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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폭찹 고지전투 (1부)

by uesgi2003 2014. 6. 25.

 

(크롬에서 폰트가 작아지고 색깔까지 바뀌는 이제부터는 IE에서만 글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저장할 때마다 바뀌니 이제는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크롬에서 보실 때에는 또 포맷이 깨질 수도 있습니다.)

 

뽐뿌라는 사이트에 제 역사 이야기를 알리기 시작하면서 많은 분들이 놀러오고 있습니다. 외국의 좋은 역사자료를 소개하고 싶어서 블로그를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를 좋아하시는 분이면 대환영이죠. 외국의 전문자료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너무 길고 재미없기는 해도, 그래도 이 정도의 한글자료를 만나기는 힘들겁니다. 물론 저는 정리만 했을 뿐이고, 모두 외국의 역사학자들의 노력덕분입니다. 

살아가면서 역사공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는 외국어, 경제경영, IT 지식이 정말 중요하죠. 그렇지만 오랜 세월을 지내고 보면 역사공부(인문학공부)가 미묘한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줍니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고민은 전세계의 선조가 이미 수백 만 번은 더 했을 고민이고, 우리가 처한 상황은 과거에 반드시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혜 또는 착오가 가져온 결과를 보고 나의 그리고 우리의 행동을 예단할 수 있습니다. 


예고했던대로 이번 주도 한국전쟁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훌쩍 뒤로 넘어가서 지리한 고지점령 전투를 벌였던 1953년 여름이야기입니다. 휴전 바로 직전의 전투입니다. 마치 명작 '고지전'처럼요.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폭찹 고지전투



우선 배경설명을 간단하게 해야겠죠? 장진호 전투 등에서 일격을 당한 연합군(당연히 한국군 포함)은 1951년 1월 14일에 서울을 다시 내줬다가 3월 14일에 서울을 다시 수복했습니다.

그 후부터 휴전이 될 때까지 지금의 38선의 모든 산악지대를 놓고 일진일퇴를 벌였고 그 중에 폭찹 고지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처럼 좀 나이를 먹은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흔하게 들었던 온갖 고지전투가 다 망라되어 있군요. 많은 비난을 샀던 8군과 10군단 이중 체계는 맥아더가 해임되면서 워커의 후임인 매튜 리지웨이의 8군으로 통합되었습니다. 


포크 찹 고지의 공식명칭은 고지 255이지만 지도에서 보이는 형태와 1959년 영화때문에 폭찹Pork Chop 고지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전사가 마샬Marshall의 책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1953년 4월에 벌어진 이틀간의 전투만 다루고 있다. 실제로는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어느 전투보다도 오랜 기간 계속되었고 미군, 태국군, 콜롬비아군, 한국군과 중공군이 상대를 죽였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에 남한을 침공한 후에 미군과 UN군이 참전하고 다시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선은 아래 위로 심하게 요동쳤다. 그렇지만 1952년 7월이 되자, 양측은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어느 쪽도 심각한 손실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1952년, 북한과 중공군은 최전선에 29만 명, 예비군 60만 명을 배치했고 UN군은 최전선에 25만 명, 예비군으로 45만 명을 배치시키고 있었다. 


판문점에서 지루하면서도 격렬한 휴전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한국의 고지에서는 마치 1차대전과 같은 참호전이 벌어졌고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미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고지참호전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하트브레이크 릿지Heartbreak Ridge, 펀치볼Punchbowl, 캐피틀Capital 고지와 후크Hook 고지전투는 양쪽의 선전장이 되면서 언론의 눈과 입을 집중시켰다.


포크 찹 고지에 쏠린 관심은 공산당 선전책동 덕분이었다. 그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하던 펑더화이Peng Dehuai는 마오쩌둥Mao Tse-tung이 의장으로 있던 중앙군사위원회(CMC)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펑의 지휘관은 여러 자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펑의 부관 덩화Deng Hua는 13 야전군 지휘관인 동시에 평화협상 대표였다. CMC의 군정보장 리커눙Li Ke Nong은 외교차관인 동시에 중국인민해방군 군정보부장이었으며 판문점 중국대표단장이었다. 

리는 외교와 정보 직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 편으로는 휴전협상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전쟁을 독려했다. 결국 협상이 난항을 겪을 때마다, 고지에서 벌어지던 전투는 군사적 가치보다는 정치와 선전가치때문에 더욱 격화되었다. 



판문점 휴전협상장 모습입니다. 북한은 전쟁당사자로 참석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에 반대하며 전쟁을 계속 주장했기 때문에 우리는 배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영문에서 나오듯이 UN군 사령관, 북한군 사령관과 중공군 사령관이 휴전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

 

1952년 5월, 제45 보병사단을 맡은 데이빗 루프너Ruffner 소장은 서부전선 중앙의 1구단 우익에서 중공군 제13 야전군의 제39 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루프너는 주방어선(MLR)의 전방을 두텁게 만들기 위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전방의 고지 10여개를 점령하기로 했다. 남서쪽 마지막 고지 2개인 폭찹과 올드 발디Old Baldy(고지 266)은 중공군 수중에 있었다.

 

6월 6일과 7일, 279보병연대가 북쪽 고지 6개를 점령했고 180보병연대는 남쪽 고지 6개로 전진해들어갔다. I중대가 한 시간정도의 총격전 끝에 폭찹을 점령하고 바로 진지를 쌓아올렸다. 이후 며칠 동안 중공군 346, 347과 348연대가 반격해왔지만 I중대는 포격지원을 받으며 막아냈다. 루프너는 포크 찹 고지와 올드 발디 고지를 방파제삼아 45사단의 주 방어선을 확장시켰다.

 

1952년 가을, 제2 보병사단이 45사단과 교체했고 제9 연대가 폭찹과 올드 발디 고지를 맡았다. 10월, 태국 제21 보병연대가 폭찹을 다시 탈환했고 악전고투 끝에 11월에 있었던 중공군 39군 일부의 공격을 막아냈다. 다시 제7 보병사단으로 교체되어 폭찹 고지는 제31 연대가 맡았고 떠나는 태국연대는 벙커에 이런 낙서를 남겼다. "우리 폭찹을 잘 돌봐줘."

 

 

 

태국군은 한국전쟁 기간동안 총 11,786명을 파병했고 해군과 공군도 파병했습니다. 사진은 1951년 1월, 폭풍에 밀려 동해안에 좌초한 태국해군의 쁘라세Prasae 호입니다. 이 전함은 영국이 2차대전 후에 태국에게 판매한 콜벳 전투함이었는데 결국에는 회수하지 못하고 폐기처분했습니다.

 

1952년 늦은 겨울, 덩화는 중공군이 방어에만 머물지 말고 적극적인 반격전략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군사위원회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펑더화이는 23과 47군을 폭찹 고지 부근으로 이동시켰다. 

1953년 3월 1일, 중공군 포대가 8,000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3월 23일, 중공군 23군의 63사단과 47군 141사단 병력 일부가 올드 발디, 포크 찹과 191 고지를 동시에 공격했다. 

 

I중대 조 상병은 이렇게 회상했다.

"3월 23일, 50명이 포크 찹 부근을 정찰하고 있었다. 참호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적의 박격포탄과 포탄이 날아들었다. 오른쪽에는 더 많은 포탄이 쏟아졌다. 우리 등뒤에 중공군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포위된 것을 알았다.  고지 위의 참호로 되돌아갔지만 중공군이 먼저 와 있었다. 백병전이 벌어졌고 끔찍한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나는 팔을 물렸고 철모도 총에 맞아 벗겨졌다. 참호 아래로 빠져나가 수류탄으로 중공군 하나를 죽였다. 그 날 밤은 포탄구덩이에서 보냈고 밤새 적의 포탄이 떨어졌다. 새벽이 되어 누군가가 나를 일으켰다. I중대는 중공군을 밀어냈다."

 

중공군은 I중대를 700m 정도 밀어냈지만 자정무렵에 7사단 얘비대 중 2개 중대가 반격을 가해 폭찹을 되찾았다.

 

중공군 141사단의 1대대는 올드 발디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정치장교는 3중대에게 선두로 올라가 고지에 승리의 깃발을 꽂으라고 지명했다. 고지에는 최근에 도착해 전투경험이 없는 콜롬비아 3대대가 있었다. 집중포격의 지원을 받은 중공군은 저녁 9시 정도에 UN군의 참호에 접근했다. 미군 중대가 콜롬비아군을 지원했지만 중과부적이어서 뒤로 물러났다. 중공군 3중대는 "이 승리는 중대장의 몫이다"라고 외쳤다.

 

 

삼각 고지를 공격하기 전에 터널 안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는 중공군입니다. 

 

 

중공군 의무병의 모습인데... 당시 사진을 보면 선전을 위한 연출장면이 꽤 많습니다. 이 사진도 연출로 보입니다.

 

올드 발디를 잃었기 때문에 폭찹도 포기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올드 발디를 중공군에 빼앗긴 수모때문에 폭찹은 반드시 지켜내기로 했다.

중공군 47군이 다음 목표인 폭찹을 공격하기 위해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양쪽은 휴식을 가졌다. 미국언론은 올드 발디 고지상실을 맹비난하면서 7사단을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역설적으로 미국언론은 중공군에게 선전책동 재료를 주고 있었다. 7사단은 4월부터 7월까지 중공군을 상대하면서, 중공군의 스피커를 통해 자국언론의 비난을 듣는 이중고를 겪었다.

 

1953년 4월, E 중대의 2개 소대가 폭찹 고지에 주둔해 있었는데 총 병력은 96명이었고 이중에는 공병과 의무병도 있었다. 1과 3소대는 소총수 76명이 있었고 이중에 20명은 방어선 밖의 청음소에 배치되었다. E 중대는 2개 소대가 더 있었고 병력을 순환배치하고 있었다.

벙커와 참호는 8군의 전통적인 방식대로 단단하게 만들어졌지만 폭찹 고지는 마치 모자 위의 움푹 패인 모양이어서 2개 소대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닛산 알티마 시승때문에 새벽부터 8시간 동안 700km 정도를 운전했더니 지금 비몽사몽 상태입니다. 짧지만 1부는 이것으로 줄이고 2부에서 모두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