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시간 기다렸던 월드컵이, 최소한 한국팀에게는, 이렇게 끝나는군요. 큰 기대를 안 했기 때문에 무덤덤하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경기 후에 보여주는 모습은 무척 실망입니다. 다른 선수가 울고 안타까워 하면 조용히 일으켜세워주어야지, 웃으면서 돌아다니는 것은 욕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대선배들이 웃으면서 쾌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열심히 뛴 선수들이 기죽을까봐 격려하는 것이지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격려와 위로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웃고 돌아다니는 것은... 참 못났다는 생각입니다.
운동을 게을리 했더니 운전 7시간에 녹초가 되었습니다. 운전도 은근히 힘들군요.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폭찹 고지전투 (2부)
4월 3일, 폭찹 공격승인이 떨어졌지만 마오쩌둥은 평화협상을 지켜보자며 연기시켰다. 판문점에서는 중상자 포로교환에 합의하면서 잠시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지만 중국 공산당은 UN을 더 압박하기로 하고 실제로 포로를 교환하기도 전인 4월 16일에 폭찹 공격을 재개했다.
4월 16일 저녁 8시, F중대의 정찰병은 50명의 중공군을 발견하고 수류탄을 던져 교전을 벌이며 고지의 아군에게 경보를 울리려고 했지만 이미 중공군 2개 중대가 참호를 넘어들어가고 있었다. 공격을 받은 1소대는 붉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전면공격을 받고 있으니 폭찹 전체에 조명탄을 쏘아달라는 신호였다. 11시 5분, 조명탄이 쏘아 올려졌고 몇 분 후에 미군포대가 불을 뿜었다. 20분 후에 벙커에서 나온 소대는 참호에 들어와 있는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구역별로 점령해나가면서 미군을 죽였고 병력이 증원되면서 2시간이 지나자 고지 대부분을 점령했다.
벙커에서 항복하는 미군입니다. 폭찹 전투의 사진을 구하기 힘들어서 비슷한 상황의 사진을 사용하니까 폭찹 전투 사진이라고 감정이입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중공군의 사진이 드문데, 구할 수 있는 것도 대부분이 연출사진입니다.
위기를 보고받은 31연대장은 중공군이 포크 찹 고지에서 넘어오는 것을 대비해 L중대의 3개 소대를 급히 배치시켰다가 02시에 F중대와 L중대의 1개 소대에게 E중대를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F중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L중대의 3소대는 중공군의 기습사격을 받고 6명이 전사했고 소대는 후퇴했다.
참호와 벙커에서 방어하는 중공군인데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L중대는 2개 소대만으로 두 번째 공격을 할 예정이었지만 K중대와 함께 한다는 계획은 전혀 알지 못했다. K중대 135명은 347고지 뒤에 있었는데 새벽 3시 30분에 200고지 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대원은 탄약벨트를 더 챙기고 수류탄도 3발씩 더 넣었다. BAR(브라우닝 자동소총)는 탄창 12개를 그리고 경기관총은 탄약 5상자를 챙겼다. 소대별로 화염방사기와 대구경 로켓발사기도 가져갔다.
데이비스 대령은 2개 중대로 포크 찹 고지 후면을 공격하고 1개 소대는 예비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K중대장은 포크 찹 오른쪽에서 L중대가 협공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고지를 최대한 빨리 올라가야 한다. 성공여부는 속도에 달려있다. 날이 새기 전에 고지 위에 올라가야 한다."
새벽 4시 30분, 지원포격이 멈추자 중대원은 30분가량 걸려 첫 번째 벙커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군이 방어선에 들어서자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면서 L중대도 K중대와 같은 시간에 공격에 나섰지만 심한 공격을 받았다. 2개 소대 모두 조금도 전진하지 못하고 다시 200고지로 되돌아왔다. 폭찹에는 K중대만 남았다.
K중대는 벙커 안에서 자신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려고 하는 E중대 생존자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순간에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포탄 3발이 떨어져 중대원 여러 명이 부상당했지만 벙커 안의 E중대원은 무사했다.
K중대가 방어선 안에 자리잡고 L중대가 고지 200에서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중공군 141사단의 지원군이 고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맥스웰 하사는 이렇게 회상한다.
"폭찹은 벙커, 참호, 포탄구덩이와 바위로 얽힌 미로였다. 중공군은 계속 반격해왔고 이전 공격에서 살아남았던 놈들이 은신처에서 나와 합류했다. 우리는 지원병력없이 전투를 벌였고 갈수록 숫자가 줄어들었다."
당시 모든 고지는 이렇게 초토화되어 있었습니다.
K중대장은 이미 절반의 병력을 잃었고 고지에서 중공군을 밀어낼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 3소대를 불러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L중대의 지원도 요청했지만 겨우 12명만이 도착했다.
L중대는 62명을 다시 올려보냈지만 중대장 2명이 연거푸 총에 맞고 전사할 정도로 악전고투를 치뤘다. 세 번째 중대장 마샬 중위가 K중대와 합류했을 때에는 12명이 전부였다.
이제 고지에는 E중대, K중대와 L중대 모두 합쳐서 65명이 남았는데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의 E중대가 가지고 있던 숫자였다. 오전 8시 14분에 G중대가 증원되었다. 그렇지만 중공군도 반대편에서 새로 증원되었고 전투가 다시 벌어졌다. K중대장은 물과 더 많은 탄약, 중화기를 요청했지만 약간의 물과 C레이션만 도착했다.
정오에 대대장에게서 E와 F중대 생존자를 후방으로 보내고 G중대도 오후 3시에 빼내겠다는 통보가 왔다. K중대장 클레몬스는 "그들을 빼가면 고지에서 버티라는 명령은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항의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몇 시간을 버티던 클레몬스는 "지원이 없다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라고 긴급한 요청을 했고 이번에는 대대장이 사단본부에게 지원요청을 했다.
7사단의 상황은 복잡했다. 고지를 잃으면 중공군은 고지 347도 공격할텐데, 1952년 10월에 중공군 손에 넘겨주었던 삼각Triangle 고지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사단은 다시 1군단, 다시 8군, 또 다시 극동사령부로 판단을 요구했다. 병력손실과 판문점의 협상을 두고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둘 것인지 알고 싶었다. 사령부가 판단을 놓고 고민하던 중에, 7사단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대대에 도착했고 그 시간에 G중대가 후퇴했다.
K중대는 그 시간까지 18명이 전사하고 71명이 부상을 당했다. L중대까지 합쳐서 25명이 남았고 중대장은 병력을 모아 한 구석에 틀어박혔다. 중공군은 야간공격 전에 포탄을 퍼부었다.
"부상병을 빼고 겨우 20명 만 남았습니다. 지원군이 없다면 빠져나가야 합니다." 보고를 받은 사단장을 고지를 고수하기로 했다. 8군의 승인을 받은 후에 17연대의 2대대를 31연대에게 주었고 17연대의 1대대도 폭찹 고지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이제 고지를 구원할 차례였다. 2대대 F중대는 K중대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저녁 9시 30분에 K와 L중대와 합류했다.
미군 포대는 하사골에서 올라오는 중공군을 두들겼지만 중공군 포대도 응사에 나서 F중대 19명을 죽였다. F중대의 피해가 크자, 2대대 E중대도 투입했고 사단장은 만일을 대비해 1대대도 31연대에게 주었다. E중대는 중공군쪽으로 올라가 기습하기로 했다.
이제 고지에는 14명만이 남았다. 자정이 되어 중공군이 포격이 거세지자 클레몬스는 생존자를 모아 탈출하려고 했다. 마침 그 때에 F중대가 도착했고 K중대는 탈출했다. 20시간 전만 해도 135명이 트럭을 타고 왔다가 이제는 1톤 탄약수송차를 타고 떠났다. F중대에게 넘겨줄 탄약도 의무용품도 없었다. K중대가 다시 전선에 복귀하려면 150명을 보충받아야 했다.
중공군이 다시 공격해왔고 이제는 벙커 위로 포격을 요청할 정도로 상황이 다급해졌다. F중대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E중대가 중공군의 배후를 공격해서 쫓아내고 F중대를 구원했다.
벙커에서 포격을 피하고 있는 미군입니다.
E중대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두 시간 후에 다시 공격해왔다. A중대가 더 보강되었고 4월 17일에는 미군 3개 중대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고지를 완전히 장악했다. (전투 개시 때부터 있었던 31연대의) E중대와 몇 명 안되는 생존자가 후송되었다.
4월 18일에 중공군 141사단의 병력이 더 공격해왔지만 미군도 병력을 증원하며 막아냈다. 결국 중공군도 포기하고 반대편 계곡으로 물러났다.
폭찹 고지는 포격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2사단과 7사단의 포병대대 9개는 첫 날 37,665발, 둘째 날 77,349발을 퍼부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고지 하나를 두고 11만 발 이상을 퍼부은 포격전은 없었다. 물론 중공군의 포격은 제외한 숫자다.
중공군과 북한군이 사용하던 야포입니다. 근접지원 포입니다.
폭찹 고지는 유명해졌고 협상장에서도 중요한 무기였다. 1953년 6월, 펑더화이는 덩화에게 제1 군을 주었고 7월 6일에 폭찹을 가시 공격했다. 며칠 전에 양측이 임시 휴전에 합의했었지만 이승만은 인정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이승만의 반발에 대해 미군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포크 찹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포로를 잡지 않겠다는 경고를 했다. 7월 6일 밤, 중공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마치 중국인 모두가 올라오는 것 같은 인해전술이었다. 캘리버 50 중기관총으로 수많은 중공군을 쓰러트렸지만 결국 방어선 안으로 들어왔고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B중대 증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군은 고지에서 밀려났다.
흔하지 않은 중공군의 중화기 모습입니다. 참호전투에서 치명적인 화염방사기입니다.
미군이 중대를 보강하면 중공군은 대대를 보강했다. 미 7사단은 4일 동안 고지를 두 번 탈환하고 두 번 잃었다. 사단장은 무조건 고지를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장군의 흔한 장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단장은 정찰대대를 이끌고 직접 고지로 올라갔다. 1953년 당시 진정한 전투를 벌인 사단은 7사단이 유일했다.
7월 11일, 5개 대대가 중공군 1개 사단 전체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1군단은 고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중공군을 막아내기에는 미군의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더구나 휴전이 바로 코 앞이었다. 그는 본군의 정치인과 언론의 비난을 두려워했다. 후크Hook에서 비슷한 전투를 벌였던 영연방 사단장 마이크 웨스트도 혈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주 방어선도 아닌 외곽 완충지대였기 때문이었다.
7월 27일 휴전이 체결되면서 폭찹 고지는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논란은 계속되었다. 폭찹 고지전투는 소대와 중대 규모의 미군이 보여준 전설적인 분전인 동시에 전략요충지도 아닌 고지 하나를 두고 수 많은 목숨이 사라져간 무의미한 전투이기도 했다.
휴전 후에 고지의 참호와 벙커를 모두 해체하고 있습니다.
PS. 휴전서명과 동시에 UN군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았지만 우리와 북한은 휴전이 발효되는 자정까지 고지 하나를 두고 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화 '고지전'을 보시면 그 슬픔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참 잘 만든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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