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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터키

성요한기사단의 몰타섬 방어 (1565)

by uesgi2003 2018. 1. 24.


우리는 미국과 기독교문화의 영향때문에 다른 문명에 대해 오해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에서는 가능한 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합니다만 아무래도 원자료 자체가 유럽쪽 시각이라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슬람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고 아랍어(터키어)를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성요한기사단의 몰타섬 방어 (1565)


성요한기사단장 장드라발레트Jean de la Valette는 몰타Malta섬의 그랑Grand항 너머의 세인트엘모St. Elmo요새 성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새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지만 오래 버틸수록 기사단이 살아남을 여지가 더 많아졌다. 어둠을 틈타 항구너머로 새로운 병력을 보내고 부상병을 실어왔다. 기사단장 자신도 요새가 이 정도로 버틸 줄은 전혀 몰랐다. 연약한 인간이 지옥불을 견디고 있는 것과 같았다.

투르크군은 거의 한달 동안 작은 요새를 포위하고 대포와 화승총으로 요새벽을 두들겼다. 탈진한 기독교기사단은 벽으로 끊임없이 달려드는 이슬람군을 격퇴했다. 수비대는 펄펄 끓는 기름을 쏟아 붓고 불붙은 나무와 화염탄을 떨어트려 적의 군복과 사다리를 불태웠다. 

요새 외벽아래의 해자에는 검게 그을린 시체가 쌓였다. 요새 안에 웅크리고 있던 기사들이 칼, 전투도끼와 창을 들고 성벽 구멍 밖으로 뛰어나갔다. 중과부적이라 전멸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 이전에 수많은 적의 목숨을 빼앗고 형제 기사들이 용기를 낼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몰타섬은 동서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전략요충지입니다. 

신성로마제국 -> 성요한기사단 -> 프랑스 -> 영국으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2차대전에서는 해군력이 절대적 열세였던 추축군이 몰타섬의 영국군을 몰아내지 못해서 북아프리카전선으로 보내는 군수품과 병력 거의 절대 다수를 지중해 바닥에 가라앉혔습니다. 

만약 추축군이 몰타섬을 점령했다면 북아프리카전선은 1~2년 이상 계속되고 롬멜의 전설은 더욱 화려했을 것입니다. 


1565년, 몰타라는 지중해 작은 섬은 수백 년 동안 힘을 겨뤄온 기독교와 이슬람의 새로운 전장이 되었다. 시실리Sicily에서 80km 떨어진 몰타는 동과 서를 잇는 전략거점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장엄왕 술레이만Suleiman the Magnificent는 몰타로 함대를 보내 성요한기사단을 전멸시키고 이탈리아침공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 

투르크함대의 등장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술레이만과 동년배인 71세의 발레트는 1557년에 기사단장에 오른 후, 단 한 번도 이슬람의 침공에 대해 경계심을 늦춘 적이 없었다.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고 바르바리의 해안갤리선에서 1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투르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오스만투르크가 서쪽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몰타섬을 점령해야 했다. 

투르크함대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는 이탈리아 기사 한 명에게 아주 간단한 메시지를 들려 시실리총독 돈 가르시아 데 톨레도Don Garcia de Toledo에게 보냈다.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원바랍니다.” 

그렇지만 증원군은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기사단만으로 닥쳐올 거대한 태풍을 견뎌내야 했다. 



발레트는 몰타섬 공방전 이전의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3년 후에 사망했습니다.



장엄왕 술레이만 1세입니다. 


성요한기사단은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으로, 또는 본거지에 따라 로도스기사단과 몰타기사단으로 부릅니다. 아래 그림처럼 나폴레옹이 1798년 몰타섬을 강탈하자 유럽각지를 전전하다가 1834년에 로마에 정착하고 봉사에 전념해오고 있습니다. 영토없는 국가로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몰타는 오랜 전쟁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성요한기사단은 수백 년 동안 이슬람에게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1차 십자군원정이 있던 1099년, 이슬람을 점령한 후에 결성된 성요한기사단은 성전기사단knights Templar와 연합해 기독교군의 중추역할을 했다. 

1291년, 무슬림이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인 아크레Acre를 점령하자, 성요한기사단은 일단 키프러스Cyprus로 후퇴했다가 다시 로도스Rhodes섬으로 물러나 2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성요한기사단은 유능한 로도스섬 선원의 도움을 받아 육상전투에서 해상해적으로 변신해 무슬림상선을 약탈하고 교역로를 교란시켰다. 

결국 1444년에는 이집트 술탄이, 1480년에는 오스만투르크 메흐메드Mehmed술탄이 성요한기사단을 공격했다. 로도스섬의 단단한 요새덕분에 두 차례 공격을 모두 막아냈지만 1522년, 술레이만이 6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요새를 무너트렸다. 술레이만은 기사단의 용기에 감탄해 기사단이 그대로 물러나게 허락했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카를Charles 5세황제는 트리폴리Tripoli, 고조Gozo, 코미노Comino와 몰타를 성요한기사단의 새 거점으로 제공했다. 몰타섬은 바위가 많고 황무지였지만 크고 훌륭한 항구를 2개나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지중해 동서를 연결하는 전략요충지였다. 성요한기사단은 몰타, 시실리, 북아프리카를 오가는 동서해상교역로를 완전히 장악했다. 

몰타 성요한기사단의 중무장 갤리선은 로도스섬 당시보다 오스만투르크에게 훨씬 큰 피해를 입혔다. 1564년, 노쇠한 술레이만은 42년 전에 기사단에게 자비를 베푼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기사단을 전멸시킬 군대를 일으켰다. 


1565년 5월 18일, 엄청난 규모의 투르크함대가 몰타섬으로 향했다. 200척 가량이 약 30,000명을 싣고 있었고 그 중에는 술탄이 자랑하는 초정예병 예니체리Janissary도 6,000명이나 있었다. 

아무래도 주력은 칼, 활, 석궁과 화승총을 사용하는 스파히Sipahis였다. 그리고 짐승가죽을 두르고 전투 전에 대마초를 피우고 죽음을 무릅쓰는 보병 4,000명이 있었다. 나머지는 잡병, 병참과 선원이었다. 

투르크는 최소한 50문의 대포를 동원했는데, 그 중에는 8파운드포, 60파운드 컬버린Culverin과 72kg의 돌을 쏠 수 있는 초대형 투석기 2대가 있었다. 80,000발의 포탄과 수천kg의 화약까지 갖춰 어떤 적도 일제포화로 무너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노예출신의 종신병역인 예니체리는 경무장과 화려한 장식이 특징입니다. 주로 동구권 기독교식민지의 어린 아이들을 모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초정예병사로 육성했습니다. 거세병으로 잘못 설명하는 자료가 많은데 많은 예니체리가 가족을 가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격이 크게 변해 술탄의 목숨을 좌우할 정도가 되었고 전장에서는 명령불복종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래 그림의 오른쪽 중무장은 기병인 스파히입니다. 



낙승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15km 폭에 겨우 27km 길이 밖에 안 되는데다 수비병력도 많지 않았고 성벽도 급하게 보강되었다. 발레트는 600명의 기사와 시종, 1,000명의 스페인보병과 화승총병 그리고 수천 명의 몰타 민병과 비정규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병력을 세군데로 분산배치했다. 비르구Birgu반도의 성 안젤로Angelo요새, 샌글레아Sangela만의 성 미카엘Michael요새 그리고 쉬베라스Schiberras만의 성 엘모요새였다.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므디나Mdina 요새도시가 있었다. 빌레트는 이곳을 기병이 출격하는 본거지로 삼았다. 




황량한 몰타섬은 오히려 기사단에게 큰 이점이었다. 로도스섬을 공략하던 투르크군은 본국과 섬에서 군량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몰타에는 밭이 거의 없었고 이미 지난 봄에 모두 추수한 상태였다. 신선한 물도 거의 없었다. 주 식수원은 그랑항의 끝의 마르사Marsa에 있었다. 

빌레트는 기사단에게 수천 개의 진흙항아리에 물을 모아두라고 명령한 후에 마르사의 식수원을 동물사체와 독극물로 오염시켰다. 몰타섬은 내륙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투르크군은 군수품뿐만 아니라 심지어 요리에 필요한 나무까지 모두 힘들게 가져와야 했다. 

그리고 시간도 기사단 편이었다. 기사단이 가을까지만 버티면 투르크군은 황량한 섬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굶주려 죽거나 거친 바다에서 큰 피해를 입으며 철수해야 했다. 


투르크함대는 몰타의 남쪽 끝에 있는 마르사실로크Marsaxlokk만에 정박하고 상륙하기 시작했다. 발레트는 정찰기병을 보내 상륙하는 선봉대를 괴롭혔지만 상륙자체를 막기 위한 전면전은 피했다.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귀중한 병력을 낭비할 수 없었다. 요새 안에서 농성하면서 성벽에 달려드는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기로 했다.  

투르크군은 초기부터 심각한 실수를 계속 저질렀다. 먼저 수비가 허술한 므디나(사진 참조)를 점령하지 않았다. 므디나를 점령했다면 기사단의 기병이 출격할 거점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섬의 절반을 장악해서 시실리와의 협력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르구와 샌글레아에 병력을 집중시키지 않았다. 두 요새는 모두 낮은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고지대에서 포격으로 충분히 공략할 수 있었다. 

투르크군은 비르구의 끝에 있는 카스티야Castile보루를 공격하다가 병력을 물리고 성 엘모요새를 공격했다. 전력전술 모두에서 너무 우유부단했다. 



술레이만은 무스타파 파샤Mustapha Pasha에게 육군을, 피알리 파샤Piali Pasha에게 해군지휘를 맡겼다. 무스타파는 공성에 주력하고 피알리는 함대를 그대로 보존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에 우선 안전하게 정박할 거점을 찾았다. 

그랑항은 성 엘모요새의 대포, 비르구와 샌글레아 보루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고 남쪽항은 해상상황이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북쪽의 마르사실로크에 함대를 정박시키겠다고 고집부렸다. 이럴 경우 성 엘모요새부터 함락시킨 후에 기사단의 거점을 공격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어렵지 않은 목표물로 보였다. 


투르크군은 그랑항의 끝에 있는 마르사에 본진을 세우고 대포를 쉬베라스 언덕의 바위로 끌어 올렸다. 바로 기사단 요새의 한 지점을 향해 포탄을 퍼붓고 대리석과 암석을 날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 엘모요새는 불길에 휩싸였고 월말에는 육지쪽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요새 안의 기사단은 좀처럼 위축되지 않았다. 부러진 기사단 깃발은 매일 새벽마다 다시 성벽 위에 게양되었다. 

당대 최고의 무슬림해군인 드라구트Dragut가 도착하면서 2회전에 돌입했다. 그는 1551년에 기사단을 몰아내고 트리폴리를 점령했고 몰타섬에도 큰 피해를 준 적이 있었다. 술탄은 3명의 지휘관에게 모든 사항을 협의하라고 명령했다.

드라구트는 무스타파와 피알 리가 멍청하게 북부를 장악하지 않은 채로 성 엘모요새를 공격했다고 비난했다. 드라구트는 포대를 요새의 북쪽과 남쪽으로 분산시켜 세 방향에서 포격하게 했다. 그리고 요새의 보급로를 끊기로 했다. 




밤이 되면 투르크 정찰선이 그랑항을 훑고 다니며 요새를 봉쇄했다. 보급이 끊겼는데도 수비군은 몇 주를 더 버텼고 오히려 투르크군의 보급이 난감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발레트는 그랑항의 요새를 보강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작은 보루는 6월 23일까지 무려 31일을 버티다가 전멸했다. 불구가 된 스페인장교 후안 데 구아라스Juan de Guaras와 후안 데 미란다Juan de Miranda는 의자에 묶여 해변으로 끌려간 후에 처형당했다. 

1,500명의 수비대가 죽었지만 투르크군은 4배가 넘는 피해를 입었다. 드라구트 자신도 폭발하는 포대에 중상을 입었다. 이 작은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훨씬 큰 비르구와 샌글레아를 함락시키려면 얼마나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지 계산도 되지 않았다. 



몰타출신 화가가 그린 드라구트의 죽음입니다. 보통 이런 역사화는 훨씬 이후에 그렸기 때문에 고증으로 참조할 수 없습니다. 이 그림도 300년 후의 작품입니다. 그냥 분위기만 보면 됩니다. 


무스타파는 기사단의 강경한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포로로 잡은 기사의 팔다리를 자르고 십자가에 못박고 시체를 그랑항에 띄웠다. 발레트는 모든 투르크 포로의 목을 자르고 머리를 투르크군 진영으로 날려 보냈다. 

양쪽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했다. 항복협상은 물론이고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셈이었다. 


한 여름이 되자 성 엘모요새가 함락되었다. 몰타섬 전체가 엄청난 열기에 끓고 있을 때에 쿠투르크 전군이 비르구와 샌글레아로 접근했다. 발레트는 적의 공격을 기다리던 중에 반가운 보고를 들었다. 시실리에서 출발한 600명의 병사와 42명의 기사가 어둠을 틈타 봉쇄망을 뚫고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기사단의 사기는 크게 올랐고 교회 종소리는 반도 전체를 울렸다. 투르크군은 구원군 규모를 잘못 판단했거나 그 동안의 누적된 피해가 너무 컸던지 로도스섬에서와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무기와 깃발을 그대로 지니고 섬 밖으로 빠져나가도 좋다는 제안이었다. 

발레트는 투르크군은 성벽 아래에 쌓인 시체더미만 가질 수 있다며 제안을 거절했다.  


7월 초, 투르크 포대가 불길을 뿜고 동시에 무스타파는 육상과 해상 양면에서 샌글레아를 공격했다. 그동안 반도 전체에 장벽을 세우는데 치중했던 몰타 비정규군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수영솜씨가 대단했던 그들은 투르크 보트가 수면아래의 장애물에 걸려 꼼짝 못하는 동안 적을 물로 끌어내려 익사시켰다. 해안가는 그렇게 익사한 투르크병사의 시체가 가득했다. 

무스타파는 공격효과를 높이기 위해 예니체리를 가득 태운 대형보트 10척을 샌글레아 반대편의 낮은 성벽쪽으로 보냈다. 

성벽에 숨겨 놓았던 대포가 보트를 불덩어리로 만들어 800명 이상을 죽였다. 



강습으로 요새를 점령하지 못하자 포대로 비르구 성벽을 부수기로 했다. 굉음과 연기가 반도 전체를 뒤덮었다. 포격은 4일 동안 계속되었고 160km 밖에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8월 7일, 마지막 포성이 사라지자 수천 명의 병사가 구멍이 숭숭 뚫린 성벽으로 달려갔다. 

투르크군은 기를 쓰고 성벽을 돌파했지만 기사단의 준비가 더 철저했다. 안에는 성벽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었고 투르크군은 십자포화에 학살당했다. 

샌글레아에 대한 동시공격은 그런대로 성공을 거둬 성 미카엘요새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양쪽 모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퇴각명령이 떨어졌다. 구원군이 온다는 보고를 받은 무스타파는 황급히 병력을 거둬 구원군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현재의 비르구요새입니다. 당시의 화력으로는 무너트릴 수 없는 무척 단단한 요새입니다. 


므디나에 있던 기병대가 위기의 순간에 투르크 본진에 뛰어 들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부상병을 모두 죽였다. 무스타파의 착각으로 투르크군은 어렵게 얻은 교두보를 다시 내주고 말았다. 

8월이 그렇게 지나갔고 포격은 그치지 않았다. 투르크군은 샌글레아 성벽과 카스티야 보루 아래로 굴을 팠다. 

고참기사단원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성 안젤로요새 안으로 들여보내자고 간청했지만 발레트는 거절했다. 성 안젤로요새는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항전이 무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발레트는 그 동안 수비대와 함께 영웅적인 전투를 벌여온 몰타주민을 절대로 버릴 수가 없었다. 


8월 18일, 카스티야 보루 아래에서 폭발이 일어나면서 보루의 벽이 크게 무너졌고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투르크군이 쏟아져 들어갔다. 수비군은 공포에 질려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때에 71살의 기사단장이 빌린 철모와 창을 들고 투르크군을 가로 막았다. 

제 정신을 차린 수비군은 앞으로 달려 나가 투르크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발레트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는데도 투르크군이 밖으로 물러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공성전이 계속 늘어지면서 투르크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여갔고 피알리는 바다상황이 걱정되었다. 무스타파는 트리폴리, 그리스, 콘스탄티노플에서 증원과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는데 기독교 증원군 8,000명이 섬 북쪽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정 마리아 탄생축일인 9월 8일, 투르크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만신창이가 된 수비군이 성벽 밖에 버려진 공성무기와 참호를 발견했다. 원래 황량했던 섬이지만 이제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성벽은 금이 가고 무너졌지만 기사단은 기적처럼 요새를 지키고 투르크군을 물리쳤다. 



오스만 투르크군은 30,000명 중 24,000명을 잃어 궤멸되었고 성요한기사단은 9,000명 중 3,000명을 잃었습니다. 



1565년 몰타섬의 성요한기사단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오스만 투르크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6년 후에 레판토Lepanto해전에서 신성동맹Holy League은 투르크함대를 격파하고 오스만 투르크의 지중해 지배를 완전히 끝냈다. 

성요한기사단은 전멸위기에서 화려하게 부활해 다시 한 번 이슬람상선과 교역로를 차단했다. 


죽다 살아난(?) 성요한기사단은 그 이후 200년 동안 이슬람해군과 상선을 괴롭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