 유럽공동체의 공동묘지를 이리 저리 옮겨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느 곳에나 묘지가 있는데 포틀란드 대리석에 묘비명이 있는 작은 묘가 대부분이다. 이런 묘비명말이다. 세계대전의 병사/신원불명Known unto GOD. 

몇 시간만 돌아다녀도 엄청난 묘지와 묘비명을 볼 수 있는데, Thieval 추념공원에서 시체조차 발견하지 못한 70,000명의 영국병사 명단(사진참조)을 보게 되면 말이 없어진다. 


솜 전투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솜은 대학살과 무의미한 전투의 대명사였다. 전대미문의 인명과 물자가 헛되이 사라졌다.

1916년 7월 1일 오전, 110,000명의 영국보병은 참호 위로 올라섰다. 몇 시간 만에, 참호를 나선 60,000명이 사상당했고 그 중에 20,000명은 이미 죽었거나 곧 죽을 운명이었다. 많은 부상병이 양 진영사이의 중립지대No Man's Land에서 며칠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영국은 60,000명을 잃고도 목표 중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 참모대령은 "7월 1일의 공격은 영국 최고사령부의 결정을 지지하며 채택한 전술이 올바름을 보여주었다"라고 주장했다. 

영국파견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경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참담한 실패를 한 다음 날, 그는 "분명히 적을 뒤 흔들었고 예비전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라며 참모와 공세를 계속 이어갈 작전을 협의했다. 


겨울이 닥치기 전까지 그는 4개월 동안 집요하게 무의미한 공세를 이어갔고 영국군은 400,000명 이상을 잃었다. 유명한 전사학자 존 키건은 "이 전투는 영국전사상 가장 참담한 비극이었다. 영국의 국운이 끝나고 절대로 회복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헤이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전사에는 유명한 지휘관이 있었고 그의 전기를 읽으며 성공의 열쇠를 찾는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은 상상력이 장점이었다. 리는 대담함, 웰링턴은 냉정함, 한니발은 도전정신이 귀감이 되었다. 물론 이들처럼 뛰어난 지휘관은 모든 장점을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지능, 직관, 용기, 계산능력을 적절하게 동원하며 적지적소에 상대를 뛰어넘는 판단을 내렸다. 전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늘 뛰어난 지휘관의 자질을 배우고 싶어한다. 


반대로 성공을 이루지 못한 지휘관은 평생 2할 정도로 마감한 야구선수 정도의 관심밖에 받지 못한다. 그리고 전기에 자랑으로 내세울 거리도 없다. 세넌도어 계곡에서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에게 참패를 당했던 암브로스 번사이드Ambrose Burnside나 북군 장군은 역사의 조연으로 남았다. (제 블로그에 스톤월 잭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남북전쟁 편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더글러스 헤이그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 엄청난 희생을 치뤄 전장 곳곳에 묘지를 만들었지만 실패한 지휘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종전 때까지 그가 지휘한 군대는 거의 붕괴직전이었다고 해도 승자의 편에 서 있었다. 물론 솜과 이프르Ypres전투에서 어떤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는 반대편 주장도 있다. 


헤이그에 대한 논란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1915년의 작전실패 당시에는 그의 사령관 취임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라스와 루 전투의 작전은 제대로 수립되지도 진행되지도 않았고 심각한 인명피해를 내고 아주 조금의 땅만 되찾았을 뿐이다. 당시 파견군 사령관인 존 프렌치John French 경은 지휘관의 필수자질인 신념과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고 참모들 역시도 그랬다. 


헤이그가 프렌치의 사령관직을 넘겨받았고 윈스턴 처칠의 말을 따르면 "영국육군의 최고 장교로 총사령관에게 반드시 필요한 모든 자질과 경험을 갖췄다." 


헤이그는 자신의 자질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처칠은 그에게 극찬을 보냈다. "그의 전우가 보내는 존경심을 보면 그의 자기확신이 당연하다... 그는 몇 백 년 동안 선조에게 물려받은 땅을 가꾸고 농사에 평생을 바친 농촌지주처럼, 영국군 최고사령관직에 대해 자신하고 있다."


헤이그의 경우에는 농촌지주라는 말이 딱 맞았다. 자동차 엔진이 태동하던 시기에 기병장교를 지낸 사람이라면 말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헤이그의 말에 대한 애정은 너무 완고했고 심지어 기관총은 과대평가되었고 말을 상대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비평가들은 군 지휘관이 항상 시대착오적 전투를 벌인다고 말한다. 그들은 미래의 전투를 경험해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기병을 특히 선호했던 헤이그는 1차대전에서 기병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시대착오적인 지가 밝혀졌는데도 여전히 오판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헤이그는 솜 전투 전술에서도 기병에게 핵심역할을 맡겼다. 솜 전투는 소모전으로 유명했고 연합군이 오판한 전투였다.  연합군은 독일군보다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헤이그는 병사들의 피를 대가로 아무런 의미없는, 겨우 한 뼘의 땅을 차지했는데도 독일군의 전력을 소모시켰다고 생각했고 계속 공세를 이어갔다. 소모전은 절대로 전략이라고 부를 수도 없으며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지휘관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결정이다. 


그리고 헤이그는 상상력이 조금도 없었다. 폴 퍼셀Paul Fussell(유명한 미국 역사학자)이 대전과 현재의 기억The Great War and Modern Memory에 기록한 것처럼 "재치와 상상력과 같은 군사재능이 필요한 상황에서... 헤이그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그를 변명하자면, 헤이그는 진심으로 영국보병의 대규모 정면공격으로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고 기병으로 찬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보병의 돌파를 예상하고 기병을 집결시킨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물론 보병은 돌파하지 못했다. 


헤이그에게 냉정한 비평가는 이 부분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사고에 집착해서 실제 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분석하고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평원을 달리는 기병의 멋진 돌격을 꿈꾸며 보병은 밀집대형으로 천천히 전진하게 했다. 

앤드류 잭슨은 1812년 전쟁에서 이런 구시대적 전술의 오류를 입증했고 미국 남북전쟁에서는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그렇지만 헤이그는 콜드하버Cold Harbor 전투에 대해 알았지만 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전투에서 남군은 기관총이 없는데도 단 20분 만에 북군 7,000명을 죽였다. 

(콜드하버 전투는 아래의 도표와 같이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한 북군이 최악의 패전을 당한 전투로 꼽힙니다. 오합지졸에 가까운 남군은 겨우 1,500명의 피해밖에 안 입었지만 이미 남북전쟁의 승패는 북군으로 기운 상태였고 북군은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콜드하버 전투의 패전은 전쟁의 향방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142일간의 끔찍한 솜 전투가 끝나자, 영국정부는 "더 이상의 솜은 없다"라는 분위기였다. 정치인들조차 솜 전투에서 교훈을 얻었는데도 헤이그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솜의 확장판을 원했고 이렇게 준비된 이프르 전장은 대공세를 펼치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이었다. 

그는 플랑드르의 이프르 돌출부가 전쟁을 끝내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믿었고 이번에도 기병에게 마지막 역할을 기대했다. 


1917년 여름이 되자, 정면공격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려던 마지막 돌격에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반란까지 일으켰다.  새로운 전술이라고는 일체 없었고 그나마 믿었던 전차도 480km의 플랑드르 저습지에서는 위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다. 



3차 이프르 전투에서 주저앉은 마크 4 전차입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5만 명이상이 사상당했고 승세를 결정짓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헤이그와 참모는 아직도 확신에 차 있었고, 처칠이 담담하게 지적했듯이 "완승의 희망은... 영국군 전선에서 시간이 갈수록 멀어져갔고 정보국은 결심을 굳혔다." 런던 정치인들은 회의적이었다. 신임수상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는 서부전선에서 방어로 전환한 후에 조만간 합류할 미국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헤이그는 조금도 반성하지 못하고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3차 이프르 전투 또는 파스샹달Passchendaele 전투에 병력과 물자를 자유롭게 동원했다. 이 지역은 진흙과 물이 가득찬 포탄구덩이 밖에 없는 끔찍한 지형으로 도저히 대규모 작전을 펼칠 수 없는 곳이었다. 실제로 역사상 그렇게 많은 병사가 익사한 전투가 없을 것이다.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참호는 물로 가득찼습니다. 중간 지대에 쓰러진 부상병은 부상보다는 물에 잠겨 죽었고 참호에서도 일으켜 세울 수 없는 부상병은 익사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물속에서 쥐들이 부상병을 습격한 것입니다. 온갖 곳에 시체가 널려 있으니 쥐가 급증했고 의식을 잃은 부상병은 물속에서 다가온 쥐에게 공격을 당해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처칠은 헤이그에 대해 "영국군의 인력과 무기 모두 전멸수준까지 내몰았다"라고 종지부를 찍었다. 키건도 무자비한 평가를 남겼다. "솜 전투에서, 헤이그는 영국의 젊은이를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다. 파스샹달에서는 생존자를 절망의 진흙 속에 빠트렸다."

폐허 밖에 안 남은 파스샹달 마을을 무의미하게 공격한 마지막 작전에 대해, 영국 전사학자 J.F.C. 퓰러Fuller는 "전술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전투는 헤이그가 얼마나 멍청한 지를 보여주는 작은 일부분이다"라고 기록했다. 


정도는 넘어서는 순간부터 미덕은 결점으로 바뀐다. 과감함은 무모함으로 바뀌고 신중은 유유부단함으로 변하게 된다. 헤이그는 분명히 의지와 결단으로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진흙과 기관총도 말이다. 3차 이프르 전투는 헤이그의 참모까지도 전선으로 내몰린 지옥이었고 진흙밖에 없는 황무지를 본 참모는 눈물을 흘리며 "신이시여. 정말로 우리가 병사들을 이곳에서 싸우게 했단 말입니까?"라고 외쳤다. 

그의 운전병은 "여기는 나은 편입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라고 말했다. 

헤이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최고사령관과 참모가 실제 전장상황을 그렇게 모를 수 없었으며 터무니없는 비난이라고 생각한다.


헤이그가 옹고집으로 250,000명의 영국 젊은이를 희생시킨 것만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전사상 가장 참담한 실패 중 하나로 꼽히는 3차 이프르 전투인데도, 헤이그는 승리로 확신했다. 전술상 승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연합군의 패전이나 마찬가지였다. 

1917년 말과 1918년 초에, 독일군은 러시아에서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켰고 처참하게 망가진 영국군을 상대로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군은 사단의 대대 숫자를 13에서 10개로 줄여야 할 정도였다. 

영국은 18~45세의 성인남성, 심지어 과부의 독자와 3번의 부상을 당한 전역병까지도 모두 무차별 징집해야 했다.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루덴도르프의 봄 공세를 막아내야 했던 영국군은 자신의 처지를 "오랜 철조망에 걸려 허둥거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헤이그는 증원군이 필요했다. 영국본토에는 가용병력이 있었지만 로이드 조지 수상은 보내려 하지 않았다. 헤이그가 신용카드를 새로 발급받은 철부지처럼 한도액까지 모두 써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리고 헤이그의 모든 결정과 행동은 당연히 그런 걱정을 불러왔다. 런던과 프랑스 서부전선 사이에 생긴 갈등과 오해는 모두 헤이그의 책임이었다. 

그는 늘 대승을 약속했고 참담한 실패 후에는 성공의 정의를 바꿨다. 그는 정치인을 혐오했고 반대로 정치인은 그를 혐오했다. 런던정부의 판단이 옳았지만 행동에 옮겨 헤이그를 경질할 정도의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헤이그의 지휘권은 그대로 두는 대신에 더 이상 자원을 주지 않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3월 21일, 독일의 대공세가 홍수처럼 밀려들어오자, 영국군은 헤이그가 그 동안 수십 만 명의 병사를 죽여가며 얻은 땅보다 더 많은 땅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군은 전선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렸다. 그리고 독일군도 소모전의 무의미한 대가를 치뤘다. 1차대전 서부전선에서는 무의미한 소모전으로 공격측이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무의미한 공세에서 수 백 만 명을 잃었지만 이제 미군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오고 있었다. 독일군에게는 미군과 같은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응원군이 없었다. 


그렇게 전세가 바뀌었고 헤이그는 여전히 영국파견군을 지휘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을 밀어붙이며 처음으로 휴전을 이끌어냈고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종전을 맞이했다. 연합군은 미군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1914년에 내준 땅 모두에서 독일군을 밀어낼 수 없었다. 연합군은 솜과 이프르 전투에서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독일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헤이그가 승전국의 지휘관은 맞지만 그가 주장하는 전술/전략적 승리에 많은 비평가들은 동의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돌프 히틀러는 더욱 그랬다. 


종전 후에, 헤이그는 영국정부에게 있어서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대중에게 영웅으로 부각되었고 돈과 명예를 가졌지만 다른 역할은 절대로 맡지 못했다. 

그는 전역병의 이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1928년에 숨을 거두었을 때에는 200,000명의 전역병이 관으로 몰려들었다. 장군은 성에서 잠들고 샴페인을 마시는 동안 병사는 참호와 포탄구덩이의 물 속에서 잠들었는데도 말이다. 


초기의 전기는 찬양일색이었고 헤이그도 저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비판자료가 발간되었다. 서부전선에서 부상을 당했던 유명한 전사가 리델하트Liddell-Hart가 신랄한 비평을 가했다. 


"그는 궁극의 이기주의자이며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지나친 야심을 위해 수 십 만 명을 희생시켰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참모도 배반했고 자신을 임명한 정부도 배신했다. 범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속임수로 목적을 이룬 사람이었다."


아직도 헤이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 참호에서 생사를 오가야 했던 사람도 그를 옹호했다. 그들의 책은 헤이그가 기관총과 전차의 전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며 실제로는 그가 호기심많고 상상력 풍부한 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자신은 조금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를 남기면서 비평가들의 주장에 큰 힘을 실어줬다. 1926년 말, 그가 아직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던 시기에 미래의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남겼다.


"나는 말의 가치를 믿으며 미래에도 여전히 대단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비행기와 전차는 병사와 말을 보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시간이 흐르면 잘 키운 말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유용하게 사용되리라고 확신한다."


기병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솜 전투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기병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비평가들의 말대로 헤이그는 도살자였고 그 이후에도 시대를 거슬러 살아간 바보일 뿐이었다.  



솜 전투에서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영국보병입니다. 영화에서 너무 흔하게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장면입니다.  


솜 전투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서부전선에서 무능한 지휘관때문에 더 많은 희생을 치룬 것은 프랑스였지만 이번에도 영국군 돌격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