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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핀란드의 기적, 수오무살미 전투(2부)

by uesgi2003 2014. 4. 7.


아무리 미워도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저 소비자와 파트너 위에 군림하던 못된 관습에서 벗어나는 따끔한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런 기업들이 국내에 많죠. 재벌부터 재벌로 착각하는 일부 기업까지요. 


현기차는 수입차를 포함하면 지난 달 시장점유율이 65% 아래로 떨어졌다는 반가운 소문이 들리더군요. 50% 부근까지 가면 해외시장을 제쳐두고 국내 호갱님을 고객님으로 만드느라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할 겁니다. 부디 그 이전에 국내 고객부터 최우선으로 챙기는 기업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년 만에 적자전환 남양유업..대외 이미지 회복이 첫 단추 

... 
먼저 실적이다. 1994년부터 실적 공시 이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기준 영업이익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전년보다 9.9% 줄어든 1조2298억원. 영업손실은 175억원, 당기순손실은 455억원으로 적자전환했다. 

남양유업은 1997~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흑자를 기록했다. 그만큼 기초 체력이 탄탄했다. 하지만 대리점 밀어내기와 영업사원 막말 파문으로 추락한 대외 이미지는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핀란드의 기적, 수오무살미 전투(2부)


소련군의 전차가 두텁게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려고 하면 모험정신이 강한 핀란드군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전쟁위기가 고조되었을 때에 공기를 채운 대전차지뢰를 충분히 띄워놓았고 호수와 함께 얼어붙었다. 폭발음과 함께 전차가 호수 아래로 가라앉았고 불운한 전차병은 그 자리가 무덤이 되었다. 도로도 막히고 우회로도 막힌 소련군의 전진은 이제 멈춰졌다. 

헬싱키는 고사하고 근처의 대도시도 멀어보였다. 12월 첫 주 동안 남부의 소련군은 만네르하임 방어선도 못 넘어섰다. 


그렇지만 훨씬 북쪽의 수오무살미 방면의 공격은 성공가능성이 높아보였다. 11월 21일, 레닌그라드 군사구 사령부는 제9군 사령관에게 "제9군은... 카자아니Kajaani 방향으로 진격해서 가능한 한 빨리 오울루를 점령할 것"이라고 명령했다. 

상당히 좋은 전략이고 당연한 목표였다. 제9군이 성공하면 핀란드의 허리는 끊어지고 북쪽과 남쪽의 통신과 보급로는 단절되어 만네르하임 방어선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제 작전의 성공은 제9군, 특히 제163과 44 소총사단에게 달려 있었다. 



다시 한 번 지도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소련군이 노리는 정확한 지점은 수오무살미라는 행정마을이었다. 러시아 국경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으로 호수와 숲이 얽힌 복잡한 소도로가 만나는 교차점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지역주민은 키안데르Kyander 중령이 지휘하는 Er P-15 대대(핀란드 북부집단군 소속)를 만들었다. 1,000명이 채 안되는 병력과 별 도움이 안되는 국경수비대 2개 소대만으로 소련 정규군 2개 사단을 막아내야 했다. 키안데르는 즉시 증원을 요청했다. 


북쪽 35km에서는 새로 생긴 도로를 따라 제163 소총사단의 2개 연대가 내려왔다. 이들은 한심스러운 수준의 징집병이었지만 대단한 포병화력과 전차 1개 대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남쪽 35km에서는 3개 연대가 집결하고 있었고 제44 소총사단도 투입되기 직전이었다. 특히 44사단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정예사단이어서 가장 큰 위협이 되었다.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 달리, 소련군은 위장복이나 월동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겨울에 전쟁을 벌였습니다. 반면에 핀란드군은 사진과 같이 스키와 위장복을 착용하고 소련군을 상대합니다. 


병사 개인의 수준으로 비교하면 핀란드군이 월등했다. 그들은 예비역이었고 훌륭한 장교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지리에 능통했고 원래부터 숲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더구나 교본과 정치에 얽매여 꼼짝도 못하는 소련군과 달리, 상황에 맞춰 언제라도 작전을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단점이 장점이 되었다. 이들은 무전기가 없어서 전화선을 이용해야 하는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무선교신을 도청당할 위험이 전혀 없었다. 소련군은 적에 대해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공격에 나섰다. 


핀란드군도 북쪽에서의 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신임 지휘관 시일라스부오Siilasvuo 대령은 수오무살미에서 병력을 소개시켜서 소련군에게 미끼로 내놓았다. 북동과 남동쪽에서 협공하던 제163 사단은 수오무살미를 손쉽게 점령했다. 12월 7일, 블라디미르 젤렌촙Zelentsov 장군은 마을에서 병력을 합류시켰다. 마치 모스크바에 들어온 나폴레옹처럼 다음 작전계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44 사단이 보이지 않았다. 


핀란드 통신감청팀은 제9군의 통신을 계속 감청해왔고 허리를 노리던 협공 중 한쪽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알자, 시일라스부오 대령은 바로 반격에 나섰다. 헌병까지 동원한 그는 도로에 길게 늘어선 소련군 163사단의 대열을 토막내며 공격했다. 



163사단은 도로 위에서 20km 가까이 늘어서 있었고 겨울의 혹독한 추위때문에 보급품이 급격하게 소진되고 있었다. 핀란드군의 기습공격에 몰린 소련군은 마을로 들어가 버려진 헛간과 집에 틀어박혀 방어에 급급했고 핀란드군은 급박한 상황을 보고받은 만네르하임 원수의 지원을 받아 계속 보강되었다. 


겨우 1개 연대가 소련군 1개 사단을 마을에 몰아넣는 동안, 시일라스부오 대령은 새로 구성된 제9 사단을 이끌고 남쪽의 소련군 사단을 노렸다. 라아테Raate 도로를 따라 수오무살미로 이동하던 제44 사단의 전차와 장갑차 선봉대는 핀란드군의 미미한 저항을 뚫고 전진 중이었다. 그들이 마을로 가서 163사단을 구해내고 합류한다면 겨울전쟁은 그대로 끝날 수도 있는 절대절명의 상황이었다. 


12월 14일, 겨우 350명의 핀란드군이 호수사이의 좁은 도로를 막아섰고 얼어붙은 호수로 우회하는 소련군은 기관총세례를 받았다. 마치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레 전투처럼, 350명의 핀란드군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44사단은 백병전까지 벌였지만 수오무살미로 접근하지 못했다. 

결국 23일, 탈진한 소련군 선봉대가 뒤로 물러섰고 악전고투끝에 제자리를 지킨 핀란드군은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국경쪽 도로를 탈환해서 35km 정도의 도로에 44사단을 가둬두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소련군 2개 사단은 서서히 전멸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북쪽에서는 반격을 거듭해서 163사단을 작게 나누어 포위했고 시간은 핀란드편이었다. 고립되어 보급품을 받을 수 없었고 북극쪽 숲쪽 방향만 열려있었다. 병사들은 무기를 던지고 마치 추위를 피하는 가축들처럼 모여서 북쪽으로 향했다. 

수오무살미를 탈환한 핀란드군은 소련군이 남겨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부상으로 죽은 시체보다 얼어죽은 시체가 더 많았다. 



위장복조차 갖추지 않은 소련군의 처참한 최후입니다. 독일군도 마찬가지로 소련을 얕잡아보고 첫 번째 겨울을 보냈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히틀러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을 멸시하는 편견을 굳혔을 뿐, 소련군이 준 교훈은 얻지 못했습니다. 


핀란드군은 달아나는 소련군과 포로에게 동정을 베풀었다. 한 소련군 포로는 자신이 아르한겔스크Archangel의 어부이며 아내와 신발을 사러 시내로 갔다가 정치위원에게 붙잡혀 전쟁에 나오게 되었다고 밝혔다. 정치위원은 "왜 이렇게 건강한 젊은이가 놀러다니는가? 핀란드에 병사가 모자라는 판에"라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다. 163사단 대부분이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들이 달아난 북쪽 숲은 절대로 사람을 반기지 않는 혹독한 곳이었다. 

163사단은 5,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고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1939-40년 겨울 당시, 핀란드의 도로는 이런 모습이 흔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핀란드군은 이제 남쪽에 고립된 44사단에게 눈을 돌렸다. 23일에 있었던 작전에서는 핀란드 1개 대대가 겨우 2명의 부상피해만으로 100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렇지만 핀란드군의 최우선 공격목표는 소련군보다 야전보급차였다. 

44사단 안톤 비노그라돕Vinogradov 장군은 보급로를 열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고 일선장교에게 무조건 후퇴하라고 거듭 명령했다. 새해가 되자 비노그라돕도 패해를 인정해야 했다. 1월 4일, 모스크바에 새 명령을 요청했고 1월 8일에 소련 국경으로 다시 넘어갔다. 

한 때 정예사단이었던 44사단은 이름만 남은 사단이 되었다. 1,000명 전사, 1,500명 부상, 최소 2,250명 실종의 피해를 입은 44사단은 몇 개월 동안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다. (비노그라톱은 다른 주요 지휘관과 함께 군법에 회부되어 즉결처형당했습니다. 스탈린은 군 지휘관을 정치적 이유로 마구 숙청하던 시기라 후퇴하는 지휘관은 당연히 숙청대상이었습니다.)



소련 북서전선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세묜 티모센코Timoshenko 장군은 바로 작전을 중단시키고 6주 간에 걸쳐 만신창이가 된 병력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군 전략전술에도 개입하던 공산주의 원리를 걷어내는 개혁도 진행되었다. 

북서전선군은 훈련과 보급을 통해 새로 구성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핀란드군은 "놈들이 현장실습을 하네"라고 농담을 던졌다. 


소련군은 1940년 2월 초가 되자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군대와 전술을 동원했다. 결연한 의지로 만네르하임 방어선에 구멍을 내기 시작했고 핀란드군의 격렬한 저항을 하나씩 진압하며 조금씩 전진했다. 

티모센코는 전투 후에 새로운 병력으로 순환교체시키며 핀란드군을 쉬지 못하게 밀어붙였고 헬싱키로 향하는 비이푸리Viipuri를 공격했다. 


위기에 몰린 핀란드는 3월 12일, 평화협상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카렐리야 지협을 포함한 국토의 10% 이양조건에 헬싱키는 공식적인 국치일(아래 사진 참조. 조기게양)로 정했고 스키를 타고 고향에 돌아온 핀란드의 역전용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분노했다. 




15개월 후에, 대소련 전쟁(Continuation War, 또는 후속전쟁)에서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소련에게 보복을 시작했다. 





독일의 지원을 받아 3호전차로 무장한 핀란드군입니다. 


마무리는 핀란드가 소련의 반격에 밀려 본토 방어전을 벌이던 탈리-이한탈라(Tali-Ihantala, 1944년 6월 24일~7월 9일) 전투 영화의 한 장면으로 해야겠습니다.


당시 핀란드군은 독일군 장비를 사용했지만 독일군 전차가 워낙 귀하기 때문에 노획한 소련군 전차로 무장한 것으로 나옵니다. 대신에 T-34부터 KV-1까지 다양한 눈요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전차전을 비교적 제대로 표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