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정리했던 이야기를 좀 더 보기 좋게 다듬고 있습니다. 워낙 오래 전이라 용어와 표현이 최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대로 옮겨오도록 하겠습니다.
방위군은 근위군으로 스취루셀부르크는 실리셀부르크로 읽으시면 됩니다.)
전사, 특히 동부전선 이야기는 지도는 필수입니다. 주요 도시와 위치를 알아두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실리셀부르크는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측 표시 지역입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건국영웅 표트르대제가 대해진출을 위해 불모지를 대도시로 만들고 천도를 한 곳이어서 독소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곳이었습니다.
표트르대제가 프랑스 등을 참조해 공들여 지은 문화재가 전쟁의 참화를 겪었죠.
볼크호프Volkhov와 실리셀부르크Schlusselburg 전선
노동자 집착촌Poselok 5 부근의 병목 지점(그림 참조)에도 위기가 닥쳐왔다. 1월 12일 오전부터 러시아 제2 강습군Striking Army의 7개 사단이 라도가 호수의 리프카Lipka와 키로프Kirov 철로의 가이토롤로포Gaytolovo사이의 독일군 수비라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리프카에서는 독일군 제287 척탄병연대의 제2 대대가 러시아 제128 소총사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남쪽의 집착촌 4에서는 러시아 제372 소총사단이 수비라인에 구멍을 내는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이 집착촌 8을 지켜내면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착촌 8(P8)을 맡은 동 포메라니아 제374 척탄병연대, 제2 대대는 5번에 걸친 러시아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러시아군은 집착촌 5(P5) 북쪽을 연결시키고 고립된 독일 수비군은 남쪽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합니다.
1월 12일 집착촌 8의 자이글러Zeigler소령의 부대는 5번에 걸친 러시아 군의 맹렬한 공격을 물리치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372 소총사단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돌파구를 마련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거칠기로 유명한 시베리아와 아시아 계열 병사들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지만 자이글러의 부대는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냈다.
러시아 군의 거듭된 포화와 공격에 자이글러 부대의 참호는 이제 거의 평평한 땅이 되어버렸지만 제196 포병연대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372 소총사단이 더 이상 공격할 병력이 없을 때까지 제 자리를 지켰다.
집착촌 8의 남부는 독일군에게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갔다. 러시아의 폴리야코프Polyakov대령은 이번 공격을 위해 자신의 제327 소총사단을 오랜 동안 훈련시켜왔는데, 수비군 벵글러Wengler대령의 제366 척탄병연대의 방어선을 기관총 진지까지 그대로 복사한 훈련장에서 진지 공격훈련을 해왔다. 폴리야코프 대령은 이번 공격에서 지난 여름에 당했던 참패를 확실하게 갚아줄 생각이었다.
그의 부대는 최전위 독일군 진지를 돌파한 후에 P8 남부를 파고 들어 독일군의 주 방어선을 위 아래로 밀어붙이려고 했다. 러시아군의 공격이 성공한다면 독일 제227 보병사단의 방어선은 무너지고 신야비노Sinyavino 고지대까지 무인지경으로 내달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벵글러의 부대가 방어선의 한 구석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고, 제28 엽병사단의 일부 연대가 벵글러의 수비대와 합류해 러시아군은 더 이상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군 수비선을 공격하기에 앞서 모형으로 훈련을 하는 러시아군입니다.
Scorched Earth에는 약간의 지도만 있을 뿐 99.9%가 문자로 된 도서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각종 도서에서 관련된 이미지를 찾아서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 편의 이야기를 올리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P8에 있는 자이글러의 500명의 병력은 마치 바다 위에 솟아있는 바위처럼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 러시아군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1월 12일, 13일, 14일 하루 하루를 버텨냈다. 러시아군은 서쪽으로 병력을 전개하기 전에 P8부터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제327 소총사단과 제18 소총사단을 P8에 투입시켰다.
1월 15일이 되자 4일 동안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한 수비군은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러시아군의 우라Urra라는 함성과 함께 공격이 시작됐다. 보병은 기관총 진지를 넘지 못했고 제122 전차여단의 전차는 지뢰와 독일군 보병의 육탄돌격에 모두 파괴되었다. 이제 자이글러의 부대는 이 이상의 공격을 막아낼 탄약이 없었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인지, 항복을 할 것인지 아니면 서쪽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본대를 찾아 탈출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항복이나 더 이상의 방어는 전멸을 의미했기 때문에 탈출을 선택했지만, 본대가 얼마나 멀리 후퇴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탈출 시도도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수비대는 23시에 P8에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자이글러가 러시아 말을 잘하는 병사와 선두에 섰고 백병전을 펼칠 수 있는 병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썰매에 실린 부상병들을 나머지 병사들이 후송했다. 흡연이나 잡담은 물론이고, 발포도 금지되었다.
영하 25도의 기온에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별을 따라 남쪽으로 걷던 중, 선두에서 스토이(Stoy, 정지라는 러시아어)라는 고함이 들렸다. 저 멀리 여러 대의 T-34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러시아 어를 잘하는 병사가 다가갔고 담배를 나눠 피던 그는 암호와 포위부대의 위치까지 알아내왔다.
그러나 어디에도 독일군 본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포성조차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갑자기 러시아 군 박격포 진지와 마주쳤고 암호를 대면서 무사히 통과했지만 아무래도 바로 등 뒤에 박격포 부대를 두는 것이 불안해 다시 돌아가 진지를 파괴하고 41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그 다음부터는 만나는 러시아 군을 모두 강행돌파하고 결국 제274 척탄병연대를 만났다. 자이글러의 부대는 상황이 급박한 P5로 다시 투입된다.
네바에서는 독일군의 방어선에 완전히 궤멸시키려는 러시아 군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서쪽의 마리이노Maryino와 동쪽의 P8을 제압한 두 진격로가 독일군의 좁은 통로를 압박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군의 진짜 의도는 P5의 고지대를 제압해 두 진격로를 합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아직 실리셀부르크, 라도가 호수 등을 지키는 독일군 제96과 227 보병사단을 완전히 가둬놓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린더만 상급대장Colonel General은 이것만은 반드시 막고 싶었다.
병목지점의 2개 사단만으로는 러시아 군의 침투를 막아낼 수 없었고 제170과 227 보병사단의 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두 사단은 이미 빈사상태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작전은 고사하고 방어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1월 14일, 독일 제18 군은 포고스톄(Pogostye, 므가에서 좀 떨어진 키로프 철로 주변의 전투지역)에서 동 프러시아 제61 보병사단의 2개 연대병력을 차출해서 병목지점에 배치시켰다. 사단 전체라도 모자라는 판에 겨우 연대병력이었으니까 독일군의 심각한 전력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61사단을 지휘하는 휴너Huhner소장이 병력을 직접 지휘해 리프카와 실리셀부르크의 두 사단과 다시 전선을 연결시켰지만 P5에서 라도가 호수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동서 양방향으로 공격해오는 러시아 군을 상대로 전선을 유지하기에는 전력이 너무 약했다. 이제 전투의 중심은 노동자의 숙소와 몇 개의 콩 가공 공장이 있었던 P5로 옮겨졌다. 러시아 군은 2개 사단과 2개 기갑여단을 동원해 P5를 공격했다. P5는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차로였기 때문에 여기를 차지하면 북쪽의 수비군과 남쪽의 사령부를 단절시킬 수 있었다.
휴너장군은 북쪽의 독일군이 남쪽으로 모두 후퇴할 때까지 집착촌 5(P5)를 지켜냅니다.
4일 밤낮동안 휴너의 수비군은 이 중요한 교통로를 지켜냈지만, 단지 몇 대의 전차, 돌격포, 포대 그리고 몇 개 중대병력이 모자라 결국 1월 18일 러시아 군은 P5를 장악하고 휴너의 수비군을 고립시킨다.
드디어 휴너 장군이 있던 공장까지 러시아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령부와의 전화도 끊기고 참모들까지 전투에 내보낸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장포신의 3호 전차 한 대뿐이었다. 공장 마당 한 구석에 위장을 한 채 숨어있던 3호 전차는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린 다음 첫 탄을 세 번째 전차에 쏴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는 선두 전차를 파괴하고 중간에 오도가도 못하는 전차를 마무리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급하게 긁어 모은 통신병과 부상병을 동원해 적의 보병도 물리쳤다.
새벽이 되자 연락병이 벙커로 뛰어들어와 북쪽 수비군 중 제151 척탄병연대가 포위망을 뚫고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급한 소식을 전해줬다. 이제 러시아 군 2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여단의 포위를 뚫고 본격적인 탈출이 시작될 참이었다.
얼마 전에 뺏긴 P5에서 헬게이트가 열리는 셈이었다. 이미 러시아군은 이 지역에 기관총 진지를 구축하고 사방에서 탈출하는 수비군을 압박하고 있었지만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강행했다. 오전 6시, 151 척탄연대가 P5에 있던 마지막 러시아군을 만났고 참호용 삽까지 동원한 백병전 끝에 돌파해냈다. 뒤 따르던 다른 부대들도 압박해오는 러시아군을 쫓아내고 탈출하는데 성공해 6,000 명의 병력과 2,000명의 부상병이 독일군 전선을 넘었다.
동이 터오르자 휴너 장군도 P5에서 후퇴하기로 한다. 다행히 지난 밤의 러시아군의 필사적인 공세를 막아내면서 막대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사소한 기관총 진지 돌파 외에는 큰 위험은 없었다.
제162 척탄병연대, 제1 중대는 128명의 병력 중 겨우 44명만이 돌아왔고 나머지 중대들도 30~40명 만이 돌아올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다시 방어임무에 투입되었을 정도로 P7과 신야비노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겨울 중 가장 추웠던 영하 40도의 밤인데도 동과 서에서 합류한 러시아 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던 것이다.
러시아 군은 일대의 전장터를 관측할 수 있는 신야비노 고지대를 원했다. 다행히도 북쪽에서 탈출한 6,000명의 병력이 보강되면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만약 제 때에 후퇴하지 않았다면 신야비노까지 잃어 8,000명에 이르는 병력은 전멸했을 뿐만 아니라 남쪽 전선은 계속 붕괴되었을 것이다. 이 후퇴작전으로 800,000명의 북부집단군 전선이 붕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군은 포로를 단 한 명도 잡지 못했고 어떤 중장비도 노획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라도가 일대의 후속전투에서 전략목표를 이루지 못합니다. 므가와 키로프 철로는 여전히 독일군의 수중에 남게 됩니다.
레닌그라드 해방을 위해 2개 군, 제2 강습군과 제67 군을 동원해 물질적으로는 훨씬 큰 피해를 입었고 겨우 10km 넓이의 땅만 얻은 러시아였지만 레닌그라드를 해방시켰다는 심리적인 영향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레닌그라드를 말려죽여 북부전선을 유지하려던 히틀러의 계획도 완전히 실패했다. 그리고 북부전선의 영향을 직접 받는 핀란드의 모습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핀란드군의 구스타프 만네르하임Gustav Mannerheim원수는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킨 후에 병력을 무르만스크Murmansk 철로 공격으로 전환시킬 계획이었다. 이렇게 러시아 북부 교통통신 핵심을 단절시키면 러시아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방법이 없게 된다. 미국의 원조가 끊겼다면러시아는 심각한 경제공황이 발생하게 되고 지금과 같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이 연합군의 지원에 얼마나 의존했는지를 잘 말해주는 한 장면입니다. 식량과 같은 생활필수품은 물론이고 군수품도 절대적으로 의존했었는데, 특히 트럭과 같은 운송장비는 러시아군의 전체 트럭/장갑차 중 30%가 지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진의 정찰용 장갑차는 영국군의 유니버설 캐리어이고 거기에 대전차총으로 무장시킨 것입니다.
1943년 1월 18일 밤, 레닌그라드 라디오 방송이 특별방송 예고를 하자, 도시 전체에 독일군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문이 급속하게 퍼졌고 그날 밤에는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포위망이 완전히 풀렸습니다. 우리가 기다렸던 그 날이 마침내 왔습니다. 장례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친지를 땅에 묻을 때에 우리가 했던 맹세, 해방의 날입니다."라는 떨리는 목소리가 방송되었다.
레닌그라드 일대가 완전히 해방된 이제, 전투의 초점은 고로독Gorodok의 병원과 전력소 그리고 반대편의 "벵글러 장벽"이라는 별명이 붙은 P7(제366 척탄병연대)로 모아졌다. 신야비노 고지대의 두 지역은 앞으로 있을 전투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고로독의 병원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어떤 건물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240 공병대대, 제3 중대의 공병들이 벽돌더미 속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여전히 제240 포병연대, 제1 대대의 화력지원 덕분에 전차공격도 막아낼 수 있었다. 포병 대대의 진지는 남쪽 숲 언저리에 위치해 있었고 병원의 관측병의 요청에 따라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1월 17일 늦은 오후에 보크만Volkmann중위의 정확한 요청으로 러시아군의 집합지를 선제공격해 무산시킨 후에는 갑자기 통신이 두절되면서 단 한 발도 날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상당히 귀한 독일 포병의 포격사진입니다. 칼라인데 나중에 색을 입힌 것이 아닐까 합니다. 포병 숫자로 봐서 15cm급의 FH18 야전대구경 포로 보입니다.
"이제 잠을 좀 자야겠어"라며 중위는 지하실 벙커로 내려서 잠시 눈을 붙였는데 "중위님. 마침내 포병 연대와 연락되었습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잠에서 깼다.
"포대에 무슨 일이래?"
"러시아군 전차가 포대를 습격해서 전원 전사한 것 같습니다. 무선병만 숨어서 헤르츠Hertz대령님과 통신하고 있답니다."
"그럼 포는?"
하사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포대는 약 2km 밖에 있었고 거기까지 가는 길은 적군에게 노출되어 있지만 보크만은 망설일 틈이 없었다.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내 도움이 필요할테니까."
보크만은 벨트에 5개의 수류탄을 끼우고 자동소총을 들고 벙커를 나섰다. 한참을 걸어 1번 포대에 도착한 그는 병사들이 포탄과 소총에 맞아 전사한 것을 확인했다. 4번 포대로 가자 바우어 소령도 전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러시아군은 포를 그대로 뒀다. 아마도 나중에 끌고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보크만은 다시 포진지를 떠나 러시아 정찰병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근처에 있던 제96 보병사단의 사령부를 찾았다. 보크만의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즉시 공병과 척탄병을 보내 포진지를 탈환하게 했다.
포를 견인하려던 러시아군을 만나 간단한 전투 후에 모두 죽였고 때마침 헤르츠 대령이 보낸 제240 포병연대의 병력도 도착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사상자를 모두 치우고 포대에는 병력이 배치되어 고로독의 수비군은 이제 다시 러시아의 전차공격을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제18군의 사령관 린더만 상급대장은 작전지도를 보며 "새 전선이 버텨낼 수 있을까?"라는 자문을 한 다음 "신야비노 고지를 지켜내야 한다. 여기에서만 놈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이 고지를 잃으면 므가를 지킬 수 없고, 므가를 잃으면 놈들은 키로프 철로까지 밀고 내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치뤘던 희생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라도가 호수의 작전을 총지휘하고 있던 보로쉴로프Voroshilov원수는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는 레닌그라드 주변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싶었다.
러시아 보병사단이 끊임없이 고지대를 향해 밀려왔다. 그리고 P7과 고로독 방면으로도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가진 모든 화력을 동원해 퍼부어댔고 굴러갈 수 있는 모든 전차를 동원했다. 심지어 지상폭격기까지 동원했지만 모든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8일간에 걸친 무차별 공격에도 독일군이 물러나지 앉자 "효과가 없다. 빈사상태인데도 고지까지 가지도 못하고 있다. 독일군이 측면을 포기하고 전면수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전면공격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볼크호프, 포로스톄Pogostye, 콜피노Kolpino 등의 측면을 공격한다면 적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며 최고 사령부가 개입을 했다.
전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전역에서 크게 아래로 내려가 므가 배후로 돌아 협공한다는, 상당히 좋은 전략이었다. 이것이 적중한다면 킬로프 철로에 바로 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0개 이상의 독일군 사단을 포위망에 가둘 수 있게 된다. 스탈린과 최고 사령부는 이 계획을 승인했지만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적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부족한 전력으로 너무 성급하게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가지려고 한 것이다.
2월 10일, 러시아군은 동쪽에서는 포고스톄에서, 서쪽에서는 콜피노에서 협공하기 시작했다. (위의 지도 참조)
동쪽에서 크게 우회한 러시아 제54군의 공격은 공교롭게도 신야비노 전투에서 물러나 포고스톄에서 보충을 받던 독일 제96 보병사단과 마주쳤다. 96 사단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지만 제61과 제132 보병사단의 지원을 받아 첫 공격을 물리쳤고, 러시아군은 약간의 전선만 확보하고 멈춰 선다. 서쪽에서는 7개 소총사단, 5개 여단, 3개 기갑여단으로 공격이 시작되었고 여기에 제4 SS 헌병사단과 스페인 청사단(Blue Division-제250 보병사단)이 공격을 받아냈다.
스페인 자원병의 청사단 모집 포스터와 플라모델 아트입니다.
(우에스기 왈: 청사단은 당시 독일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 정부가 자원과 징집형태로 연인원 45,000명이 순환복무했던 부대입니다.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의 공산주의에 대해서만 전투를 벌이고 서방 연합군에 대해서는 참전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로 양다리를 걸친 재미있는 이력이 있습니다. 약 5,000명이 전사하고 8,700명이 부상을 당한 기록이 있습니다.
스페인 민족은 중세역사를 주도했었고 나폴레옹에게 굴복하지 않아 게릴라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끈질긴 저항으로 유명한 민족이어서 이름한 추축군인 이탈리아군과 대조되는 활약을 보였습니다.)
청사단의 제262, 263, 269 척탄병연대는 크라스니이 보르Krasnyy Bor 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여기에만 3개 소총사단, 2개 전차 대대 (총 33,000명의 보병과 60대의 전차) 그리고 1,000문의 화력이 집중되었다. 스페인 연대 병력은 모두 4,500명이었고 전차도 없이 겨우 24문의 포병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들과 좌측의 우군 사이에는 약 7km의 공간이 있었고 제2 방어선을 만들 병력도 없던 상황이라 사단장인 에스떼반 인환떼스Esteban Infantes장군은 2개 오토바이 소대, 2개 공병중대로 구성된 순찰대로 이 지역을 책임지게 했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러시아군은 4km 정도 전진하며 크라스니이 보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11,000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대가를 치뤄 이즈호라Izhora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스페인군은 민족특성답게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한 명도 물러나지 않고 전투를 벌였다. 안또니오 뽄떼Antonio Ponte라는 병사는 수류탄 뭉치와 지뢰만으로 5대의 전차를 부수고 전사해 스페인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을 정도다.
청사단 역시 3,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후실리에르Fusiler연대의 경우에는 90% 병력을 잃었는데도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고 심지어는 바바리아 제212 보병사단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군에게 역습을 가해 러시아군은 더 이상의 공격을 시도하지 않는다. 스페인군의 우측에 있던 제4 SS 경찰사단도 제2 SS 기갑보병여단의 지원을 받아 네바 호수를 넘어오는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큰 피해를 입고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러시아군은 4주의 정비시간을 갖은 후에 3월 19일, 이번에는 좀 더 북쪽에서 작은 규모의 협공작전을 펼친다. 크라스니이 보르 지역에서는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청사단 대신에 플란더스 SS의용병부대Flanders Legion가 사단규모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플란더스 의용병부대는 88mm 대공포와 몇 대의 타이거 전차의 지원을 받아 거꾸로 역습에 나서 청사단이 잃었던 지역까지 되찾고 8일간 지켜낸다. 위기에 몰린 외인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제5 산악사단의 1개 중대가 급하게 도착하지만 이들을 환영한 것은 참호 속의 시체들뿐이었다. 500명의 병력 중 겨우 45명만이 살아남아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개전 초중반 예상 외로 전력이 약했던 독일 육군을 기적과 같이 구원해준 88mm 대공포입니다. 원래 고고도의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한 대공포였습니다만 연합군의 전차에 놀라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다가 그 성능이 너무 뛰어나서 대전차포로 전용되었습니다.
무려 1.5km 전방에서 연합군의 모든 전차를 한 방에 주저앉힐 수 있는 강력한 파괴력과 사진에서와 같이 이동 중에도 바로 사격을 가할 수 있는 기동력은 장점이었지만 대공포였기 때문에 실루엣이 너무 높았고 포병을 산탄에서 보호할 장치가 전무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전 중반부터는 실루엣을 낮추고 방어력을 높힌 대전차 전용이 일선에 배치됩니다.
마지막 협공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레닌그라드 전선의 대공세는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러시아군은 레닌그라드를 해방시키는 목표 중 하나를 이뤄냈지만 270,000명의 사상자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만슈타인Manstein원수의 지휘 아래 남부 집단군이 독일군 특유의 기동전을 펼쳐 스탈린그라드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라도가 호수 남부의 협로에서는 보병들의 일선 장교의 적절한 임기응변, 보병들의 불굴의 의지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두 사례가 보여주듯이 동부 전선의 독일군은 지휘관의 뛰어나 지도력과 개별 병사들의 의지로 아직은 러시아군에게 전장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3년 겨울부터 시작되는 러시아군의 주도권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독일 최고사령부의 과대망상과 집착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제부터 북부집단군의 전투는 라도가 호수 전역의 전투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된다, 라도가 호수 전투에서는 개별 병사들의 의지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지만 다음에 계속 이어지는 전투에서는 갈수록 상황이 악화된다.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을지라도 독일군이 입는 피해는 보충이 안되는 순손실이었기 때문에 전투를 거듭할 수록 전투력과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그리고 계속된 시도와 실패 속에 러시아군도 독일군의 전략과 전술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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