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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동부전선의 몰락을 읽기 전의 배경지식 1

by uesgi2003 2011. 8. 10.


정말 오래간만에 글을 올립니다. 

많이 기다려주신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라는 사과와 인사를 동시에 해야겠습니다.

 

그동안 마냥 논 것은 아니고 동부전선의 몰락에 대해 150p 정도를 번역하고 한 번에 올리려다가 오래걸렸습니다. 


동부전선에 대해 사전 배경설명을 해두어야 생소한 분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주 간단하게 주로 지도와 사진으로 레닌그라드 전투 이전까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흔한 독일과 소련의 대결에 대해 몇 가지 오해부터 바로 잡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잘지냈으면 영국까지도 합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히틀러가 공산주의를 끔찍하게 싫어했듯이 스탈린 역시 전체주의를 싫어했고 동/북유럽으로 세력을 팽창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핀란드를 공격했다가 제대로 두들겨 맞았었고 독일이 폴란드를 합병할 때에는 함께 군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경에 엄청난 부대를 상주시키면서 기회를 옅보다가 히틀러에게 먼저 기습을 당한 것입니다. 

독일의 주력이 영국으로 향했다면 배후를 소련에게 찔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소련이 국경에 어느 정도의 부대를 배치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동부전선 초기를 정리할 때에 자세하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2. 독일의 전력은 연합군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게 배경만 설명하기로 했으니까 요약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차: 개전초/중반까지 독일군은 1/2호 전차와 3호 전차만 보유했고 심지어 제대로 전투도 못벌인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체코와 같은 약소국보다도 못한 전차전력이었습니다. 폴란드 합병은 날로 먹은 것처럼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그 쉬운 전쟁에서도 독일군 전차는 무려 620대 정도가 파괴되었을 정도로 빈약한 전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영불 연합군(3000대)은 개전초기에 독일(2600대)보다 우수한 전차를 400여대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는 것 아시죠?)

 

 

마치 대전후기의 미군이 독일전차를 만나면 공군만 외쳤듯이, 프랑스의 중전차(소뮤아)를 만나서는 대전차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그럼 왜 개전초기에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그렇게 무기력했는지 궁금하시죠?

1차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중무기에 대해 연합군의 엄격한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전차를 만들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기관총2자루를 단 1호, 20mm 기관포를 단 2호도 농업용 트랙터인 것처럼 설계/생산했기에 가능했었고 가장 파괴력있었던 

3호전차도 37mm 포가 고작이었습니다. 

대신에 전차부대를 독립해서 전격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반면에 연합군은 2차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도 전차를 보병과 함께 운용하는 참호돌파지원 또는 움직이는 토치카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독일군이 전차부대를 동원해 전선을 돌파해 배후를 끊고 보병이 협공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우수했던 전차들은 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붕괴하는 보병과 함께 지리멸렬해졌던 것이죠.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75mm 단포신의 4호전차는 미군이 영국군에게 제공한 M3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해서 88mm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운용하고, 일선 부대가 훈장보다 장포신 4호전차를 달라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연합군에 비해 너무나도 빈약했던 독일군 전차의 기적과도 같은 구원군이 바로 38t입니다. 체코를 무력병합했는데... 공장에서 이렇게 우수한 전차가 발견되었던 것이죠.

중반까지 가장 유력한 전차로 사용되었고 대전 후기에는 여러 가지 대전차 자주포와 돌격포로 변형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대전차포 37mm 역시 "문 두드리는 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연합군 전차 한 대(특히 소련의 KV-1과 같은 중전차)에 공황상태가 되어버린 독일군은 88mm 대공포로 위기를 탈출했습니다. 


보병: 영프 연합군만 해도 보병이 독일의 136개 사단에 비해 13개 사단이나 더 가지고 있었고 무장도 매우 우수한 편이었습니다. 독일군이 자동화기로 무장한 것도 대전중반 이후부터이며 연합군에 비해 기계화보병이 많은 편이기는 했어도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만큼 기계화부대는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기갑척탄병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부대가 말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뚜벅이 부대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다만 MG34/42와 같은 기관총만큼은 명품이었습니다. 


해군: 프랑스와 소련 해군에 비해서는 우수했습니다만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서는 상대도 안되는 전력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히틀러가 전함을 대양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했을까요. 유보트를 이용한 잠수함 전력은 매우 좋았습니다만, 잠수함은 교란작전 외에는 바다를 지배하지도 못했고 거꾸로 바다는 영국군이 완전히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군단은 본국에서 보내지는 군수품 중 겨우 20% 정도만 받고 나머지는 모두 영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바다속으로 가라앉아버렸죠. 그렇게 갈망하던 장포신 4호전차도 함께요.


공군: 개전초기 우수한 전력으로 독일의 전설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전략운용면(영국본토공방전)에서 많은 실수를 해서 귀중한 전력을 엄청나게 잃었습니다. 차라리 동부전선에 그 전력을 사용했다면 상황은 아주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의 무시 무시한 무기들은 전부 대전후기에 나온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개전초기에 마치 무적과 같은 연전연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일까요? 개전초기의 독일군은 공군과 육군이 각자 제 역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연합군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훨씬 많은 병력과 우수한 무기를 가졌음에도 지리멸렬했던 것과 달리, 독일군은 세계최고의 전략가들이 사전에 계획한 전략전술대로 정확하게 실행해나갔던 것입니다.   


3. 동부전선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소련은 엄청난 국토, 천연자원, 인구를 보유했지만 스탈린의 숙청작업으로 경험있는 지휘관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강제로 병합시키고 탄압한 연방국가의 저항이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기에, 독일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개전초기에 거의 패전위기까지 몰린 것입니다. 

나폴레옹, 칼이 그랬던 것처럼 소련 국민을 얕잡아본 히틀러는 3가지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 레닌그라드를 점령하지 않고 포위했습니다 :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확실하지만, 히틀러는 마지막 순간에 도시 진입을 하지 않고 레닌그라드를 포위만 합니다. 여러 분석이 있는데... 히틀러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겠죠. 

이렇게 해서 핀란드군과 북부집단군은 모스크바로 진격하지 못하고, 소련은 영국과 미국에게서 군사원조를 계속 받게 됩니다. 만약 레닌그라드를 점령했다면 북부집단군이 모스크바까지 진격하지는 못하더라도 군사원조 루트를 차단해서 소련이 군사/경제적으로 붕괴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뺀 모든 것을 지원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대한 양의 군수품이 미국에서 소련으로 전달되었고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후에는 아르한겔스크에서 받았습니다. 

레닌그라드 포위병력으로 모스크바를 차단했다면 아르한겔스크의 물자도 차단되었겠죠. 













-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에 집중하지 않고 남부집단군을 남부로 돌렸습니다 : 석유자원이 반드시 필요했더라도 모스크바를 점령해서 스탈린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아마도 승리를 예감한 히틀러가 전략자원 획득에 눈을 돌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모스크바는 스탈린의 모든 것이 집중된 곳이었습니다. 여기를 지켰기에 시베리아 저 멀리에서 새로운 부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고, 미국의 군수품 지원을 받아 무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어렵게 전선을 유지하던 부대들을 긁어모아 반격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스탈린그라드를 고집하다가 240,000명을 잃었습니다 : 레닌그라드와는 달리 스탈린그라드는 도시의 건물 마지막까지 최정예 6군을 밀어넣었다가 포위당해 무려 240,000명을 잃게됩니다. 러시아군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480,000명을 잃지만 독일군과는 차원이 다른 부대였습니다. 전투력으로 따지면 4,800,000명에 해당되는 전력을 독일군은 히틀러의 무모한 작전에 잃은 것입니다. 



사진은 제 6군의 사령관 파울루스 대장입니다. 

만슈타인, 롬멜, 클루게, 호트와 같은 지휘관들은 전멸위기에서 히틀러의 명령을 과감하게 거부했던 반면에, 히틀러의 명령을 마지막까지 따른 충실한 심복이었지만 러시아군에게 항복한 최상위 계급이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히틀러는 자살하라는 뜻으로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키지만, 그의 지시를 거부하고 러시아군에 항복합니다. 


그럴 것이면 포위되었을 때부터 거부하고 탈출을 했어야 했죠.



그리고 점령했던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국가들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면 소련을 스스로 붕괴하게 만들 수도 있었죠. 개전초기 연방국가들은 스탈린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독일을 환영하고 심지어 전쟁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만, 독일은 또 하나의 점령군으로 착취와 압제를 서슴지 않아 이들이 결국에는 러시아의 스탈린을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유태인처럼 가스실로 보내 죽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식량을 징발해 수십 만 명이 굶어죽었고 500,000명의 여성을 독일로 보내 가정부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옆의 자료는 소련이 입었던 인명피해에 대한 자료입니다. 

약 24,000,000명이 죽었는데 이중에는 스탈린의 가혹한 정치보복때문에 죽은 사람도 많겠지만 대부분이 독일의 무차별 공격, 착취 등으로 죽은 숫자입니다. 


소련의 유명한 영화 Come and See를 보시면 독일군 SS 대원들의 잔혹한 학살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3가지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레닌그라드를 점령해 몇 십만의 병력을 모스크바로 진격시키는 동시에 미군의 지원루트를 끊어버리고, 중앙집단군과 남부집단군도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공격에 집중시켰다면, 마지막으로 스탈린의 러시아와 다른 연방국가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들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던 전쟁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답변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오류를 바로 잡는 피드백은 언제라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