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시장 후보토론회가 무척 재미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연식이 좀 있다보니 보통 후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에 토론회를 보지 않아도 아이맥스 3D 수준이라 안보는데, 지난번 대선 때의 박근혜만큼이나 웃겼던 모양입니다.
특히 소파 그리고 현대중공업 산재 답변이 무척 재미있었다는군요. 남에게 전해들으니까 재미있는데 직접 봤으면 뒷목 잡을 뻔 했습니다. 경영은 딴 사람이 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면서 왜 평소에 기업 경영경력을 운운할까요?
어쨌든 이 분의 좌충우돌 코미디가 재미있어서 계속 보고 싶기도 하지만, 함량미달들이 지도층에 토치카와 지하벙커를 만들고 있는 불행을 생각하면 답답해집니다.
2차대전 당시의 초중전차 - 프랑스와 일본편
프랑스가 무슨 초중전차? 하시는 분이 많을텐데, 그럴 만도 합니다. 2차대전 극초반에 일방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프랑스가 매우 약한 나라처럼 오해를 받고 있는데 사실은 전차전력만큼은 독일을 압도했습니다. 호치키스나 르노도 그렇고 소뮤아Somua 같은 전차는 독일군의 1~2호 전차로는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전차였습니다.
혹시나 태클을 거는 분을 위해, 독일군의 뛰어난 전략전술과 프랑스 지휘부의 오판때문에 프랑스가 일순간에 무너졌을 뿐이지 전차에서는 1:1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380)
지난 이야기의 영국처럼, 프랑스도 1차대전 후에 초중전차를 기획했었습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샤르 2C(Char 2C 또는 FCM 2C)가 바로 그 모델입니다. 무게는 앞서 소개한 전차들에 비해 그리 무겁지 않지만 크기는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한글 위키 자료는 오류가 워낙 많아서 영문 위키를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승무원이 12명이나 되는데 그만큼 무장이 많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전차 중에는 독일의 마우스Maus에 맞먹는 크기였는데 원래 개발목적은 1차대전 당시에 개발되어 실전에는 투입되지 못했습니다.
이 전차의 개발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반전이 있습니다.
1916년 여름, 프랑스 정부는 FCM(프랑스 조선회사, Forges et Chantiers de la Méditerranée)에게 중전차 개발을 의뢰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비리가 꽤 심했었던지 군과 군수업체가 결탁하고 군수 프로젝트를 꽤 많이 진행했지만 서류 상으로만 머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과가 없는데도 대금은 지급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전쟁이 그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무수한 목숨을 굶겨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황당하게도 영국 중전차를 해군 쪽에서 개발했다는 이유만으로 FCM에게 프랑스 중전차 개발을 의뢰했고, 그나마도 어떤 요구사항도 주지 않았거나 중간에서 사라졌습니다. 당연히 FCM은 대금만 받고 아무런 개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전차개발은 극비였기 때문에 극소수의 관련자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비리였습니다.
불과 몇개월 후에 영국이 마크 1 전차(사진)를 전장에 투입하면서 전차는 모든 국민의 초관심사가 됩니다. 솜Somme 공세가 실패로 돌아갈 것이 분명해지고 전차가 새 희망으로 떠오르면서 프랑스 국민도 전차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전차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던 정치인도 요란한 목소리를 내면서 깜짝 놀란 모레 장군은 FCM에게 그 때까지의 작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르노 사가 몇 개월 전에 자주포 몇 가지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모레는 르노에게 FCM를 도와달라고 간청하고 FCM에게는 무조건 전차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프랑스 정부도 영국에게 마크 1을 달라고 했다가 확답을 받지 못하자 1917년 1월에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만들게 됩니다. 무조건 영국전차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하게 만들되, 최소 40톤 이상의 무게, 3.5m 참호를 건널 수 있고 경포는 무시할 방어력을 구체적으로 요구합니다.
르노는 르노Renaut FT(그림 참조, 8mm 기관총형과 37mm 중무장형)라는 혁명적인 경전차를 개발하고 있었고 중전차에 대해 내부에서 타당성 조사 등을 이미 마친 상태였습니다. 눈깜짝할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1월에 105mm포, 35톤, 38mm 장갑의 목업전차를 내놓았고 프랑스 정부는 공기압 트랜스미션과 전기 트랜스미션 2가지의 원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전차군 사령관 쟝 밥티스 유진 에스티엥(Jean Baptiste Eugène Estienne)은 중전차 프로젝트가 현실적인 르노 FT 경전차의 모든 자원을 흡수할 것으로 염려하고 강력히 반대하고 나섭니다. 모레가 중전차 프로젝트 외에 다른 전차개발을 중지시키라고 하자, 그는 총사령관 조프리에게 위급한 전선에 당장 필요한 경전차가 현실적이라며 영향력을 간청합니다.
정부관료와 정치인이 중전차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고사령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중전차개발은 계속되었지만 다행히도 르노 경전차 개발과 생산도 계속될 수 있었고 에스티엥의 강력한 반대로 105mm가 아닌 75mm 무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조프리 후임 사령관인 로베르트 니벨르는 조프리보다 더 강력하게 경전차 생산을 요구하고 생산예정이던 슈나이더 CA1(Schneider) 경전차(사진참조, 소뮤아 자동차회사 생산)가 예정대로 생산될 수 있게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중전차 개발을 지지하고 철회하는 혼란을 겪으면서 샤르 전차는 생산취소되는 위험까지 겪었다가 종전 후인 1920년에 10대가 생산되었고 1921년까지 공장에서 개선작업을 거쳤습니다.
앞의 사진에서 봤듯이 전기병과 보조 전기병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대장까지 탑승하는 거대전차였고 이후 신형전차가 속속 개발되면서 야적장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독일과의 전쟁이 터지자 10대 모두 전장으로 불려나왔습니다만 이미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에 선전목적으로만 사용합니다.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영상물의 단골 출연자였고 무적의 전차로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작전에 절대로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프랑스 전방이 무너지자 프랑스군은 샤르 전차 10대를 모두 열차에 태워 후방으로 대피시켰지만 선로파괴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자 자폭시켰습니다. 독일군은 스투카로 폭격해서 부쉈다고 선전전을 펼쳤고 다행히 살아남아 노획된 샤르 1대가 종전 후에 영국으로 넘어갔다가 깜쪽같이 사라졌고, 러시아 쿠빙카 전차박물관에 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샤르 전차의 기동장면을 한 번 보시죠. 당시에는 전차전이 없었고 적의 참호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 전차의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중전차 개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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