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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폴란드 독립을 위한 마지막 투쟁(1부)

by uesgi2003 2014. 4. 23.


비록 전쟁사에 치우쳤지만, 제 블로그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리더십입니다. 2차대전과 같이 인물과 상관없는 통사를 정리하기도 하지만 리더십의 차이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그리고 세계의 역사가 뒤바뀐 이야기도 많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보통 루마니아는 신의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았다고 하죠. 살기좋은 영토와 천연자원(석유와 가스)은 가졌지만 리더는 가지질 못했다는 농담입니다. 

우리도 세계 어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국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내심과 교육열이 높아서 위기를 딛고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렇지만 리더만큼은 루마니아의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특히 탐욕스러운 이명박씨와 황족을 자처하는 박근혜씨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다음부터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 협의해서 잘 해야 합니다"라며 선문답하는 도인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책임을 묻겠습니다"라며 유체이탈을 하는 철부지도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방향을 제시하고 책임을 지며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역사 속 리더의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폴란드 독립을 위한 마지막 투쟁


1794년, 미국독립 영웅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sciuszko가 이끄는 폴란드 애국자들이 일어나 중앙유럽의 강대국들과 싸웠다. 독립국가 폴란드의 운명이 걸린 투쟁이었다. 

18세기가 열릴 때만 해도 폴란드는 유럽 강대국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복잡한 내정은 외국의 개입을 불렀고 18세기 후반부터 급속하게 몰락했다. 1772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프로이센)와 러시아가 폴란드 영토분할에 합의했다. 내정에서도 힘이 없었던 스타니수와프 2세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Stanislaw Poniatowski(1732-98)왕은 막을 힘이 없었다. 1793년, 세 나라는 폴란드의 저항이 두려워 분할을 다시 결정했다. 


1793~94년 겨울은 폴란드에게 잔혹한 시기였다. 국민은 화가 났고 각자 살길을 찾아나섰다. 부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작센으로 이민을 갔고 도시는 굶주렸다. 폴란드는 40,000명의 외국군대의 보급품을 내놓아야했다. 수도 바르샤바의 은행 6곳이 도산했다. 러시아 편을 들었던 사람들은 타르고비카Targowica 연합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1729-96)의 후원을 받았다. 고통을 받던 국민은 연합을 증오했다. 



1792년 러시아와 프러시아의 침공로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애국자들은 스타니수와프 왕과 연합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주변 군주국의 침입을 시민군이 막아냈다. 프랑스 공화국은 가능하고 폴란드 공화국은 왜 불가능한가?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1746-1817) 중장이 앞장섰다. 그는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지만 폴란드에서는 임관에 필요한 돈을 내지 못했고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할 프랑스 자원병부대에 합류했다. 1777년, 코시치우슈코 대령은 사라토가 전투에서 호라티오 게이트 준장의 공병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폴란드로 되돌아와 농사일을 했다.

두 번째 분할 후에 작센으로 쫓겨난 그는 조국을 억압하는 강대국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폴란드 외곽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켜서 러시아군을 유인할 계획이었다. 러시아군이 봉기를 진압하려고 움직이면, 그는 군대를 모아 총봉기로 몰고 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 여제는 봉기 움직임을 포착하고 즉시 대응했다. 그녀는 용의자 모두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1794년 2월에는 폴란드주재 대사에게 폴란드 정규군의 규모를 줄이라고 다시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이겔스크롬Igelstrom 후작은 3월에 폴란드군을 15,000명 수준으로 줄였다. 그렇디만 실직한 병사들이 다른 일거리를 찾으며 폴란드를 배회하면서 저항의 불길을 더욱 커졌다. 민간인으로 돌아온 군인은 바르샤바에 몰려들었고 바르샤바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되었다. 이겔스트롬은 주차별 체포로 대응했다. 


재외 폴란드 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코시치우슈코는 폴란드군이 완전히 와해되기 전에 행동에 옮겼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이겔스트롬이 안도니 마달린스키Madalinski 여단장에게 여단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마달린스키는 거부했다. 스타니수와프 왕이 개입해서 마달린스키에게는 유혈사태를 피하자고 애원했지만 역시 무시당했다. 마달린스키는 여단을 이끌고 크라코프Krakow로 가서 도시를 해방시켰다. 

시민군이 크라코프로 몰려들어 군대에 합류했다. 스타니수와프는 예카테리나에게 지금의 명령 불복종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설득하는 동시에 바르샤바 시민에게는 마달린스키의 반란에 동참하지 말라고 선포했다. 



스타니수와프 2세입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선출왕(영주들의 선거로 선출되는 왕)이었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지지도 못했고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이미 강대국에게 휩싸인 상태였습니다. 

마치 구한말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은데, 폴란드 역사학자 중에도 동정론을 가진 의견이 있습니다. 3개국 중에서 러시아를 '좀 더 선한 악'으로 판단하고 의지했지만 러시아는 폴란드 분할을 선택했씁니다. 

1795년 10월에 3차 폴란드 분할이 결정되자 러시아의 폐위요구를 받아들였고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인질이 되어 러시아의 연금으로 살아갔습니다. 


코시치우슈코는 봉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지도자와 함께 폴란드로 잠입했다. 3월 23일, 코시치우슈코는 크라코프에 들어가 지휘권을 잡고 정규군과 좋은 관계인 스타니수와프 피세르Fiszer 소장을 참모로 임명했다. 

1794년 3월 24일, 코시치우슈코는 아침미사에서 신부에게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는 시장광장으로 가서 '크라코프 시민의 봉기행동강령' 선언문을 읽었다. 

그는 머리에 깃털 하나를 꽂은 전통의상을 입고 맹세를 했다. 

"저,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는 신과 폴란드 국가 앞에, 국토수호, 국가독립과 자유를 위해 주어진 권한을 사용할 것이며 개인이익은 바라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니 신의 은총을 바랍니다."



맹세하는 장면인데, 이 그림은 본문 설명과 달리 전통의상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크라코프에는 독립의지가 흘러 넘쳤다. 그의 뒤를 따라 시민은 "수치스러운 굴욕과 억압에서 독립하거나 죽어서 한 줌의 흙이 되겠다"는 맹세를 했다. 이제 코시치우슈코가 모든 권력을 쥐게 되었다. 그는 독립군에게 "자유, 무결과 독립"이라는 슬로건을 주었고 폴란드 공동체의 모든 시민은 폴란드의 자유를 위해 봉기하고 동참해 줄 것을 선포했다.


크라코프의 독립열기는 대단했지만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시민들에게 공화국 수호를 부탁할 수 있었지만 폴란드에서는 크라코프의 봉기를 엘리트 계층의 반란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반 국민은 이들의 독립약속을 경계했고 코시치우슈코는 일반 국민의 신뢰부터 얻어야 할 판이었다. 

폴란드군도 코시치우슈코의 기대와 다른 형편이었다. 27,000명은 전부 분산배치되어 있었고 우크라이나의 14,000명은 2차 분할때에 포로가 되었다. 일부 부대는 탈출해서 독립군에 합류했지만 많은 병사가 붙잡혀서 처형당했다.


미국독립전쟁에서 13개 식민지가 했던 것처럼, 크로치우슈코는 시민군을 만들어 정규군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는 "먹여살리고 지켜야 할 조국"을 위해 무장하라고 농민에게 호소했다. 폴란드식 대형낫으로 무장한 농민군이라도 앞으로의 전투에 필요했다. 낫은 날을 달군 후에 위로 펴서 창처럼 사용할 수 있게 했는데, 농민은 평소에 사용하던 도구라 전투에서도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제가 즐겨하는 마운트 앤 블레이드 게임에서도 대형 낫을 휘두르는 민병이 등장해서 가져와봤습니다. 이 모습과 비슷합니다. 물론 게임에서는 가장 약하지만요.


그리고 18~40세의 모든 남자를 징병해서 매일 창과 낫을 사용하는 훈련을 시텼다. 그리고 농민의 옷을 입고 그들과 연대감을 표시했다. 


봉기가 터지자, 예카테리나는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29,000명의 병사와 국경에 미리 배치해둔 30,000명을 동원했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폴란드 주둔 8,000명 외에 14,500명을 증원했다. 이겔스트롬 장군은 이 병력을 동원해서 봉기확산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바르샤바 거리를 러시아군으로 채우고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크로치우슈코는 4,000명의 정규군과 2,000명의 농민군을 모아 바르샤바로 향했다. 4월 4일, 러시아군의 알렉산드르 토르마솝Tormasov 준장이 라클라비체Raclawice에서 폴란드 독립군을 막았다. 그는 선공을 선택해 폴란드군 양쪽으로 병력을 보냈지만 폴란드군은 협공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토르마솝은 폴란드군 배후로 병력을 돌려 포위하려고 했다. 크로치우슈코는 제6 보병연대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320명의 농민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미국참전 경험을 잘 살려서 농민군을 골짜기에 숨겨 러시아 포대로 들키지 않고 접근했다. 농민이 쏟아져나와 200m 정도 떨어진 러시아 포대로 달려가자 러시아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치열한 백병전 도중에 농민병사들이 러시아군 포의 도화장치에 못을 박아 무용지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포대가 무너지고 중앙이 위협을 받자, 토르마솝은 전장에 대포 11문과 코사크 깃발을 남기고 달아났다. 첫 번째 승전소식은 전국에 퍼지면서 독립움직임에 불을 질렀다. 


4월 17일,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의 진압에도 불구하고 봉기를 했다. 24시간 동안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이겔스트롬 장군은 4,000명의 시체를 뒤로 남기고 달아났다. 스타니슈와프 왕은 난감한 처지가 되었다. 



승리한 폴란드 독립군이 노획한 러시아 대포 11문을 크라코프로 가져와 승전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많은 병사가 대형낫으로 무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리에서 러시아군이 사라지자, 바르샤바 시민은 타르고비카 연합에게 분노의 눈길을 돌렸다. 군중은 연합을 매국노라고 부르며 붙잡는대로 처형했다. 그리고 왕궁으로 몰려가 왕이 보호하고 있는 매국노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바르샤바가 혼란상태로 빠진 반면에 봉기는 계속 번져나갔다. 리투아니아 수도에서는 야쿱 야신스키 대령이 러시아 수비대를 공격해 도시에서 몰아냈다. 프랑스 자코뱅Jacobin의 영향을 받은 야신스키는 왕정전복과 타르고비카 연합해체를 요구했다. 그는 '리투아니아 국가봉기 행동강령'을 읽은 후에 바르샤바와 같이 매국노로 지목한 사람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5월 7일, 크로치우슈코는 라클라비체 승리에서 힘을 얻어 농민의 자유와 노동조건 완화를 발표했다. 그는 국민의 평등을 강조하는 동시에 평민이 독립군에 합류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의 발표는 그리스 동방정교, 기독교, 유대인, 코사크족과 리투아니아 민족의 환영을 받았지만 부유층과 카톨릭 교회는 위협으로 간주하고 협력을 거부했다. 


그래도 150,000명이 그의 호소에 응답했지만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무기는 대형낫이 고작이었다. 예카테리나는 폴란드 봉기를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당으로 간주하고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했다. 



라클라비체에서 승리한 농민군이 기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