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보덴플라테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느 전투비행단이 어디 비행장을 공습하고 몇 시에 어디로 돌아오고 식으로 나열하다 보면 많은 분들에게 거의 의미가 없어지고, 그것을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이미 그 정도의 자료는 충분히 가지고 있거나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보덴플라테 전투보다는 독일공군의 패전으로 향하는 길을 설명할까 합니다.
서론이 길어지다 보니 내용도 많이 길어질 겁니다. 인터넷 짜깁기나 소설이 아닌 나름대로의 영문자료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시간 여유를 가지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루프트바페의 종말
빗자루 마이어
1939년 루프트바페가 조직되면서, 괴링과 다른 공군장성들은 독일의 상공은 어떤 위험이 닥쳐도 정밀한 조준기와 사격통제 시스템을 갖춘 대공포망과 약간의 전투기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대전이 터지기 전에 괴링은 "단 1기의 폭격기라도 독일에 침투한다면, 나를 마이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빗자루를 국민이 보는 앞에서 먹어버리겠다"라고 장담할 정도였다.
그림 설명: B-17 폭격기를 요격하는 Me-262 제트기. 그림에서는 멋진 포즈를 위해 마치 호위하는 것처럼 나와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렇게 사이좋게 커플 샷을 찍을리 없죠.
그러나 이런 장담과 달리, 1940년 8월 26일에 영국 폭격기가 베를린을 보복폭격하는 개가를 올렸고, 이 덕분에 한동안 '빗자루 마이어'라는 별명이 퍼지기도 했지만 독일국민은 여전히 괴링을 믿고 있었다.
1942년 여름, 독일 대공포부대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기종의 폭격기를 격추시킨다. 이 기체는 4발 엔진의 전술 폭격기인 B-17 플라잉 포트리스로, 높은 고도에서 빠른 속도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체였다. 기존의 다른 폭격기와 달리 사방이 대구경 기관총으로 덮여 있어 독일 조종사들의 충격은 대단했다. 괴링은 부대를 순시하며 독일 조종사들에게 분투를 당부해야 할 정도였다.
그림 설명: 빗자루 마이어, 괴링원수. 사진기술인지 몰라도 그 당시 독일군들의 사진은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독일공군 사령부는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았고 오직 일부만이 1942년 독일에 투하된 폭탄이 지난 2년의 2배를 넘어서고 있다고 경고할 뿐이었다. 1943년 1월 27일 미 8공군의 플라잉 포트리스가 전투기 호위도 없이 빌헬름샤벤의 해군기지를 최초로 주간 공격했고 너무나도 놀란 사령부는 야간 전투기까지 띄워 요격에 나섰다. 독일제국의 10주년인 1월 30일에는 괴링이 라디오 연설을 하는 순간 영국 공군의 모스키토 중폭격기들이 베를린 상공에 나타나, 괴링은 경축일 하루 종일 방공호에 숨어있어야 했다.
혼란스럽고 무능력했던 독일공군 사령부와 달리, 독일본토 폭격이라는 연합군의 의도는 점점 분명해져 갔다. 5월 4일에 독일공군 조종사들은 다시 한 번 경악하게 된다. 연합군 폭격기에 P-47 선터볼트 호위가 붙기 시작해서 이제 폭격기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호위기의 장막을 뚫어야 했는데, 이미 역전의 조종사들이 거의 소진된 독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독일상공은 더 이상 루프트바페의 것이 아니었으며 연합군은 약간의 피해만 감수한다면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두들길 수 있게 되었다. 5월 26일 영국공군은 2,000톤의 폭탄으로 뒤셀도르프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그 다음 주에는 부펠타를 폭격해 2,500명의 사망자와 100,000명의 이재민을 만들어냈다.
독일을 구해낼 신무기로 기대했던 Me-262 제트기가 조종사의 손에 넘겨졌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 해 여름, 동부전선에서의 마지막 도박이었던 쿠르스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모든 예비전력을 소진시켰고, 이탈리아 시실리에 연합군이 상륙했다. 그리고 폭격기들은 독일의 중소 도시들을 지도에서 하나씩 지워나갔고 히틀러의 쉰 목소리는 매일 전화에 울려퍼졌다.
괴링은 일기에서 "기술, 숫자, 사기, 조종사,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든 자원이 부족하다. 어느 한 군데에 집중할 수가 없다. 질적으로도 열악하기 때문에 모든 전선에서 밀리고 있다. 공군력이 관건이다. 나의 현재 임무는 공군력을 재정비하고 기술목표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흔들리는 사기를 다시 높이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괴링과 뛰어난 과학자들 덕분에 새로운 기종의 전투기와 매월 1,000대의 비행기가 전선에 공급되었지만 독일 상공만 지켜내려고 해도 최소한 두 배의 비행기가 필요했다. 연합군은 이미 '윈도우'라고 부르는 레이더 교란용 금속조각(채프)을 사용해 독일 레이더망을 무력화시켰고, 6월 28일 영국공군은 함부르크를 소이탄으로 폭격해 26,000명의 불탄 시체를 남겼다.
공군 사령부 vs 히틀러
공군 사령부의 지배적인 의견은 폭격기보다 전투기 생산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독일 폭격기를 담당하고 있던 디트리히 펠츠까지도 이 의견에 동의할 정도였다. 루프트바페의 아버지라고 불린 아돌프 갈란트는 다음과 같이 당시 상황을 말하고 있다.
"나는 루프트바페를 책임지고 있는 장성들이 이처럼 한결같은 의견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함부르크 참사가 영향을 주기도 했겠지만,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야심이나 파벌을 잊어버렸다. 참모, 군수국, 폭격기와 천투기의 대립이 사라졌고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와 한 시간 가량의 회견을 마치고 돌아온 괴링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의 모습은 마치 교장실에서 꾸중을 듣고 나온 어린아이와도 같았다고 한다.
"총통이 나의 실수를 깨우쳐주었소. 총통은 언제나 올바른 결정을 내립니다. 연합군 놈들에게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펠츠장군. 당신은 영국을 폭격할 공격군을 지휘하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하게 모자라는 공군전력을 동원해 카프리콘 작전이 시작되었고 첫 주에 57기의 폭격기와 귀중한 조종사를 잃었다. 지중해, 프랑스, 폴란드 등지에 분산된 독일공군과 달리, 미8공군은 이제 한 번의 공습에 200~300대의 폭격기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8월 17일의 메서슈미트 공장폭격에 이어 다음 날에는 V2 로켓 시험공장을 잿더미로 만들어, 런던공습에 사용될 비밀병기가 몇 개월 더 지연되었고, 700명 이상의 귀중한 과학자와 기술자들도 폐허 속에 파묻혀버렸다.
또 다시 베를린이 공습을 당해 100,000명이 죽자, 독일공군은 결국 러시아와 이탈리아에 있는 최전선의 전투기를 모두 불러모았고 전차와 같은 지상무기보다 대공포와 전투기 생산에 자원을 우선투입하게 된다.
가을이 되자 공군 사령부의 노력이 빛을 보기 시작한다. 새로운 SN-2 라히텐슈타인 레이더와 야간 전투기 전술로 영국공군의 폭격기 부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혀서 영국공군은 베를린 공습을 중단하게 된다. 10월 14일, 300대의 B-17이 쉬바인푸르트와 로젠스버그의 볼 베어링 공장을 공습하지만, 독일공군 조종사의 초인적인 무한리필(요격 후에 부대와 상관없이 가까운 비행장에 내려 대기 중인 다른 전투기를 타고 재출격) 전술에 121대 격추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독일의 피해는 14대의 전투기만을 잃었을 뿐이고 연합군은 이제 호위가 붙지 않는 모든 공습을 중단한다.
상황이 조금 호전되면서 독일의 비밀병기들이 속속 전열에 참가하게 된다. Me-262의 여섯 번 째 개량모델과 Me-163 로켓 요격기(전편의 캇핏 소개 참조)가 대량생산에 돌입했꼬 폭탄을 장착하고도 전투기보다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Ar-234와 Ju-287 제트 폭격기의 원형이 공장에 도입되었다. 그리고 탄도 미사일인 V1과 V2가 프랑스에 배치되어 발사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히틀러의 영국본토 폭격이라는 집착때문에 공군 사령부는 다시 한 번 좌절을 겪게 된다.
"50mm 포를 장착한 Me-410 중전투기는 어떻게 된거야? Fi-103 순항 폭탄이 런던을 폭격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나? 왜 폭탄이 실리지 않는 Me-262를 내게 보여주는 거야? 나는 전투기 형태의 비행기는 보고 싶지 않아! 신형은 모두 폭격기로 만들 것을 명령한다!"
그림 설명: Me-163 코멧에 탑승하고 있는 독일 조종사. 아마도 죽음으로 이르는 관에 들어가고 있는 기분일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본문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에스기 왈: 소련의 T-34를 왜 대전 최고의 전차로 치는지 아시는지요? 공수주 3박자를 갖춘 최고의 전차는 당연히 독일의 판더(Panther)입니다만, 생산이나 학습 면에서는 T-34를 따라갈 전차가 없었습니다. 신무기 하나의 성능이나 혁신은 높이 살만 합니다만, 그 당시 독일처럼 모든 자원공급이 봉쇄된 상태 - 심지어 전차의 휠에 끼울 고무가 없어서 모든 전차가 철제 휠을 그대로 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음이나 고장이 대단했죠- 에서 신무기에 막대한 자원이 투입된 것은 절대로 효과적이지 않았습니다.
V1, V2 탄도 미사일이 연합군에 주는 심리적 공포는 컸지만, 그보다 전선에서는 단 몇 문의 대전차 포가 더 필요했고 단 몇 대의 전차가 더 필요했습니다. 아니, 적중율이 크게 떨어지는 탄도 미사일이 해협을 건너 날아가는 동안 사용하는 연료라면 전장에서 연료가 바닥난 전차의 엔진에 흙을 붓고 떠나는 전차병이 줄었을 것입니다.)
Me-262 전투기를 대량생산해서 폭격기를 요격했다면 전쟁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당시 상황은 이미 그런 수준을 넘어선 패전 직전의 상황이었다.
먼저 제트기는 아무나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훈련을 받은 조종사만이 이 신형 제트기를 몰 수 있었는데, 1944년 중반에는 각 일선부대의 편대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조종사가 신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월 1,000기를 생산해도 기껏해야 100기만 출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합군의 지속적인 공습으로 거의 모든 산업생산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기체에 사용될 부품이나 연료가 기준에 크게 못 미쳤고 그나마도 제 때에 공급되지 않아 실제 가동률은 크게 낮았다. 마지막으로 연합군은 이미 신형 제트기에 필적할 수준의 P-51 머스탱을 호위기로 투입하고 있었고 조종하기 쉽고 무장이 훨씬 강력한 머스탱으로 Me-262를 격추시킨 전과가 많다. 1944년 11월 8일, 전설적인 에이스 노보트니도 머스탱에 격추되어 전사했다.
환상의 커플, B-17과 P-51
갈란트가 우려했던 대로 장거리 전투기인 머스탱이 등장하면서, 강력한 파트너를 만난 B-17 플라잉 포트리스는 더 이상 주간폭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머스탱은 호위역할뿐만 아니라 심지어 비행장 공습까지도 담당하기 시작했다.
1944년 2월, 미 8공군은 '대단한 주간' 작전에서 독일 내의 모든 비행기 조립공장을 폭격해서 75%를 잿더미로 만들어, 루프트바페의 운명도 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 군수국의 슈페어와 사우르는 극단적인 조치로 생산을 오히려 증가시켰다. 모든 공장은 지방으로 이전되었고 엄격한 생산 목표량이 할당되었다. 더 이상 폭격기를 생산하지 않는 대신에 전투기에 집중시켰고 제트엔진과 동체는 지하공장에서 생산되었다. 히틀러도 Me-262를 제외하고는 전투기 생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 올해 안에 독일상공에서 폭격기를 내쫓겠다는 공군의 프로젝트가 100% 완수되어야 한다. 나는 전차와 돌격포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국의 상공을 전투기로 덮어야만 한다."
이 당시 일본은 가미가제라는 극단적인 자살공격을 펼쳤는데, 이 보다 더 심각한 독일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분이 많을 것이다. 물론 독일에서도 하나 라이히라는 여성 테스트 조종사가 자살 비행단 지원자를 모집해서 연합군 선단을 폭약 비행기로 충돌시키자는 주장을 했고, 하인리히 히뮬러는 지원자 대신에 범죄자를 사용해서 실험중인 Me-328 비행폭탄을 날려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은 독일민족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히틀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영국공군이 재개한 야간공습은 250기 정도의 야간 전투기의 요격을 받아 96기의 폭격기가 격추되어 다시금 출격이 중지되었지만, 호위기가 붙는 주간폭격은 그 맹렬함을 더해갔다. 강력한 롤스로이스 엔진과 보조연료 탱크로 독일 본토까지 호위할 수 있게 된 머스탱덕분에 폭격기의 요격은 더욱 힘들어졌고, 아전에는 1:5의 비율이었던 피해가 이제는 거의 1:1로 변했다.
(우에스기 왈: Bf-110과 같은 쌍발전투기는 원래 설계목적과 달리 영국상공에서 전투기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해서 퇴출되었었지만, 야간 레이더와 강력한 무장을 장착한 후에는 야간 전투비행에 상당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특히 동체 중간에 Shrage Musik-경사지게 설치되어 상방으로 발사되게 장치한 기관포-를 장착한 다음부터는 폭격기의 대공 기관총이 없는 하부를 훑고 지나가면서 기관포를 발사해 폭격기를 격추시켰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폭격기 요격은 어려운 임무였고 폭격기 한 대는 전투기 6대 격추와 맞먹는 전과로 기록됩니다.
전설적인 88mm 전차포가 원래는 대공포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장거리 사격용이었으니 대전차포로 워낙 탁월했고 별다른 대전차포가 없었던 일선에서 용도변경하면서 대전차포로, 그리고 전차포로 자리를 잡게 된 거죠.
독일 상공은 대공포로 뒤덮었을 텐데도 폭격기들의 피해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까요? 채플과 같은 교란전술도 있고, 워낙 고고도로 비행하기 때문에 조준사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충 고도를 맞춘 지연신관으로 쏴대다 보니 거의 적중되지를 않죠. 그래서 다음과 같은 독일 방공포에 대한 유머가 있을 정도입니다.
어느 날 연합군 조종사가 격추되어 낙하산으로 탈출했다가 공장 굴뚝에 걸렸다고 합니다. 워낙 증오가 심했던 터라 방공포 부대는 그 조종사를 방공포 훈련으로 사용하기로 합니다. 결과는???
명중률이 너무 낮아서 결국 조종사가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그림 설명: 아름답지만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독일상공을 수놓은 방공포 사격입니다.
동영상 설명: 요즘에는 별 자료가 다 있습니다. Bf-110이 동체에 장착된 기관포로 B-17을 잡는 그래픽 재현입니다. 그래픽 구현한계로 캇핏에 있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후방 기관총 뒤편의 동체에 숨어 있습니다. 일본도 이걸 가져다 B-29 요격에 사용해보려고 했지만 기체제작 기술이 크게 뒤떨어져서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참고로 일본은 Me-262도 잠수함에 싣고 가져갔지만 엔진제작이 불가능했죠.
Bf-110 야간 전투기의 비밀무기 Shrage Musik의 위치입니다.
1944년 6월에는 530대의 연합군 비행기를 격추시키면서 독일도 384대가 희생되어 출격하는 비행기의 11%가 피해를 입었으며 그나마 얼마 없던 숙련된 조종사가 소진되면서 9월에는 307대의 연합군 격추에 371대를 잃어 그 수치가 역전되었다.
이 순간에도 히틀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과 달리 Me-262가 전추기로 생산되는 것을 발견한 히틀러는 광분을 했다.
"누가 도대체 내 명령을 무시하는 건가?"
"총통각하. 어린 아이도 이것은 전투기이지, 폭격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62는 겨우 500kg의 폭탄을 연합군의 머리 위에 떨어뜨릴 수 있지만, 전투기 역할을 한다면 매일 수천 톤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는 적의 폭격기를 가볍게 격추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히틀러에게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려고 했던 슈페어는 거의 얻어 맞을 뻔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틀러는 Me-262를 전투기로 부르는 것 자체를 금지시킨다.
순간의 선택, 아르덴느 반격전
독일전체가 우려하던 연합군의 상륙이 노르망디에서 이루어졌다. 상륙하는 적군을 대규모 항공단으로 바다 속으로 수장해주겠다던 히틀러와 괴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겨우 2대의 무모한 전투기 만이 기총소사를 하다 쫓겨갔을 뿐이다. 히틀러는 그 시간에 잠을 자고 있었는데 아마도 감히 깨우려 하지 않았으며 괴링이 사냥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상륙이 끝난 후였다.
붕괴하는 독일 지상군은 연합군 전폭기에게 더 없이 쉬운 사냥감이었다.
"후퇴하는 독일 차량이 가득했으니, 그냥 도로 아무데나 갈기기만 하면 되었다. 탄약이 바닥날 때까지 도로를 따라 언덕을 넘어 선회를 하면 돌아오는 길에는 모든 도로가 불타오르는 차량으로 뒤덮여있었다."
그림 설명: 도로의 독일군 차량을 공습한 미군의 중형폭격기. 히틀러가 공군의 지원없이 무모하게 기갑부대를 팔레스 포켓에 밀어넣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교도기갑 사단의 프리츠 바이엘라인 장군은 자신의 후퇴로를 'Jabo Rennstrecke (전폭기들의 경주로)'라고 부를 정도였고, 패튼의 지상군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70%의 전력이 붕괴했다. 에르빈 롬멜도 7월 17일에 스핏화이어의 공습을 받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9월 16일 최고 사령부 회의에는 하나같이 붕괴되는 독일 지상군의 집계만이 입수되어 절망적이었다.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소식이 몇 개 들어왔는데, 휘트겐 숲에서 미군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것과 아르덴느에서 소수의 기갑부대가 미군의 진격을 막아냈다는 것이었다. 그 수간 히틀러는 전기충격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나 앞에 펼쳐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아르덴느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목표는 안트워프다. 기상이 악화되면 적군의 비행기도 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독일군이
후퇴하고 있고, 이제는 국경을 막아내기에도 벅찬 판국에 진격이라니... 모든 참석자는 말을 잊었다. 이 목표를 받은 괴링은 지상군을 엄호할 공군의 재정비가 시급했고 방어를 중시한 갈란트보다 공격적인 펠츠를 사령부로 불러들여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다.
그림 설명: 이미 한 번 인용했던 그림으로, 미군의 공습에 완전히 와해된 교도기갑 사단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무너져가는 제국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루프트바페는 단기간에 치유될 수 없는 안팎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산적해있었다. 미 8공군의 산업시설에 대한 폭격은 이제 주로 정유시설에 집중되었고 기름 생산량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합성연료 생산덕분에 1944년 4월에는 574,000톤을 생산했지만 5월에는 195,000톤으로, 6얼에는 52,000톤으로 감소해서 90%가 줄어
들었다. 8월에는 16,000톤 만이 생산되어 독일제국이 종말을 맞이하는 듯 했으나 슈페어가 다시 한 번 히틀러를 설득해서 정유공장 수리에 군부대 엔지니어와 친위대를 투입했다. 무지막지한 공습이 끝나자 마자 노동자를 투입해서 수 천 명의 희생당하기도 했다. 이동가능한 생산시설은 모두 지하로 옮겨졌고 대공포가 집중배치되었으며 연막을 피워 정밀한 폭격을 힘들게 만들었다.
정유시설에는 거의 2,000문 이상의 대공포가 배치되어 탄막을 형성했고, 정유시설로 가는 길목에는 Me-163 코메트 제트기가 배치되어 8기가 185기의 B-17을 공격해 뿔뿔이 헤쳐놓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제트기에 대한 대응은 의외로 간단했다. Me-163은 겨우 7분 동안만 비행할 수 있었고 착륙시에는 글라이더처럼 공기를 타고 순항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단 멀리 달아났다가 얌전히 뒤를 내주는 제트기를 따라 갈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 설명: 정유시설을 폭격하고 있는 영국 폭격기입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더라도 산업시설 붕괴를 최우선 목표로 삼은 미공군이었다. 각 지역의 정유시설은 4개월 동안 무려 2,400대의 공습을 받아 수리가 끝나자 마자 다시 파괴되는 판국이었고 9월에는 겨우 7,000톤만 생산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180,000톤의 재고만 보유하게 된 독일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모든 주간 폭격기들의 비행을 금지하고 정찰이나 훈련비행도 대폭 줄였다.
비행장에서는 드디어 말이 비행기를 활주로까지 끌고 가는 어처구니없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폭격기의 신세는 더욱 처량해졌다. He-177 80대가 임무를 수행하려면 하루 500톤의 연료를 소비하는데 이건 독일 전체의 하루 생산량이었기 때문에 이 기체는 모두 격납고에 보관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얼마되지도 않는 연료를 확보하기 위해 공군과 육군의 어이없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아르덴느 반격을 위해 17,500톤의 연료가 필요했던 사령부는 다른 부대의 보급을 줄였고 훈련병들은 1주일에 겨우 한 시간의 비행만이 허락되었다. 겨우 7시간의 비행훈련만 마치고 실전에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제국의 붕괴 직전에 다행스럽게도 연합군의 산업시설 공격목표가 각종 운송수단으로 전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철도 시스템과 야적장을 공습해서 빠른 종전을 가져왔던 경험을 토대로 수립한 클라이온 작전의 일환이었다. 정유시설 폭격을 주장했던 스파아츠 장군도 예상외로 독일의 저항이 지속되자 자신의 폭격기 부대를 지상군 지원으로 전환시켰다. 더구나 가을이 시작되면서 서유럽 특유의 구름이 잔뜩 낀 기상이 계속되면서 정밀한 폭격이 불가능해졌고, 독일에서도 요격을 위한 전투기 출격이 비례해서 줄어들면서 연료 소비량이 크게 줄었다.
그림 설명: 폭격을 당한 장갑열차입니다. 프랑스, 러시아에서의 후방교란 공격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다음부터는 기차도 전차포를 탑재하는 등의 중무장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3월과 4월에 했던 것과 같은 강도로 정유시설을 폭격했다면 우리의 최후는 예상보다 더 빨랐을 것이다."
이 순간을 틈타 독일은 정유시설을 재정비했고 연료생산은 11월에 다시 39,000톤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독일공군의 피상적인 회복
앞서 설명한 스피어의 극단적인 조치로 독일공군의 전력은 수치상으로는 크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1944년 9월에는 총 2,876기의 Bf-109와 Fw-190이 생산되어 2개월 후에 벌어질 아르덴느 반격전의 기반이 다져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런 급격한 회복은 당연히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독일 군수국은 최신형기를 우선적으로 생산해 질적인 만회를 할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전투기를 효과적으로 생산해서 양적인 만회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했고 결국 아르덴느 작전과 폭격기 요격을 위해 더 많은 비행기를 보낼 수 있는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이로써 Me-262, Ar-234, Do-335, Ta-152H와 같은 최신형기보다 연합군의 P-47D, P-51D, 스핏화이어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Bf-109G와 fW-190A-8의 생산에 주력했고, 이미 설명했던 연료와 자재문제를 감안하면 그 성능은 더욱 크게 떨어지는 기체였다. 물론 Bf-109K-4와 Fw-190D-9와 같은 고성능 기종을 함께 생산했지만 그 수는 크게 부족했다.
그림 설명: Ta-152H의 성능은 대전 최고의 전투기인 P-51D와 대등하거나 넘어섰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그림을 클릭해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갈란트가 "등 뒤에서 천사가 밀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의 최신형만 생산한다고 해서 나아질 문제도 아니었다. 모든 공장이 폭격을 당하면서 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터보제트 엔진을 만드는 니켈과 크롬 합금의 순도가 기준치 아래로 떨어졌고 합성연료를 사용한 탓에 엔진교체 시간이 크게 앞당겨졌다. 설상가상으로 신형기를 급격하게 가속시키면 제트 엔진이 갑자기 멈추거나 불이 붙는 치명적인 오작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자재 불량때문에 터빈 날개가 부하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험을 피하려면 엔진을 서서히 가속시켜야 하는데 그건 폭격기나 정찰기에서나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나마 입증된 프로펠러 기체도 마이믈러 벤츠 605 엔진의 수명이 25%나 단축되었고, 비행사고가 제트기만큼은 아니지만 빈번하게 일어났다.
하인켈 사가 37일 만에 제작해낸 대량생산용 국민전투기인 He 162 살라만더는 첫 비행에서 시속 720km라는 엄청난 속도를 기록했지만 두 번째 실험비행에서는 나무 날개가 떨어져나가 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동체와 날개를 접착하는 접착제가 불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트기에 사용되는 합성연료도 심각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밸브가 헐거워져 합성연료인 J2가 샐 경우, 조종사는 말 그대로 녹아버릴 수 밖에 없었고, 1944년 12월에 비행을 마치고 난 한 조종사가 의문사를 당한 일이 있다. 비행 중 약간 새어 나온 연료에 손을 데였을 뿐인데 심한 후유증으로 죽고만 것이다. 그 후에 모든 조종사들은 가죽 제복과 안전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게 된다.
이제 조종사는 이륙 시에는 연료분출을, 가속 시에는 엔진발화를, 급강하 시에는 기체고장을 신경써야 했고, 오히려 적기를 만나면 자신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더 반가웠을 지로 모르겠다. 실제 기록으로도 노보트니 비행대의 Me-262 15대 손실 중에 전투로 인한 손실은 겨우 6대 뿐이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Me-262는 훈련을 위한 복좌기(이중 조종석)가 없어 제대로 훈련을 할 수 없었다. 교관 자신도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간단하게 비행시범을 보인 후에, 지상에서 무전으로 훈련병들에게 조종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제트기 조종훈련을 받은 베테랑 조종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후에 제트기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높은 고도에서의 발화 위험성과 저속에서의 나쁜 상승률 등의 제트 엔진의 특징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스로틀을 조심해서 조작하지 않으면 엔진에 불이 붙는다는 주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안이라며 엔진의 카울링을 들여다 보지 못하게 했다.
운송시설이 공습을 받아 엔진과 연료가 제 때 보급되지 않아 수리가 원활하지 않았다. 우리 중에는 이제 겨우 100시간의 비행기록을 가진 풋내기도 몇 명 끼어 있었다. 그들도 제트기를 이륙시키고 착륙시킬 수 있겠지만 전투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이다.
이렇게 빈약한 훈련으로, 그들을 전투에 내보내는 것은 범죄행위나 마찬가지다. 이 젊은 친구들도 최선을 다하겠지만, 경험부족을 자신의 목숨으로 가장 값비싸게 보상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대공미사일
괴링은 전쟁이 끝난 후에 "당신네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전쟁이 일년만 더 계속되었거나 비밀병기가 일년만 더 일찍 나왔다면..."이라고 미군에게 한탄을 한 적이 있다. 원형기 몇 대 제작된 상황인데도, 독일 사령부가 심어놓은 막연한 희망은 풋내기 조종사는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널리 퍼져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독일제국의 운명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한 다음부터, 아니 영국상공에서 쫓겨난 다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럼 이번에는 독일이 구상했던 각종 신무기를 간단하게 설명해보자.
연일 연합군의 폭격기가 독일상공을 뒤덮고 있던 1944년 여름부터 독일은 Fi-103 V1으로 런던을 정기적으로 폭격하고 있었다. 걸프 전에서 이라크가 스커드 미사일을 몇 발 간신히 날린 것과 달리 독일은 연합군을 향해 수 천 발의 미사일을 날렸고 연합군에게 심리적인 큰 타격을 준 것은 분명했다.
이 미사일은 제트 추진방식으로 약 672kg의 폭약을 적재하고 725km를 날아갈 수 있었다. 6월에는 매일 백 개의 미사일을 날렸지만, 속도가 비행기 속도와 비슷해서 영국해협에서 대기 중인 전투기에게 요격을 당했고, 30% 정도의 미사일은 발사직후에 오작동으로 도중에 떨어졌기 때문에 영국인보다 미사일 발사기지가 있는 네덜란드 국민이 더 공포에 떨어야 했다. 12월 24일, 보다 정밀한 폭격을 위해 He-111 폭격기에 실려 영국해안에서 발사된 50개 중에 한 개만이 멘체스터에 떨어졌을 정도로 정확도가 너무 낮았다.
V2 미사일의 경우에는 초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비행을 할 수 있어서 연합군으로서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었다. 매일 발사되는 30톤의 폭탄은 겨우 B-17 12대의 폭탄 적재량에 불과했고 자신들은 하루 1,000대의 공습을 받는 것을 계산해보면 반격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만이 있을 뿐이었다. 미사일은 다른 병기 생산에 투입될 자원을, 특히 대공미사일 개발에 투입될 인적, 물적 자원을 소비하고 있었다. V2 생산을 승인했던 슈페어도 "내가 저지른 가장 어처구니 없는 실수 중의 하나"라고 말했을 정도다.
제트기를 개발한 독일은 향후에 이렇게 빠른 비행기를 격추시키려면 신무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판단에 따라 대공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다. 지대공 미사일로는 Hs-117 버터플라이와 V2 축소형인 EMW 워퍼폴 2종이 있었고, 공대공 미사일로는 유선조종식인 X-4 루스탈이 거의 현용으로 사용되기 직전이었다. 슈페어는 V2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대공미사일 프로젝트를 제대로 지원했다면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믿었다.
동영상 설명: HS-117 버터플라이 시험발사 장면입니다.
Me-163 제트기 연구에 참여했던 알렉산더 리피쉬 박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적외선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 미사일은 엔진에서 나오는 열을 추적하는 최초의 열추적 미사일이었으나 공격무기인 V2를 선호한 히틀러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림 설명: 자국민을 하나의 병기로만 사용했던 일본과 달리 독일은 가미가제 공격도 과학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옆에서 보는 병기가 미스텔이라고 부르는 괴상한 합체 비행기로, 처음에는 연합군의 상륙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다가 본토 방어전부터는 러시아 공장과 폭격기 요격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폭격기에 접근하면서 아래 동체의 Ju-88 폭격기(폭약이 가득찬)를 풀어놓으면 이 놈이 코스대로 날아가 폭격기를 들이받아 격추시키게 되고, 전투기는 호위기와 전투를 벌이며 귀환하게 됩니다. 실제 전과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대공 미사일에 더 많은 노력을 집중했어야만 했다. 이것은 이미 1942년부터 개발되어 왔으며 조만간 대량생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시화되었었다. 이 미사일은 1,500m 상공의 폭격기를 격추시킬 수 있으며 기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우리는 V2보다 훨씬 작은 미사일을 수 천 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수 천 개의 미사일이 폭격기를 향해 날아갔다면 1944년에는 더 이상 연합군의 B-17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림 설명: 또 다른 대폭격기 신무기인 Ba 349입니다. 지대공미사일과 제트기를 결합시킨 독특한 형태로, 폭격기 항로에 위치하고 있다가 수직으로 발진해 올라 로켓탄을 쏟아붓고는.............. 낙하산을 펼쳐 얌전하게 귀환하는 좀 황당한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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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펴고 얌전히 떨어지는 이 녀석을 가만히 둘 호위기가 있었을런지....
갈란트의 대타격 전술
폭격기를 요격하려면 P-51 머스탱의 장막을 뚫어야만 했는데 조종사의 수준이 크게 낮아진 독일 공군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전투경험이 있는 조종사가 사라져갔고, 약속된 2,000대의 제트기는 요원했으니 다른 전술이 필요했다.
수백 대의 호위기가 둘러 싼 폭격 비행단을 기껏해야 수 십대의 전투기로 요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호위기보다 더 많은 비행기를 출격시켜 호위기와 1대1로 공중전을 벌이고 남는 전투기로 폭격기를 일시에 격추시킨다는 '대타격' 전술을 갈란트가 주장했다.
'대타격'전술은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을 선택해서 11개 비행단의 1,000대 전투기를 일시에 출격시켜 대부분의 폭격기에 피해를 입히고 2차 공격에 동원된 400대의 전투기로 치명타를 가하고, 수 백대의 야간전투기가 스위스나 벨기에로 비상착륙하는 폭격기를 추격해서 격추시킨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성공을 거둔다면 300대 이상의 폭격기가 격추될 것이고, 연합군은 다시금 공습을 무기한 연기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다.
독일도 폭격기와 1대1의 손실을 입는다면 손해보는 작전은 아니었다. 나중에 이 전술의 실효성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연합군의 비행장으로 분산되어 공습을 시도했던 보덴플라테 작전보다는 성공 가능성이 크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지만 이 때에는 이미 갈란트는 히틀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히틀러의 대답은 간단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며 공군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림 설명: 야간 전투기로 대활약했던 Bf-110과 He-219입니다.
워낙 기동성이 떨어져서 주간전투라면 거의 학살수준이었겠지만 야간에서는 폭격기만 상대하면 되었기 때문에, 레이더와 중무장으로 대활약을 하게 됩니다.
레이더의 탐지거리가 2~3km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폭격기에 접근할 때까지는 지상관제소의 유도를 받고, 탐지거리부터는 조용히 접근해 사냥을 벌입니다.
동체 위장무늬도 윗 부분은 회색, 아래 부분은 검정 색으로 도색되어 야간에는 이 전투기가 접근하는 것을 알기 힘들었습니다.
11월 2일, 1,174대의 폭격기가 968대의 호위기와 함께 정유시설을 공급하기 위해 독일 중부의 상공에 나타났고, 독일 공군사령부는 제한된 범위에서 '대타격'전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독일로서는 최대규모인 49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켰지만, 기상이 좋지 않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에는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원래 목표였던 1대1 격추비율에 크게 못미치는 120대 손실에 폭격기 50대 격추라는 전과를 기록했다. 지상의 대공포망도 32대를 격추시켰지만 레우나 지역에 쏟아진 2,648톤의 폭탄은 이 지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든다.
히틀러는 이 결과를 곰곰이 따져 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한심한 결과다. 260대의 전투기를 내보내 겨우 20대만 격추시켰다. 2,600대를 내보냈더라도 200대만 격추시켰을 것이다. 공군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히틀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군사령부는 '대타격'전술을 고집했지만 11월 26일에도 98대 손실에 34대의 폭격기와 9대의 전투기만 격추시켜 히틀러는 갈란드의 주장을 완전히 묵살하고 하늘판 아르덴느 작전인 '보덴플라테' 작전을 진행시킨다.
1945년 1월 1일, 새벽이 동터 오르면서 독일 전역의 비행장에서는 마지막 전력인 900대의 전투기가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연합군 비행장을 공습해 연합군 비행기를 200대 이상 파괴시켰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조종사는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200대 정도의 손실은 며칠 만에 보충할 수 있는 사소한 피해였다. 반면에 독일공군은 300대의 전투기와, 연합군보다도 더 중요한 조종사를 200명 이상 잃으면서 유럽상공을 제패했던 영광은 기록으로만 남게 된다.
P.S. 보덴플라테 작전을 정리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정리하려고 해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어느 비행대가 어디로 가서 뭘 했다는 식의 나열이 전부입니다. 큰 그림의 전사에서 볼 때에는 그냥 넘어가야 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독일과 공군이 당한 피해만 자세하게 설명했는데, 연합군의 손실도 엄청났습니다. 다음에 연합군 시각의 공습도 정리하겠지만, 세계최고 수준의 공군을 상대하다 보니 폭격기는 말할 것도 없고 연합군의 폭격기 승무원이 무려 47,000명이나 전사했다고 합니다.
오래 전 영화, B-17 승무원의 공습을 자세하게 묘사한 멤피스벨에 그 공포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실제로 있었던 참극을 재현한 것입니다. 이것말고도 한쪽 날개만 날아가서 불붙어 떨어지는 사진도 유명(?)합니다.
이번 동영상을 가장한 스틸 사진은 폭격기들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입니다. 애절한 배경음악과 함께 피해를 입은 폭격기들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번에는 부활한 팬저 전차 동영상을 올렸었는데, 이번에는 부활한 전설적인 기체 Me-262의 실제 비행모습입니다.
여기 저기서 수소문해 구한 여러 대 분의 부품에서 되살려냈다고 하더군요.
보덴플라테 전투에 대해서는 몇 편의 동영상으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여유있게 감상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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