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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장진호 전투 외전

by uesgi2003 2014. 6. 24.


우리의 머리(최소한 제 머리)는 게으르기도 하고 기억능력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보관할 때에 이리 저리 깎아서 보관하기 편한 상태로 가공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정리하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수 많은 당사자가 얽힌 역사사건을 설명할 때에는 최소한의 인물만 선택하고 그들의 발자취만을 정리하게 됩니다. 당연히 역사의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아예 역사의 시간아래에 파묻히게 되죠. 


너무나도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가 그렇습니다. 그 영웅담을 아는 99%의 사람은 스파르타 300인만 기억할 겁니다. 당시 전장에는 4,000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있었다는 것도, 스파르타 300인보다 훨씬 많은 테스피아 700명이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을 모를 겁니다. 


미국 역사상 손꼽는 패전인 장진호 전투에서도 제1 해병사단의 고전과 초인적인 분투만 설명되고 있고 그렇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미 제7 보병사단의 맥클린 기동부대Task Force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장진호 전투, 맥클린/페이스 기동부대의 운명


장진호에서 해병부대만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다. 미 제7 보병사단 기동부대 맥클린MacLean은 군단의 우익을 방어했지만 그들의 운명은 역사의 주석정도로만 언급되고 있다. 



장진호 전투에서 붉은 색 화살표가 있는 지역이 맥클린 기동부대의 위치입니다. 


이 부대는 포병, 대공포와 차량을 갖춘 3개 대대, 총 3,200명의 병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맥클린 기동부대는 해병대에 비교할 수 없었다. 해병대는 2차대전을 겪은 역전의 용사들인 반면에 육군은 일본 주둔지에서 불려 나와 훈련이 되지 않은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해병대는 방한복(후드까지 있는 파카)을 잘 갖춰입은 반면에 맥클린 부대는 영하 30도 아래의 기온에서도 면군복을 입어야 했다. 


맥클린 부대는 1950년 11월 27일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에 정찰소대를 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날 밤, 중공군 사단병력이 산개된 방어선 안으로 쏟아져들어왔다. 첫날밤 전투에서 100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튿날 맥클린은 모든 병력을 불러들였고 돈 페이스Faith 중령에게 퇴각로인 방어선 남쪽을 보강하라고 명령했다. 

페이스는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얼어붙은 장진호 반대편의 사격을 받았다. 그와 부대원은 대응사격을 했지만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맥클린은 아군의 오인사격이라고 생각하고 얼음판 위로 달려나갔다. 그는 중공군의 사격을 받아 쓰러졌고 중공군이 와서 쓰러진 그를 끌고 갔다. 



왼쪽이 맥클린 대령, 오른쪽이 페이스 중령입니다. 일본에서 찍은 사진이군요. 


이제 맥클린 부대는 페이스 부대가 되었다. 새 지휘관은 방어선을 제대로 정비하고 해병 전폭기의 화력지원과 탄약보급을 받으며 버텼다. 그는 지원군을 기다렸지만 후방의 모든 부대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훨씬 남쪽과 서쪽에서도 중공군은 공격을 퍼붓고 있었고 어떤 병력도 전방에 고립된 그들을 구원하러 나설 수 없었다. 포위된 페이스 부대는 이제 자력으로 장진호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페이스는 부상병을 트럭에 싣고 후방으로 향하는 위험한 길에 나섰다. 얼어붙은 장진호를 건널 것인지 아니면 꼬불거리는 산악로를 따라 내려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는 장진호의 얼음이 너무 얇아서 트럭이 건널 수 없다고 보고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개활지에서 몸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실수였다. 



이렇게 호수 위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고 트럭을 버리지 않으려고 산악로를 선택했습니다만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장진호를 건너가는 것이 보다 안전했습니다. 결과론에 불과합니다만... 



대공포를 견인하는 트럭이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중공군의 매복을 받고 제 자리에 못박혔다. 중공군은 모든 요충지에 병사를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그 때마다 병사들은 트럭에서 급하게 내려 전투를 벌였고 그 틈을 이용해 트럭이 빠져나갔다. 

중공군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를 벌이다 보니 구원을 나온 전폭기가 아군과 중공군 사이에 네이팜탄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다. 온몸이 화염에 뒤덮인 병사들이 땅에 구르고 동료들이 불을 끄려고 했지만 인화물질은 꺼지지 않았다. 트럭은 부상자로 가득찼고 규율이 무너지면서 장진호로 도망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밤이 되자, 페이스는 퇴로에 사격을 퍼붓고 있는 고지 1221을 점령하고 퇴로를 열기로 했다. 그는 총을 쥘 수 있는 부상병까지 모아 고지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두 명의 한국군이 명령을 거부하자 권총을 꺼내 즉결처분했다. 고지로 올라간 병사들은 중공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당황스럽게도 돌아오지 않고 산을 넘어 남쪽으로 향했고 페이스의 나머지 병력과 트럭은 그대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지난 밤 전투 그리고 병력이탈로 전력이 크게 약해진 페이스 부대는 날이 새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페이스 근처에 수류탄이 터졌고 부하가 그를 트럭에 실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버려지는 트럭이 늘어갔고 갈수록 도로봉쇄망이 두터워졌다. 

버려진 미군전차로 막은 도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었다. 걸을 수 없는 부상병이나 탈진한 병사는 길 옆에 주저 앉았다. 페이스 부대의 최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페이스 부대의 모습은 아닙니다만, 버려진 셔먼전차를 길 옆으로 밀어내고 중공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파괴하고 있습니다.


12월 1일, 날이 밝으면서 중공군은 얼마 남지 않은 페이스 부대에게 달려들어 트럭 안에 수류탄을 던져넣고 나머지 병사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제 남은 탈출로는 장진호 얼음판이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얼음 위로 기어갔고 반대편 해병대가 달려와서 그들을 구조했다. 3,200명 중 겨우 385명만 살아났았다. 


 

굉장히 유명한 사진입니다. 다른 한쪽에서 고전을 겪고 있던 제5 해병연대의 베이커 중대 아이크 펜튼Ike Fenton 대위가 탄약도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고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휴전 후에 포로교환으로 돌아온 미군포로입니다. 중공군의 주장에 따르면 맥클린 부대도 300명 정도가 포로로 잡혔습니다. 


페이스 부대의 비극과 분투는 최근에 와서야 재조명되었다. 중국기록을 조사하면서 중과부적의 적을 상대했고 이들의 악전고투 덕분에 해병대는 우측방어의 부담을 덜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1999년, 페이스 부대에 훈장을 수여했고 2000년에는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가 해병대의 초대를 받아 장진호 전투 행사에 참석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자료에서 그들의 희생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