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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그리스

영화 300 제국의 부활, 그 다음 이야기 - 플라타이아 전투

by uesgi2003 2014. 3. 9.


이번 이야기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500년 전의 이야기인데, 목록에 보이는 썸네일 이미지는 비행선이어서 어리둥절하는 분이 많겠군요. 


시대를 막론하고 국방분야는 특수성때문에 온갖 이성이 마비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서 240억이나 투입된 프로젝트가 황당하게 마무리되어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겠군요.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에, 북한의 동태를 24시간 감시하는 전술비행선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정확하게 이런 모습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작년 말에 시험평가 후에 없던 일이 되고 있다죠? 1대는 공기주입 중에 파손되고, 1대는 시험 중에 파손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는 저는 언제나 찬성하고 오히려 권유를 합니다. 전례가 없다... 선례가 없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그런 일 안한다... 기타 등등의 해명은 구태의연한 사람들의 변명입니다. 지금까지 문제가 없었어도 새로운 영역으로의 새로운 시도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 블로그에 소개하는 인물은 주로 그런 변화를 시도해서 국가를 일으킨 분이거나, 변화를 애써 외면해서 수 많은 목숨을 죽인 놈이거나입니다. 


그런데... 이번 건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새로운 협작이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의혹이 무성했지만, 어제 KBS에서 간단한 보도를 했듯이, 


... 이 과정에서 주 계약업체가 입찰 직전 급조된 페이퍼컴퍼니, 이른바 '서류상 회사'인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녹취> 백윤형(방위사업청 대변인/ 작년 12월): "주 계약업체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요. 그래서 협력업체로 들어와 있던 국내 업체가 전체적으로 사업을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방사청 설명과 달리 사업을 넘겨받은 업체 역시 중단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입니다.

성공 가능성을 자신할 수 없는데다 전술비행선 사업이 올해 국방예산에 아예 포함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랍니다. 

페이퍼 컴퍼니에 대해서 잘 설명한 사이트(http://andocu.tistory.com/entry/JDC)가 있어서 그 중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너무 오랜 동안 흔하게 들었던 유형의 업무착오(?)입니다. 우리가 문제의 근원과 책임을 따지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겁니다. 


영화 300 제국의 부활, 그 다음 이야기 - 플라타이아 전투


마라톤(그림참조)과 밀티아데스Miltiades, 살라미스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테르모필레와 레오니다스Leonidas, 이 지명과 인명은 기원전 5세기에 벌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역사를 대표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 역사에 정통한 학자를 제외하고는, 플라타이아Plataea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연히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Pausanias를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페르시아 제왕 크세르크세스Xerxes의 야심에 마침표를 찍은 전투는 아르테시움Artesium과 살라미스 해전도 아니었고, 테르모필레의 전설적인 전투도 아니었으며, 바로 플라타이아 전투였다. 

기원전 479년 여름, 플라타이아 아래의 평원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10만 명의 페르시아군과 그리스 동맹군을 궤멸시키고 동쪽의 제국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가 패하면서, 그리스 북부와 중부 도시국가는 페르시아에게 성문을 열고 협조했다. 특히 테베Thebe는 중무장 호프라이트Hoplite로 페르시아의 경보병을 크게 보강해주었다. 테살리Thessaly 북부평원의 페레Pherae와 라리사Larissa는 그리스 최고의 기병을 공급했다. 심지어 펠로폰네소스Peloponesos(그리스 남부) 중심에서도 크세르크세스의 외교정책에 넘어가 중립을 유지한 도시국가가 많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에서 상상도 못한 참패를 당한 후에 본대를 이끌고 후퇴했다. 그렇지만 그는 절대로 굴욕을 참을 생각도 없었고영광을 그리스 노예들에게 넘겨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리스 진영을 분열시켜서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원정기간 동안 왕과 함께 했던 스파르타 망명객 데마라토스Demaratos는 메디아군의 창끝보다 빛나는 페르시아 황금주화가 훨씬 강력할 수 있다고 조언했었다. 


크세르크세스에 맞서 급조된, 스파르타와 아테네 중심의 연합은 살라미스 해전 직전까지도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아테네는 적에게 내준 고향을 오랜시간 동안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실제로 아테네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도, 결전을 결심하지 않으면 아테네는 전열에서 이탈하겠다고 협박해서 성사된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고 해도 그리스 연합군이 직면한 군사와 정치위기가 해결되지 않았다. 크세르크세스의 본대가 철수했지만 테베, 페레와 라리사는 페르시아 진영에 남았고 크세르크세스는 상당한 기병전력과 함께 10만 명을 뒤에 남겨두었다. 테베와 로크리아Locria 보병 그리고 테살리 기병까지 합치면, 아직도 그리스 연합군의 숫자를 훨씬 넘어섰다. 




100년 후에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테베가 벌인 레욱트라 전투입니다. 막연한 오해 그리고 영화 300의 영향으로 마치 스파르타가 백전불패의 군사력인 것처럼 과장되어 있는데, 스파르타가 패한 전투도 많습니다. 이 전투로 테베가 그리스의 패권을 가져갑니다만 계속된 스파르타와의 갈등으로 국력이 소진되면서 마케도니아가 확장하는 기회를 줍니다. 


기원전 479년 초봄이 되자, 펠로폰네소스 그리스군은 코린트Corinth 지협에 성벽을 완성했고, 아테네 함대는 만약을 대비해 페르시아의 수륙양동 작전에 대비했다. 펠로폰네소스 그리스군은 성벽 밖으로 나가 페르시아와 배반 도시국가를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수비벽 외곽에 위치했고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르도니오스Mardonius(페르시아군 사령관)는 먼저 사절을 아테네 민주의회에 보내 협상을 벌였다. 

사절은 거듭해서 "왕의 뜻을 따르고 함께 번영합시다"라고 권유했다.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은 아테네로 사절을 보내 "계속 저항하고 함께 죽읍시다"라고 권유했다. 아테네 지도부는 마르도니우스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거부했지만 막후에서는 위기와 기회를 끊임없이 평가했다. 


페르시아군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육군을 몰아내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이 요새를 버리고 북쪽으로 진격하게 만들어야 했다. 

마르도니우스는 아테네가 말을 듣지 않자 아테네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다급해진 아테네군은 스파르타 동맹의 도움을 간청했다. 그들은 "우리가 고향을 지킬 수 있도록 동맹의 역할을 다해주시오. 아니면 우리는 다시 생각할 수 밖에 없소"라며 간청했다. 


아테네의 은근한 진영이탈의 협박은 지협에 모인 연합군의 전략전술을 뒤흔들어놓았다. 아테네 함대를 손에 넣은 페르시아는 얼마 안되는 연합함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배후의 어느 곳이라도 상륙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스파르타의 동맹도시를 하나씩 점령한 후에 스파르타만 따로 상대하면 되었다. 헤로도투스도 살라미스 해전에 앞서 아테네 함대가 얼마나 귀중한 지를 강조했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약간의 뜸을 들인 스파르타는 아네테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10,000명의 중무장 보병과 훨씬 더 많은 경보병을 스파르타 왕의 섭정인 파우사니아스와 함께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연합군 도시도 병력파견에 동의했지만 실제로는 스파르타군이 나선 후에야 병력을 파견했다. 그리스 진영이 얼마나 생각이 복잡했는 지를 잘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생존의 순간이 다가왔는데도 말이다. 

코린트, 테게아Tegea, 시키온Sikyon과 같은 큰 도시는 당연힌 많은 병력을 내놓았지만, 작은 도시의 병력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소도시 미케네Mycenae와 티린스Tiryns는 남성시민으로 구성된 400명의 중무장 보병을 보냈다. 모두 30,000명의 중보병과 훨씬 많은 경보병이 지협에 집결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최대 100,000명에 달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중립을 지킨 도시도 많았다. 스파르타와는 오랜기간 동안 숙적이었던 아르고스Argos와 만티네이아Mantineia는 당연했고, 엘리스Elis와 같이 그리스 패권의 변화로 이익을 챙기려는 도시들도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원래 계획은 메가라Megara를 지나 북쪽으로 바로 진격해서 엘레우시스Eleusis의 트리안Thrian 평원으로 페르시아군을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붉은 표시된 곳이 엘레우시스입니다. 코린트 지협 남쪽에서 연합에 참여하지 않은 아르고스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르도니우스는 현명하게도 미끼를 물지 않고 보이오티아Boetia와 테베 방향으로 물러났다. 헤로도투스가 기록했듯이 "아티카Attica를 포기한 이유는 기병을 활용하기 적당하지 않았으며 만약 패한다면 퇴각로가 끊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맹국 테베 근처로 이동해서 두가지를 모두 노릴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마르도니우스가 아테네를 비우기 전에 도시를 불태웠고 수 백 년 동안 그리스의 중심이었던 도시는 잿더미로 변했다. 



강력한 도시국가 테베는 페르시아를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페르시아의 사절을 맞아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리스 동맹의 안내를 받은 마르도니우스는 플라타이아 근처에 안전하게 도착해서 아티카 외곽의 키타리온Kitarion 산의 북쪽 경사면에 자리잡았다. 이곳은 페르시아 기병이 움직이기 알맞은 곳으로 여기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과 결전을 치루기 위해 기다렸다기 보다는 페르시아의 황금으로 지휘관들을 매수해서 그리스 동맹을 와해시킬 생각이었다. 


메가라를 통과하던 스파르타군은 북동쪽에서 올라오는 아티카의 집, 농장과 신전의 불길을 볼 수 있었다. 3,000명의 메가라군이 합류했고 아직 불씨가 남은 엘레우시스를 지나면서 8,000명의 아테네군이 합류했다. 연합군은 마르도니우스를 좇아 북진했다. 그리고 키타이론 산의 반대편 경사면에 자리를 잡았다. 


스파르타 사령관 파우사니아스는 심난한 보고를 받았다. 테베와 테살리 지방의 그리스군이 페르시아 진영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중부와 북동부 전지역의 그리스 도시가 페르시아 편을 들어 병력을 보냈다는 보고였다. 무려 50,000명에 달하는 그리스 병사가 100,000명의 페르시아군에 합류했다. 

중과부적의 열세에 놓인 파우사니아스는 다른 그리스 동맹이 보낸 증원군을 기다리며 방어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멀리 테베에서 보급을 받아야 하는 적의 대군이 그 자리에 버틸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반대로 그리스 연합군은 근처 도시에서 보급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쪽의 엘레우시스 외곽에서도 보급을 구할 수 있었다.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유리한 위치를 알아차리고는 기병을 투입해 밀어내기로 했다. 페르시아 기병의 특기인 투창과 복합 활을 휘두르며 다가온 페르시아 기병은 사거리 내로 접근해서는 한 부대씩 공격하고 뒤로 돌아가 전열을 정비하는 식으로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 연합군은 커다란 방패와 우수한 갑옷으로 무장했지만 페르시아군의 원거리 공격에 피해가 늘어갔다. 더구나 기병의 돌격으로 일어나 먼지로 그리스군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호흡까지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그리스군 대열 중 중앙이 특히 집중공격을 받았고 파우사니아스에게 퇴각을 요청했지만, 사령관은 고지대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아테네 지휘관과 300명의 호프라이트가 절망적인 상황을 구원하겠다고 자원했다. 그리스 궁병의 도움을 받은 별동대가 가까스로 무너지기 직전의 그리스군 대열을 유지시켰다. 그리스 궁병 한 사람이 페르시아 기병 지휘관인 마시스티오스의 말을 쏘아 쓰러트렸는데 먼지 속에서 병사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지휘관은 아타네 창병에게 죽었다.

지휘관을 잃은 페르시아 기병은 시체를 되찾으려고 돌격해왔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던 아테네군은 나머지 그리스군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페르시아 기병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시체를 두고 벌어진 난전 속에서 압박을 받은 그리스군은 시체를 내줬지만, 뒤늦게 달려온 아군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 기병을 물리칠 수 있었다.

페르시아 기병(그림 참조) 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진영으로 돌아가 지휘관의 장례를 치뤘다. 



그리스군은 첫 번째 교전에서 승리를 했지만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에 피해가 컸기 때문에 결국에는 평지로 내려갈 판이었다. 적의 보병이 기병을 지원해서 강 건너에 배치되었다면 그리스 연합군은 전멸했을 것이다. 

연합군은 페르시아 기병의 공격을 막아내고 물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 했다. 파우사니아스는 플라타이아에서 1.5km 떨어진 가르가피아Gargaphia 샘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스캔해서 편집해야 하는데, 그냥 폰 사진으로 대체하고 필요한 설명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황을 알 수 있는 지도이니까 최소한의 설명은 잘 보셔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의 1차 위치 (오른쪽 중앙) : 파우사니아스가 키타이론 산에 오르자, 아소포스Asopos 강 건너의 페르시아군 진영이 보였다. 그는 즉시 방어태세를 갖추고 그리스 응원군의 도착 그리고 보급로가 늘어진 페르시아군의 동요를 기다리기로 했다. 

마르도니우스는 지체하지 않고 경기병을 보내 그리스군을 몰아내려고 했다. 페르시아군의 공격이 유효했지만 기병 지휘관을 잃으면서 공격을 중단했다. 그리스군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스 연합군의 2차 위치(왼쪽 중앙) : 파우사니아스는 큰 피해를 입은 연합군을 집결시키고 적의 기병이 공격하기 어려운, 개울 등이 얽힌 평지로 이동했다. 마르도니우스는 곤란한 위치에 웅크린 그리스군을 8일 동안 지켜보며 고민했다. 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동안 그리스 응원군이 도착하면서 양쪽의 전력이 비슷해졌다.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군의 보급로를 끊고 가르가피아의 샘을 더럽혀서 그리스군을 몰아냈다. 


그리스 연합군의 3차 위치(왼쪽 아래) : 그리스군은 피해가 늘어났고 보급이 심각해졌다. 파우사니아스는 밤을 틈타 뒤로 물러나기로 결정했지만 어둠 속에서 연합군이 분산되었다.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군의 전열이 연결되기 전에 총공격을 가하면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이후 벌어진 백병전에서 스파르타와 테게아군은 페르시아군을 궤멸시키며 마르도니우스를 죽였고 아테네군은 대역전승을 거뒀다. 


마르도니우스는 신중하게 그리스군의 새 진영을 검토한 후에 8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강건너에서 볼 때에, 스파르타와 테게아 팔랑스를 향해 올라가며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강을 건너 평지에 집결하다가는 도중에 그리스군의 공격을 받기 쉽상이었다. 마르도니우스가 서쪽으로 더 이동해서 그리스군의 좌익으로 도강한다면 스파르타군보다 강에 더 가까이 있던 아테네군이 도강하는 페르시아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 


마르도니우스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파우사니아스도 같은 이유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강 건너편 평지에 있는 페르시아군 진영은 그리스 보병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다. 도강하는 도중에 강력한 페르시아 기병이 가만히 있을리 없었다. 그래도 매일 그리스 응원군이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파우사니아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주일이 지나자 양쪽의 전력은 비슷해져갔다. 


이제 마르도니우스가 움직일 차례였다. 그는 건너편에서 매일 늘어나는 그리스군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두었다가는 페르시아 진영의 그리스군이 이탈하거나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이미 로크리스의 반란군이 정찰병을 공격하고 늘어진 보급로를 위협했다. 이번에도 페르시아군의 장기인 기병을 동원하기로 했지만, 양동작전을 쓰기로 했다. 한 부대는 그리스 연합군의 정면을 공격하고 다른 부대는 측면으로 돌아 그리스 응원군과 보급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페르시아군의 양동작전은 심각한 위협이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가르가피아 샘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2일 동안 공격을 받은 파우사니아스는 플라타이아 북동쪽으로 이동해 물과 보급을 구하기로 했다. 원래는 어둠을 틈타 조용히 퇴각하려고 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법이다. 

그리스 중앙이 먼저 이동했지만 목적지가 아닌 플라타이아 성벽 근처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스파르타군 중 일부는 적을 앞두고 퇴각할 수 없다고 항명까지 벌였다. 테게아군은 아테네군에게 자신의 옆으로 이동하라고 제 때에 전달하지 못했고 페르시아군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페르시아 정찰병은 연합군의 이동을 알아챘고 마르도니우스는 황금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산된 그리스군을 향해 전병력을 투입했다. 


테베의 중보병 팔랑스가 아테네군에게 달려들면서 퇴각하지 못하게 막았다. 우익에서는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아몸파레토스Amompharetos(후퇴를 거부했던 스파르타 지휘관, 아래 그림은 항명하던 장면)도 페르시아 대군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동료를 향해 후퇴했다. 



퇴각하라는 지휘관의 말에 항명하는 아몸파레토스입니다. 영어식 발음과 그리스식 발음이 틀려서 일화를 찾아내는데 고생했습니다. ㅡ.ㅡ 여기서 자랑 한 마디하면... 제가 찾을 수 있는 한은 오류를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스도 당연히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북부 지방이 보유했고 아테네 등의 기병은 그림과 같이 많이 빈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림은 플라타이아 전투로 부터 40년 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군의 좌우익은 서로 단절된데다가 숫자가 많은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더 이상 전략전술을 논할 때가 아니었고 파우사니아스는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제는 개별 병사의 무장과 훈련이 더 중요한 때였다. 페르시아 우익에서는 경보병이 제 역할을 다해주었고 큰 방패 뒤에서는 화살세례를 스파르타와 테게아 팔랑스에게 끊임없이 퍼부었다. 

파우사니아스는 돌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기다렸다. 적의 공격이 거셌지만 아직 결전의 순간은 아니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병사가 죽었고 더 많은 병사가 부상을 당했는데...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이 크게 동요할 정도로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스파르타 병사는 자신의 운명이 테르모필레에서 죽어간 동료신세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에 테게아군이 함성을 지르며 적에게 돌격해들어갔고 스파르타군도 지체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은 마치 전장에 있는 것과 같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 먼저 큰 방패의 장벽을 두고 격전이 벌어졌다가 장벽이 무너지자 고통스러운 백병전이 벌어졌다.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의 창을 붙잡고 부러트리려 했다. 페르시아 병사의 용기와 힘은 적과 다를 바 없었지만, 무장, 훈련과 백병전 기술에서 상대가 안되었다. 이곳에서는 홀로, 저곳에서는 10명씩 스파르타의 전열에 쓰러졌고 그렇게 죽어갔다. 


마르도니우스가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의 전의는 사라졌고 스파르타군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며 학살했다. 페르시아군은 진영에 되돌아가 전열을 정비했지만 이번에는 좌익에서 테베군을 궤멸시킨 아테네군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방책을 사이에 두고 길고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끈질긴 아테네군은 결국 방책에 틈을 내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학살에 가까웠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100,000명의 페르시아군 중에 43,000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페르시아 진영의 그리스 도시는 더 이상 페르시아 편에 서서 참전하지 않았다. 그리스 연합군의 피해는 1,000명이 안될 정도로 가벼웠다. 



초중반에 집중공격을 당했던 그리스군의 피해가 너무 가벼워서 이해가 안되실텐데... 창과 칼로 전투를 벌이던 당시에는 대부분의 병사가 공포에 질려 있거나 살아남을 생각만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초반의 힘겨루기에서 승패가 갈릴 때까지의 희생은 의외로 얼마 안되고 포위되거나 무질서하게 달아나다가 추격을 받아 아니면 포로가 되어 처형되는 피해가 훨씬 컸습니다. 


플라타이아전투는 전력이나 전술과는 거리가 멀었고 빈약한 무장을 한 적을 상대로 무장과 훈련이 잘된 군대가 승리한 것뿐이다. 그렇지만 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패했다면 그리스 도시국가는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다. 그리스 연합군이 대승을 거둔 덕분에 수 백 년 동안 그리스의 독립은 위협받지 않았다. 



PS. 그리스 역사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오는 질문은 과연 그들이 그렇게 무장을 잘 했을까? 입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문화유산을 보면 그리스 전사는 거의 대부분이 나체입니다. 실제 기록에서도 나체인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지어 중보병인 스파르타조차도 나체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날 때에 좀 더 알아보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페르시아의 당시 전차사용에 대한 질문이 있어서 그 당시에 사용했던 전차 그림을 추가했습니다. 



페르시아의 공성탑을 현대에 재현한 모습입니다. 아마 이란혁명 전에 있었던 이벤트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