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안내했던 독일군의 동부전선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이야기부터는 당분간 2차대전의 동부전선, 그것도 독일이 파죽지세로 이기던 시기가 아닌 중후반의 처참하게 붕괴되는 전투에 대해 올리려고 합니다. 누누히 강조하듯이, 인터넷 등에서 짜깁기 하는 것이 아니라 원서의 내용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고 있어서 용어나 표현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표현은 저자의 글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과도한 의역을 피하다 보니 좀 거칩니다만, 용어(특히 독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는 여러분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인용한 원서는 Paul Carell의 'Scorched Earth(초토화)' The Russian-German 1943-1944의 3/4부입니다. 여기에서는 소련과 러시아를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저는 러시아로 그냥 통일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독소전은 개전초기에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러시아와 독일 두 국가의 전투로 생각해서 혼동스럽게 사용하지 않았나 합니다.
한 동안 2차 대전 이야기를 올린 다음에 다시 다른 시대, 다른 대륙으로 이야기를 옮겨가도록 하겠습니다.
독일군 동부전선의 몰락
레닌그라드: 비극의 도시
20세기 공성전-하루 2조각의 빵-기아-총력전-즈다노프와 콤소몰-비밀명령과 그 배경-도시전체를 파괴하라
남부전선의 7개월에 걸친 격전이 1943년 1월에 드디어 끝났다. 남부전선은 무려 1,000km가 넘는 광대한 지역이었지만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으로만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쿠르스크(Kursk)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사에서는 도시 이름을 붙여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러시아영토에서의 전투는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를 둘러싼 함락과 탈환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도시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독일의 북부전선 전투도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독일과 러시아 모두의 불행이 시작된다. 붉은함대(Red Fleet)의 주둔지, 러시아의 문화중심지, 모스크바 다음으로 두 번째 큰 도시로 3,000,000명이 살고 있는 레닌그라드는 동부전선 북부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가 운송망의 중심이기도 했지만 스탈린이라는 이름 때문에 양쪽이 모두 집착했듯이, 레닌그라드(혁명 전에는 상뻬떼스부르크)는 공산주의의 예루살렘으로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 곳이어서 상징적인 의미가 대단했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히틀러의 치명적인 실수로 시작된다.
원래 바바로사 작전(독일군의 동부전선 전략)에서는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전에 북부집단군의 대규모 기갑군으로 레닌그라드를 함락하게 되어 있었지만, 히틀러가 레닌그라드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돌파한 레프(Leeb) 원수에게 공격대신 포위를 하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두데르호프 언덕(Duderhof Hills)와 스취르셀부르크(Schlusselburg) 요새는 이미 제36 기계화보병사단과 함부르크 제76 보병연대가 이미 장악한 상태였고 도시는 공황상태였다. 그저 시내 중심가로 걸어 들어가면 되는 그 순간에 히틀러는 작전을 취소시키고 기갑군을 모스크바 방향으로 돌린다. 그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대신에 말라 죽게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프러시아 동부부터 전투를 벌여 이제야 레닌그라드 문 앞까지 왔는데, 마치 실수였다는 듯이 다시 외곽으로 나가라는 것이 말이 돼?" 제1 기갑사단은 술렁거렸고, 일선의 불만을 알게 된 히틀러는 1941년 10월 7일 모든 전선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총통은 레닌그라드가 투항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 것을 다시 한 번 알립니다. 그 이유는 분명하고 전세계가 납득할 것입니다. 키에프(Kiev)에서 우리는 부비트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됩니다. 레닌그라드 곳곳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러시아도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저항하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입니다. 그리고 전염병 발생의 위험도 큽니다.
어떤 독일군 병사도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우리 전선으로 오는 모든 피난민은 단호하게 격퇴할 것이며, 러시아로 탈출하는 피난민은 막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지휘관은 총통의 뜻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에 대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를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댔기 때문에 장군들의 반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1941년 9월에 키에프를 점령한 후에 러시아군이 곳곳에 설치한 부비트랩에 많은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1941년 10월 말에 하르코프(Kharkov)를 6군이 점령했을 때에도 도시 전체에 폭탄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입수했었다. 러시아가 제대로 설치할 시간만 있었다면 6군은 잔해 속에 파묻혔을 수도 있다. 제68 보병사단의 그레그 브라운 장군은 1941년 11월 14일에 사령부건물이 폭파되면서 전사했다. 후르시체프(Khruschchev)의 사령부였던 이 건물은 새벽 4시 20분에 라디오 주파수로 터진 것이다. 전기 도화선과 고폭약이 모자라서 다른 곳에는 미처 설치하지 못한 것이었다.
레닌그라드를 지휘하는 즈다노프(Zhdanov)도 당연히 엄청난 폭탄을 설치했을 테고, 히틀러는 핀란드 정보원에게서 이것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실제로 1964년에 공개된 러시아의 자료에서도 레닌그라드의 폭탄설치를 확인해주고 있다.
공격중단 명령을 내린 지 4주 후에 히틀러는 궁금해하는 독일국민과 전세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프러시아 동부국경을 출발한 우리 병사는 레닌그라드까지 겨우 10km의 거리만 진격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도시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어떤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레닌그라드는 우리 손 안에 들어올 겁니다."
그의 장담은 빗나가고 이 치명적인 실수는 북부집단군의 붕괴, 더 나아가 패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히틀러는 도시 하나에 북부집단군 전체를 경계근무 서게 만들었고, 러시아가 레닌그라드에서 전쟁물자를 계속 생산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고, 외부와 연결된 오라니엔바움 협로(Oranienbaum pocket)을 봉쇄하지도 않았다. 핀란드 야전사령관 만네르하임(Mannerheim)의 표현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거운 배낭을 전쟁 내내 짊어지고”다닌 것이었다.
사진설명: 독일 동맹국으로 참전한 핀란드군입니다. 동맹국 중에서 독일의 지원을 가장 잘받았기 때문에 공군, 보병, 전차 독일군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2차대전 발발 전에 핀란드는 소련의 공격을 받았지만 적은 병력으로도 소련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겨울전쟁이 유명합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겨울전쟁이라는 영화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핀란드는 독일의 동부전선이 완전히 붕괴된 후에 소련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고 정전에 서명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동맹국 핀란드와 연결되는 동시에 여기에 갇힌 42개 사단을 괴멸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며칠 만 더 있으면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는데, 갑작스레 제4 기갑군과 제41 기갑군단을 빼낸 것은 덩케르크(Dunkirk)에서의 공격중단과 함께 가장 멍청한 실수였다. 결국 200,000~300,000명의 포로와 함께 러시아의 두 번째 도시를 차지하는 대신에 900일 동안 가만히 앉아 북부집단군의 전력을 낭비하고 패전에 이르게 된다.
히틀러는 왜 이런 이상한 결정을 내린 것일까? 왜 일선 지휘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까? 왜 바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지 않았을까? 그는 도시에 갇힌 공산주의자들의 불굴의 의지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독특하게도 육상전을 선호하는 반면에 해전은 극히 꺼렸다. 덩케르크에서와 같이 레닌그라드에서도 물 기피증이 다시 발작한다. 레닌그라드는 육상으로는 내륙과 단절된 것이 맞지만 라도가(Ladoga) 호수의 서쪽 제방으로 향하는 수로는 열려있었다.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호수에 떠 있는 모든 것이 루프트바페의 먹이가 되었지만 어둠이 내리면 탈출과 보급이 이어졌다. 10월과 11월, 독일군은 제39 기갑군단을 동원해 이 수로를 막으려 했지만 러시아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실패했고 이 수로를 장악한다고 해도 거꾸로 내륙에서 저항하고 있는 러시아 67, 54, 42군과 레닌그라드 방어군 사이에 갇힐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봉쇄작전을 펼치지 못한다.
레닌그라드 방어를 지휘하던 즈다노프는 포위당하기 직전에 무기공장의 노동자 650,000명과, 40,000 대의 각종 차량, 온갖 생산물자를 러시아 내륙으로 옮겨두었다. 이것만 봐도 러시아 사령부는 1941년 여름에 레닌그라드를 이미 포기했었고 본격적인 방어전은 계획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물자는 외부로 반출시켰기 때문에, 시민은 말할 것도 없고 200,000명의 병사가 먹을 음식이 부족했고 호수를 통한 반입이 독일공군에게 봉쇄된 다음부터는 공중보급이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러시아 공군은 이런 대규모 운송에 무능했다. 11월 14~24일 동안 겨우 1,200톤의 물자를 공수했을 뿐이었다.
이 양은 1년 후에 벌어질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독일이 공수한 1년치에 해당하는 양이었지만, 레닌그라드에는 2,000,000명이 넘는 시민이 갇혀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 갇힌 250,000명의 독일군이 살아남으려면 하루 최소한 306톤의 음식공수가 필요했던 반면, 레닌그라드에서는 3,060톤의 일일공수가 필요했지만 겨우 86톤만 공수되었다.
1948-49에 있었던 서베를린 봉쇄에서도 2,500,000명의 시민을 위해 하루 4,500톤에서 시작해 10,000톤까지 늘어났었지만, 레닌그라드에서는 그것의 1%만이 공급되었고 역사상 최악의 죽음이 벌어진다. 노동자에게는 하루 5조각의 빵(250그램), 가족 한 명당 2.5조각의 빵(125그램)이 배급되었다.
사진설명: 900일 동안 포위되었던 레닌그라드의 시민의 생활은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거리에서는 수레도 없어서 가족의 시체를 끌고 가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장례는 고사하고 매장도 못해 그냥 시체더미를 쌓아두었습니다.
11월 말이 되자 히틀러가 간과한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어 레닌그라드가 다시 러시아 내륙과 연결된 것("레닌그라드 구명줄"이라고 불렀다)이다. 밤이면 트럭이 두껍게 언 얼음 위로 물자를 날랐지만 이 때조차도 방어에 필요한 탄약과 군수물자가 대부분이었고 식량은 가장 나중이었다. 물자를 보급한 트럭은 귀환길에 노약자와 부상병을 탈출시켰고 그렇게 800,000명이 탈출했다.
그렇지 않아도 트럭과 연료가 다른 전선에서 급하게 필요한 시기에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보급에 사용되자, 즈다노프가 아예 호수의 얼음 위로 철로를 놓은 다음부터는 겨울 내내 4,000~5,000톤의 물자가 레닌그라드에 보급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굶주린 시민 앞에 내려진 상자에서는 여전히 박격포, 기관총과 같은 무기만 나왔다.
사진 설명: 라도가 호수의 얼음이 얼면서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했고 독일도 필사적으로 공습에 나서 이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사진에서는 공습을 받아 Aerosan이라는 스키전투차(?)가 곳곳에 부숴진 모습입니다. 한동안은 포격으로 호수의 얼음을 부쉈지만 워낙 날씨가 추워서 다음 날이면 다시 보급루트가 생겨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1942년 여름, 레닌그라드의 노동자들은 전설적인 작업을 완성한다. 라도가 호수 바닥에 전기선과 연료 파이프를 연결시킨 것이다. 군수공장은 이렇게 공급된 전기덕분에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베를린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기 직전, 괴벨스도 총동원령을 내려도 하루에 30,000명을 동원하지 못했는데 레닌그라드는 사상유례없는 총동원령으로 하루가 다르게 요새로 변해갔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시민은 배급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시민이 노동이나 전투에 참여했다. 레닌그라드에서의 희생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가 없지만 러시아는 600,000~700,000명이 죽은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 즈다노프는 32,000명의 여성과 소녀를 간호병으로 징집했고, 콤소몰(공산주의 정치동맹)의 90%가 군인으로 징집되었다. 9살을 넘긴 600,000명의 청소년이 방어진지 작업에 동원되어 600km가 넘는 대전차호를 파고, 340km의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고, 5,000개의 참호를 만들었다.
영하 40도 가까이 떨어지는 추위 속에서 어린이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허기진 노동자들이 하루 12~14시간의 초인적인 작업으로 공습에 무너진 공장을 다시 세웠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가며 시민들은 목숨을 잃어갔고, 시체를 썰매에 실어 끌고가는 모습이 어디에서나 눈에 띄었다.
레닌그라드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갔지만 즈다노프의 의지는 반대로 더욱 강해졌다. 그는 심지어 "우리는 공격해야 합니다! 스츨루셀부르크 협로를 장악해서 볼크호프(Volkhov) 전선과 연결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전략은 아주 간단했다. 네바(Neva)의 제67 군이 포위망을 뚫고 볼크호프 전선의 제2 강습군(Striking Army)이 협공을 펼쳐 겨우 16km 떨어진 레닌그라드의 방어군과 합류하는 것이다. 이제 이 16km가 900일간의 전투를 벌이는 목표가 된다.
그림 설명: 레닌그라드는 900일 동안 독일군과 핀란드군에게 포위됩니다. (왼쪽 작은 그림) 1941년 11월, 스비르(Svir)의 핀란드군과 연결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려고 했으나 실패합니다.
(우측 작은 그림) 1942년 여름, 라도가 호수 남쪽의 좁은 회랑을 따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앞으로 지도는 클릭한 상태에서 참조하며 제 이야기를 함께 해야 당시 상황이 보다 쉽게 이해가 됩니다.
1942년 봄, 히틀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레닌그라드를 함락시켜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남부 집단군의 만슈타인(Manstein)이 요새도시 세바스토폴(Sevastopol)을 점령하자, 히틀러는 제11 군의 막강한 화력을 레닌그라드로 집중시키기로 한다.
레닌그라드는 1년 전과 달리 이제는 더 이상 손쉬운 목표가 아니었고, 1942년 여름에는 남부의 볼가 강 일대와 코카서스 지역에 모든 전력을 다 쏟아 부어도 모자라는 판에 거꾸로 전력의 핵인 11 군을 빼내면서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의 씨앗이 심어진다. 히틀러는 이미 조언을 비난으로 듣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선의 어떤 조언도 듣지 않았고 레닌그라드는 반드시 함락되어야 했다.
만슈타인의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도시 남쪽에서 3개 군단이 러시아의 방어선을 관통해 도시 외곽까지 진출한 다음에 만슈타인이 직접 지휘하는 1개 군단은 그 자리에 대기하고, 다른 2개 군단이 동쪽으로 선회해서 네바를 건넌 다음에 도시를 협공하는 것이었다. 만슈타인의 계획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레닌그라드는 이제 더 이상 문화도시가 아니라 강력한 요새로 변해있었고 러시아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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