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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쌍굴다리 전투

by uesgi2003 2014. 6. 11.


독일 본토 방어전으로 가볼까? 영국해적 이야기? 로마 이야기? 좀 고민하다가 6월 한 달은 한국전쟁 연재로 결정했습니다. 한국사와 중국사는 저보다 많이 아는 분이 많고 좋은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제 역사 이야기에서는 제외시켰었는데, 연합국 시각의 전사는 별로 없어서 순서에 상관없이 주요 전투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부산 방어전, 장진호 전투, 삼각고지 전투, 포크 찹 고지 전투, 후크 고지 전투 등으로 연재할 계획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았던 쌍굴다리 전투로, 가장 추운 겨울Coldest Winter의 저자 데이비드 할버스탬David Halberstam의 한국전쟁 기록입니다. 참고로 '콜디스트 윈터'는 한국전 관련 도서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책입니다. 유명 전투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지만 다른 자료가 설명하지 못하는 큰 그림을 상당히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중공군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지원군Chinese People's Volunteer Army입니다. 무장과 훈련이 잘 된 정규군이었지만 미국과의 공식적인 전쟁을 피하기 위해 지원군이라는 명칭을 가졌습니다. 제 이야기에서는 편의상 중공군으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자료를 인용하기 때문에 앞으로 연재순서는 시대순이 아닙니다. 

콜디스크 윈터의 저자가 본 가장 처참했던 전쟁, 한국전쟁 -  쌍굴다리 전투

데이비드 할버스탬은 한국전쟁을 "가장 처참한 전쟁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는 2007년 초에 비극적인 사고로 목숨을 잃기 직전에 자신의 최고작을 마무리지었다. 콜디스트 윈터는 지도층의 거짓말과 전장의 용기를 정확하게 분석해서 잊혀진 전쟁이 더 이상 망각되지 않게 했다. 그가 전하는 쌍굴다리Twin Tunnels 전투는 미군 정찰대가 겨울철 황량한 고지에 고립된 상태에서 40배가 넘는 적을 상대한 전투의 고전이다. 


쌍굴다리 전투 지도입니다. 1951년 1월부터 2월까지 벌어진 쌍굴다리 전투, 지평리 전투와 원주 전투는 한국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고립되었지만 무장이 잘 갖춰진 기지가 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숫자가 많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술은 베트남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지평리 전투에서는 미군 연대와 프랑스군 대대가 중공군 5,000명을 사상시킨 대전과를 올렸습니다. 일련의 전투는 시련 속의 리더십Leadership in the crucible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고

http://books.google.co.kr/books?id=emmT6xcT7QgC&pg=PA126&hl=ko&source=gbs_toc_r&cad=4#v=onepage&q&f=false

에서 원서를 읽을 수 있습니다.  


1951년 지평리에서 2개의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쌍굴다리 전투가 벌어졌는데 중공군은 UN군에게 거의 이길 뻔 했다. 이 전투는 다시 지평리 전투를 불러왔다. 두 전투는 중앙통로를 통해 남쪽으로 이어지는 수송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지평리는 서울에서 동쪽으로 약 80km, 38선에서 남쪽으로 74km, 원주에서 북서쪽으로 24km 지점에 있었고 쌍굴다리는 지평리 남동쪽 5km 떨어져 있었다. 


미국 지휘부는 통신 요충지인 원주를 장악하려면 지평리 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월 말, 릿지웨이Ridgway 병력이 서쪽에서 첫 번째 기동을 시작했고 제2 사단은 동쪽에서 측면을 보호하는 동시에 지평리 부근으로 이동해서 중공군 제42 군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릿지웨이 정보망은 중공군이 중앙통로 어디엔가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두 군대의 가장 큰 차이였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도 미군은 중공군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미군은 마치 애완동물가게의 하마처럼 한 눈에 파악되었다. 


장진호 전투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을 보였듯이, 미군은 한국전쟁 초중반까지 도로를 벗어나지 않아 중공군의 손쉬운 목표가 되었습니다. 중공군이 중화기를 더 많이 배치시켰다면 장진호 전투는 전사에 기록될 참사가 되었을 겁니다. 
반면에 중공군은 아래 사진과 같이 산악 교통로를 이동해 연합군의 배후로 침투했습니다. 


쌍굴다리 전투는 정찰과 2번의 전투가 있었고 점차 격렬해졌다.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제8 군의 번개Thunderbolt 작전이 1월 26일에 시작되었고 27일에 모리스 펜더슨 중위의 정찰대가 처음으로 쌍굴다리를 정찰했다. 펜더슨은 군우리 전투(평양북부에서 벌어진 격전) 직후에 23연대에 새로 배속되었는데 그는 평생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는 베이커 중대의 제1 분대를 이끌고 철도와 쌍굴다리가 있는 곳을 정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강을 수복하려는 썬더볼트입니다. 중공군의 우회침투에 악전고투를 겪은 연합군은 이제 종심진격이 아닌 측면 부대와 연결된 전선 전체의 진격으로 전략을 바꾸게 됩니다. 


그 지역에는 중공군 부대가 있다는 미확인 보고가 들어왔다. 펜더슨은 그냥 가서 확인만 하고 오라는, 별 것 아니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경악할만한 임무였다. 미군 전선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분대가 차를 타고 나서기도 전에 이미 적진 깊숙히 들어와 있었다.  그는 언제라도 매복에 걸릴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2차대전에 참전했고 프랑스를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패튼 전차군과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문제가 생겨도 구원할 부대가 없었고 스스로 빠져나와야했다. 

정찰대는 굴다리 남쪽 1.5km 지점까지 매우 신중하게 다가갔다. 거기에서 중공군으로 보이는 적과 잠깐 충돌한 후에 바로 부대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이튿날 제8 군 사령돤 에드워드 알몬드의 명령에 따라, 연대장 프리먼은 좀 더 과감한 정찰을 하기로 하면서 쌍굴다리 전투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섰다. 인접한 24사단의 21연대에서 1개 중대를 차출하고 자신의 23연대에서 찰리 중대를 차출해서 2개 중대 규모의 정찰대를 내보냈다. 찰리 중대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반 가량이 신병이었고 보병전술훈련을 받은 사병이 거의 없었다. 이호리에서 합류한 두 중대는 쌍굴다리로 향했다. 


4명의 장교와 56명의 사병으로 꾸려진 단촐한 정찰대였지만 BAR(분대지원 자동화기) 8정, 중기관총 2정, 경기관총 4정, 로켓발사기 1문, 60mm 박격포 1문, 57mm와 75mm 무반동포 1문으로 중무장했다(2대의 트럭과 9대의 지프를 이용한 이동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무장이었습니다.) 전투를 벌이지 말고 후퇴하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절반의 병력이 중화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정찰기가 떠 있었다. 

원래 작전장교인 멜 스테이 대위는 이호리에서 본대로 돌아가기로 했었지만 정찰기와 교신할 수 있는 무전기가 그의 지프에 있었기 때문에 쌍굴다리까지 가기로 했다. 한국의 전형적인 겨울날씨로 도로가 얼어붙어 속도가 나지 않았고 아침 안개때문에 정찰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예정보다 훨씬 늦게 쌍굴다리에 도착했다. 찰리 중대장 미첼은 터널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나머지 병력을 기다리고 있었고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머피의 법칙대로 모든 일은 틀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찰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스테이 대위가 부근의 신촌 마을을 정찰하겠다고 자원했고 지프를 길 옆에 세운 후에 마을로 걸어들어갔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운전수는 즉사했고 그는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정찰기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무전기가 파손되었다. 

이제 지상병력과 하늘의 눈과귀를 연결할 방법이 없었졌다. 하늘에 있던 밀러드 엔겐 소령은 쌍굴다리 근처의 453고지에서 상당한 병력이 아군을 향해 빠르게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미첼 중위에게 빨리 계곡에서 빠져나오라고 무전교신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무전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이미 정찰대는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정찰기는 재급유를 위해 본대로 돌아갔고 연대본부에 연락하기도 전에 정찰대는 전멸할 위기에 몰렸다. 



무반동포로 보이는데 미군답게 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정찰대가 개활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중공군의 함정에 빠졌다. 막 점심을 먹으려던 순간에 박격포가 터졌고 총탄이 쏟아졌다. 운전수는 즉시 차를 돌리려고 했지만 길이 너무 좁아서 지프도 돌리기 힘들었다. 겨우 차를 돌렸을 때에는 선두의 지프가 집중사격을 받았고 운전수는 겁에 질려 차를 그대로 두어 길목을 막아버렸다.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미첼과 다른 중대장 뮬러 사이에 의견차이가 생겼다. 뮬러는 고지대로 올라가 참호를 파자고 주장했지만 미첼은 도로로 강행돌파하자고 주장했다. 뮬러는 미첼에게 소리쳤다. "저 위의 고지로 올라가야 해. 중공군도 고지로 올라갈테니까 그것만이 살 길이야!"

중공군도 같은 결정을 했기 때문에 양쪽이 모두 고지로 경주를 벌였고 미군은 중화기를 모두 버리고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고 올라갔다. 정찰대는 로켓 발사기 1문, 경기관총 1정과 몇 자루의 BAR만 챙겼다. 


근처 고지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고지대로 간신히 올라간 병사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통 땀에 젖었다. 자신들도 그런 초인적인 힘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놀라고 있었다. 다행히도 탄약 운반병이 제 역할을 다해주었다. 만약 그들이 탄약상자마저 뒤에 버리고 왔다면 정찰대는 하루를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약 40명 정도가 고지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화기를 뒤에 남겨뒀지만 8자루의 BAR이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반자동 소총인 BAR은 보병의 듬직한 친구로 단발이나 연발로 사격할 수 있기 때문에 병사들이 선호했다. 한 명이 사격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이 20발 들이 탄창을 끼웠다. 



9kg이나 되는 BAR(Browning Automatic Rifle)을 역시 미군답게 쏘고 있습니다. 다른 병사의 모습을 보니 사격연습으로 보입니다. 


얼마나 공포에 질렸던지 BAR를 운용하던 두 병사가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중공군은 끊임없이 올라왔고 곳곳에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BAR 한 정의 탄약은 겨우 160발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함부로 사격할 수 없었다.

BAR 사수 한 명은 총탄을 맞고 오른손의 손가락 두 개를 잃었는데도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부사수가 그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사수는 백만 달러짜리 부상을 당했다며 이제 고향에 갈 수 있다며 허세를 부렸다. 자신에게 여자친구의 전화번호를 주면 귀국해서 전화를 걸겠다고 농담도 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부상자가 늘어나자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라이프 잡지의 유명한 종군기자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uncan이 장진호 전투에서 찍은 해병의 모습입니다. 병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을 원하나요?" 한참 후에 멍한 표정으로 간신히 입을 열며 대답했습니다. 

"내일이요."


손가락을 잃었던 사수가 이번에는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뒤로 옮겨졌지만 이번에는 수류탄이 다리 근처에서 터져서 두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그는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다.

"제발 좀 입닥쳐!" 미첼 중위가 말했다.

"제 다리가 떨어져나간 것 같다구요."

"알아. 그래도 입 좀 닥치고 있어." 

중위가 더 이상 뭐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에 다시 총격을 받은 그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거의 모든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중대장은 돌아다니며 부상을 입어도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들의 비명과 신음은 적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었다. 새벽이 되자 군 정찰기가 중공군 진지에 신호탄을 쏘고 제트기의 폭격을 유도했다. 그리고는 정찰대에게 다가와 탄약과 의료품 상자를 투하했다. 정찰기의 조종사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낮게 날았지만 대부분 방어선 밖에 떨어졌고 하나만 정확하게 떨어졌다. 정찰대는 용기를 얻었다. 도대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노란 테이프가 아래로 드리워졌다. "아군이 남쪽에서 접근 중. 조만간 구원할 것임." 아군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 것일까? 만약 하루를 더 있어야 한다면 아무도 구원군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어둠이 내리면 다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테고 중과부적이었다. 실제로 중공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미첼은 중공군의 머리를 보기 전에는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23연대장 프리만은 정찰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공중지원을 요청했다. 정찰기는 최소한 중공군 2개 대대병력이며 연대병력이 넘어갈 수도 있다고 보고했다. 60명으로 2~3,000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는 쌍굴다리에 가장 가까이 배치된 제2 대대에게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스탠리 티렐 대위는 167명의 병력과 중화기를 이끌고 나섰다. 

티렐의 공격은 소규모 작전 중에서 손꼽을 정도로 훌륭했다. 지원병력은 오후 5:30에 부근에 도착했고 중공군은 건너편 고지 453에서 사격을 퍼부어댔다. 티렐의 운전수는 차를 도랑으로 몰아넣고는 "대위님, 도랑에 몸을 숨기는게 좋겠습니다. 짱깨가 죽일 겁니다"라고 외쳤다. 티렐은 "빌어먹을 짱깨놈들"이라고 대답했다. 


티렐은 계곡에서 가장 높은 고지 453을 점령하기로 했다. 2개 분대가 양쪽에서 고지로 올라가는 동안 다른 분대가 박격포와 중기관총으로 엄호했다. 양쪽에서 공격을 당한 중공군은 고지를 버리고 달아났다. 중공군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이날 만큼은 달랐다. 

티렐은 즉시 고지 주변에 강력한 방어선을 폈다. 원래는 밤동안 고지를 지키다가 아침에 구원공격을 할 생각이었는데 정찰대에서 운좋게 빠져나온 의무병이 다급한 소식을 전했다. 탄약이 거의 떨어졌으며 3/4는 이미 죽거나 부상을 당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이었다. 티렐은 야습을 감행하기로 했다. 


멀리 먼지 구름이 이는 것으로 보아 지원군의 지프와 트럭이 가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 시간에 올 수 있을까? 중공군은 이미 3~40미터 거리까지 다가왔고 공격을 당할 때마다 병력은 줄어들고 있었다. 전날의 부상병은 이미 죽었고 대부분은 제대로 사격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었다. 전사한 아군의 몸을 뒤져 탄약을 찾아내야 할 판이었다. 

마침 그 날이 생일이었던 윌슨은 그저 본토에서 음료수나 마시며 보내는 생일이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딸을 이제 못 본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중공군이 다가오자 마지막 남은 수류탄의 핀을 뽑았지만 중공군이 물러섰다. 마지막 무기를 허비할 수 없어서 손에 꼭 쥐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꿈에서 중공군이 참호에 들어왔고 중위가 가르쳐준대로 죽은 채하고 누워있었다. 그런데 지원군이 다가와 옆구리를 걷어차는 장면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실제로 티렐의 지원군이 고지 아래에서 중공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대단한 총성이 울리더니 쥐죽은 듯이 조용해져서 지원군이 전멸한 것으로 생각했다. 저녁 11시 경에 총을 쏘지 말라는 영어가 들렸다. 

"로즈 볼 경기에서 누가 이겼지?"

"젠장. 한국에 와있는데 도대체 누가 이겼는지를 알아? 올라간 팀도 모른다."


전사자까지 옮기는데 4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윌슨은 여전히 뇌관이 뽑히지 않은 수류탄을 들고 있었다. 처음 출발한 60명 중에 13명이 죽었고 5명이 실종이며 30명이 부상을 당했다. 12명만이 온전했고 그 중에 한 명이 윌슨이었다. 그는 21번째 생일을 중공군과 함께 온전히 보냈다. 그 후부터는 어디를 가던 반드시 BAR이 있는 지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정찰대는 감사의 뜻으로 이런 배너를 걸었다. 


위험해지면, 티렐을 보내주세요. 



장진호 철수에서 기습을 받아 죽은 아군을 지나가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시체는 뒤에 오는 트럭이 모두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