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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1차대전

1차대전 러시아의 대공세 - 브루실로프 작전 (2부)

by uesgi2003 2013. 4. 15.

 

북한의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에는 여기를 놀러오시는 분이 하루에 2,500명이 넘었었는데 잠잠해지니까 이제 다시 500명 수준으로 돌아왔습니다. 시선을 확 잡아끌 수 있는 몇 가지 아이템(북한과 남한의 전력비교, 대 북한 공격 시나리오 등)이 있지만 전사와 역사 블로그이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고 못다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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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러시아의 대공세 - 브루실로프 작전 (2부)


중앙에서의 사카로프의 소파노프(Sopanov) 공격이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이 보였지만 기세를 이어갈 지원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강철심장을 가진 보트머(Bothmer)와 독일군 사단에 곧바로 밀려났다. 북쪽과 남쪽의 러시아군은 협공으로 중앙을 궤멸시킬 좋은 기회였지만 마찬가지로 지원병력이 모자랐다. 

궁지에 몰린 오스트리아는 독일 동맹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6월 5일, 오스트리아 참모장 프란츠 콘라드 회첸도르프(Franz Conrad Hotzendorf)는 팔켄하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베르덩에서 3개 사단을 보내면서 오스트리아군이 남쪽의 티롤(Tyrol) 작전을 끝내고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보내야만 독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힌덴베르크와 루덴도르프는 5개 사단을 급히 남쪽으로 내려보냈고 오스트리아에 대공 조세프 페르디난드를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전선의 지휘는 헝가리 장군 카롤리 나다스(Karoly Nadas)에게 넘겨졌는데 제 4군의 절반 이상이 헝가리군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이었다. 


급하게 수혈된 독일 3개 사단과 5개 오스트리아 사단은 러시아 제 8군 돌출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원래 독일군 사단은 남부 위협을 봉쇄할 예정이었지만 중앙에서 러시아 사카로프와 쉬체르바초프의 공세가 워낙 거셌기때문에 급하게 중앙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러시아 제 8군에 파견되었던 영국인 간호사 플로렌스 팜버로우는 버려진 오스트리아 참호에 몸을 피했었는데 참호가 너무나도 잘 만들어진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참호의 한 벽에는 '오스트리아 궤멸! 포로 47,000명! 77문 노획!'이라는 공지가 붙었는데 "신이 난 러시아 병사가 진격하면서 붙인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장교 대피호에는 "의자, 탁자, 그림과 책이 있었는데 심지어 영어 문법 책까지 있었다"라고 말했다. 대피호 전방 멀리에서는 승리에 나선 러시아 병사들의 "우라!" 고함소리가 들렸다. 


레치츠키가 6월 18일에 체르노비츠를 잡았던 남부에서는 부코비나를 점령하고 카르파티아 협로까지 110km를 전진하면서 루마니아를 연합군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그렇지만 독일군이 재빨리 반격에 나서면서 루마니아는 다시 전쟁에서 빠졌다. 

지금까지의 성공에 힘을 얻은 브루실로프는 주력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6월 13일, 알렉세이에프는 에베르트가 예정된 14일에 공격을 시작할 수 없다는 전화를 했다. 악천후때문에 18일로 미뤘지만 에베르트는 또 다른 핑계를 댔다. 몰로데치노의 독일군 방어선이 너무 강력했고 더 남쪽의 바라노비치(Baranovichi)를 공격해도 좋다는 차르의 허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브루실로프는 이 공격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공격 목표를 바꾸면 최소한 6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것으로 서부 집단군의 작전은 끝이 났다"라고 담담하게 결론내렸다. 


알렉세이에프는 에베르트와 쿠로파킨이 독일을 상대로 공세로 나서지 않자 브루실로프에게 병력을 보냈고 브루실로프는 병력 지원을 반대했다. 병력 이동을 관측한 독일군이 철도를 통해 더 빨리 지원군(사진 참조)을 내려보내게 되면 남부의 작전은 교착될 것이었다. 

7월 13일에 코벨(독일군 지원병력이 통과하는 교통 중심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브루실로프의 제 8군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에베르트의 제 3군이 근위군과 함께 브루실로프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근위군은 155,000명을 체격과 지능을 보고 선발해서 특수군이라고도 불렸다. 브루실로프는 지원병력을 제 8군과 3군 사이에 배치시켰지만 비가 오면서 프리페트 습지에 물이 차올랐다. 

습지대의 좁은 통로를 따라 돌격하던 근위군은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8월 8일까지 53,302명을 잃었다. 독일군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비행기를 내려보냈고 러시아의 포병 관측이 봉쇄되면서 보병의 전진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코벨은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브루실로프에게 러시아 전체에서 축하 전신과 편지가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코카서스에서 투르크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대공 니콜라스의 전신이 가장 반가웠다. 그는 "귀관을 축하하며 포옹, 키스와 축복을 보냅니다"라고 했고 차르도 러시아 최고무공훈장으로 하사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볼히니아, 갈리시아와 부코비나 점령을" 치하했다. 쿠로파킨과 에베르트는 더욱 움츠려들어 브루실로프를 견제했다.

브루실로프는 8월과 9월에 계속 공세를 취해서 궁지에 몰린 루마니아를 도왔지만 이미 보강된 독일군과 부족한 병참선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말 두마리가 끄는 수레로 보급을 했다. 작전은 10월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 때까지, 그는 450,000명의 포로와 500문을 대포를 노획했다. 그는 적에게 1백 만 명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고 만약 제대로 지원을 받았다면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었다고 확신했다.

 

브루실로프의 대공세에 놀란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32개 사단을 프랑스, 이탈리아와 동부전선의 북쪽에서 전출시켰고 터키도 2개 사단을 빼냈다. 콘라드의 트렌티노 작전은 취소되었고 폴켄하인의 베르덩 공세도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독일이 맡는 동부전선은 타르노폴 아래까지 넓어졌다. 그 지역을 방어하던 오스트리아 사단은 새 집단군으로 편성된 후에 황제 계승예정자인 카를 대공(1916년 11월에 즉위)에게 맡겨졌지만 참모장은 독일군 한스 폰 젝트(Hans Seeckt)가 맡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지휘는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맡았다. 8월 28일, 팔켄하임은 힌덴베르크로 교체되었고 베르덩 작전의 실패와 동부전선의 위기로 오명을 남긴 팔켄하임은 루마니아를 상대하게 되었다. 콘라드역시 1917년 2월에 교체되었다.

 

러시아도 4개월에 걸친 대공세에서 1백 만 명을 잃었고 다음 해에 벌어질 혁명에 쓰러지게 된다. 차르 니콜라스가 폐위된 후에, 브루실로프는 지방정부에 의해 총사령관에 오르지만 1917년 7월의 마지막 공격이 실패했고 다른 제국군 장교와 달리 차르를 혐오했던 그는 10월 혁명 후에 볼쉐비키 편에 가담해서 적군(Red Army) 기병 감찰관이 되었다.

그는 1926년에 사망해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정원에 안장되었다. 소련은 그의 회고록을 6번이나 발간해 그를 기념했고 독일 역사가 발터 후바취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라고 기록했다.

 

다음은 동부전선 개전부터 상황을 알 수 있는 동영상입니다. 영어 나레이션이지만 화면만 보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