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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미국역사상 최악의 명령불복종, 맥아더

by uesgi2003 2015. 8. 20.


(언제 오나 했는데 드디어 나타나기 시작했군요. 이런 시기에 이런 글을 올린 저의가 뭐냡니다... 하나 둘이 아니어서 이제는 차단합니다만, 다른 분을 위해 설명하면 8월 15일 광복절이 지난 주말이었고 특집아니 특집으로 필리핀 해전 장편을 정리했죠.

당연히 각종 커뮤니티에는 일본의 패전과 태평양전선에 대한 이야기가 난무했습니다. 맥아더도 토론의 대상이 되었겠죠?


그럼 다시 이야기를 하나 더 정리하자 싶어서 16일부터 자료 찾아 정리하고 어제 마무리를 지은 것입니다. 맥아더에 대한 미국기록을 정리하면 종북인가 보죠?) 


맥아더를 구국의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보니, 맥아더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정리하면 별의 별 시비가 난무합니다. 우리나라의 편협한 자료 외에 미국의 자료와 시각을 볼 수 있다면 종북 운운거리기 전에 고마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 분 아니면 우리는 빨갱이 세상에서 산다는 8~90세 노인의 논리가 난무할 겁니다. 어쨌든 맥아더에 대한 정확한 비평은 데이빗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번역출간되었음)으로도 충분하지만 



이번에는 밀리터리 히스토리의 릭 존슨의 자료를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군인과 전쟁에 상당히 우호적인 매체인데도 이 정도의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미국역사상 최악의 명령불복종, 맥아더 

 

초등학생도 미국대통령이 군통수권장임을 안다. 건국당시부터 그랬던 일이고 이견의 여지가 없다. 미국역사에서 이런 사실을 망각한 장군은 극히 드믄데 1861년 볼티모어점령 후 마음대로 통치한 북군장군 벤자민 버틀러Benjamin Butler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렇지만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처럼 노골적으로, 거듭해서 대통령의 권한에 도전한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다. 대통령과 합동사령관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한 사람은 그가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해리 트루먼Harry Truman대통령과 맥아더 사이에서 19514월에 벌어진 마지막 맞대결은 전설적이었다.


벤자민 버틀러는 볼티모어의 분리주의 난동을 잘 진압했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했지만 독단적인 행동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전쟁초기에도 두 사람은 심하게 반목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능력이 부족하면서도 주인공병에 걸려 있다고 믿었고 맥아더도 트루먼을 병약한 몸의 하급장교 출신이라고 얕잡아 보았고 대통령으로서도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이렇게 반목했고 트루먼이 대통령직에 오른 지 56개월 만인 195010월에야 첫 회동이 성사되었다.



트루먼은 너무 나쁜 시력때문에 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포병장교로 임관했습니다. 1차대전 중 부대원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아 젊었을 때부터 리더십을 입증했습니다. 미국인이 존경하는 대통령에서 5~7위 안에 꼽히는 뛰어난 대통령이었습니다. 

 

맥아더는 트루먼이 2차대전 종전 후에 미국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항명을 시작했다. 맥아더는 연합군사령관으로, 일본에서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무한한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그의 실제 속마음을 알 수 없지만, 미국대통령의 명령보다 일본에서의 임무가 더 중요하다며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전령을 참모총장에게 보냈다.

 

1950625, 북한이 남한을 기습공격했고 미국이 2차대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른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미주리 출신의 대통령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장군간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트루먼은 허약한 대한민국ROK을 지원할 병력을 투입했고 더글라스 맥아더를 파병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 전에 일본주둔 미 8군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7, 24, 25보병사단과 1기병사단은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고 훈련도 안 된 어설픈 상태에서 투입되었다. 78, 맥아더는 UN사령부 총사령관과 미극동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UN과 트루먼이 승인한 권한에 따라 대북한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북한군 정예사단에 대항해 황당하게 1개 대대로 맞섰던 오산전투입니다. 맥아더에 이어 연합군을 지휘한 릿지웨이는 말도 안되는 결정이었다고 맥아더를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맥아더는 북한군부터 중공군까지 무척 얕잡아 보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맥아더는 한국전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전쟁을 수행했다. 629, 극동공군FEAF에게 북한공항을 공습하라고 명령했는데 참모총장이나 대통령과 일체의 협의도 하지 않았다. 미국정부는 전쟁발발 당시에 미군은 38선 이북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었기 때문에 명백한 명령불복종이었다.

그렇지만 맥아더의 명령을 취소하거나 제재하려는 움직임은 없었고 24시간 후에 트루먼이 맥아더의 명령을 승인했다.

 

731, 맥아더는 포모사Formosa(대만)를 방문해 본토에서 쫓겨난 장제스(장개석)을 만나 국민당군의 한국전 참전을 협의했다(사진참조). 이런 방문과 협의도 워싱턴과 일체 협의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미정부의 한국전 방침을 대놓고 위반한 것이었다. 맥아더가 독단적으로 장제스와 참전에 대해 협의하고 미정부를 대신해 국민당군의 무장, 보급과 운송을 약속했다.


 

맥아더는 중화민국(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트루먼 행정부와 적대저적인 언론에게 정부가 중화민국을 연합국진영이 아닌 중립지대로 만들어서 아시아에서 고립시켜려고 한다며 비난했다.

맥아더의 성명은 1950828, 시카고에서 열린 해외참전용사 모임에서도 낭독되어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성명을 취소하라고 명령했고 맥아더는 바로 취소했지만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맥아더는 이미 또 다른 명령불복종을 저질렀다. 미합참은 9월 말에 한국군 이외의 병력은 중국국경에서 군사작전을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1024, 그는 한국전 지휘관들에게 중국국경에 접근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북한점령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한국군 전력이 부족하고 지휘관 역량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여서 군사적 필요성에 따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웨이크Wake섬에서 있었던 트루먼과의 회동에서 이미 승인을 받았고 930일에 국무부장관 조지 마샬에게서 받은 전령에도 필요에 따라 행동해도 좋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합참은 맥아더가 독단적인 행동을 할 때에도 트루먼과 이 문제를 협의하지 않았고 명령을 취소시키지도 않았는데 엄청난 권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야전사령관을 감히 통제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맥아더는 거의 매주 자신과 합참의 권력을 두고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115, 그는 공군사령관에게 압록강Yalu다리를 폭격해서 중국이 북한으로 들어오는 교통로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다시 한 번 미국정부의 정책과 반하는 명령이었고 압록강에서 만주까지의 교통로를 목표로 하는 공습에 대응한다면 확전이 불가피했다.

전폭기가 일본을 이륙한 지 2시간도 안되어서 합참은 맥아더에게 대통령의 명령을 전달하며 명령을 취소시켰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국경 8km 이내의 공습금지 명령을 다시 못 박으며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려고 했던 군사상황과 결정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압록강의 수풍댐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만주폭격을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은데... 소련의 참전을 불러올 수도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합참에 구체적인 근거를 대지 않으며 자신의 판단이 옳고 합참의 판단이 틀렸다는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대통령과 합참이 작전제한을 강요해서 한국전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직접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해서 합참과 더 큰 갈등을 일으켰다.

 

맥아더의 대답을 받은 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Omar Bradley원수(사진참조)는 트루먼에게 보고하면서 맥아더에 대한 염려도 함께 전달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맥아더는 압록강 일대의 공습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트루먼은 국지전 형태로 공습해서 확전시키지 말라고 조건을 달았다.


 

인천상륙작전 후에 맥아더의 인기가 워낙 높았고 민주당 정부의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맥아더를 손대는 것은 정치자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마음대로 결정하는 양아치Rogue장군을 그대로 두면 더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합참도 맥아더의 명령을 취소시키거나 통제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전쟁과 예산을 둘러싼 내부갈등으로 트루먼에게 힘을 싣지 않았다.

 

트루먼은 1950년 가을에 맥아더와 직접 만나기로 했다. 회동은 1015일 웨이크섬으로 결정되었다. 전쟁영웅과 만나 지지도를 높일 생각이었지 맥아더와 전략을 협의하거나 결정지을 생각이 없는 회동이었기 때문에 회동은 바로 끝났고 두 사람 모두 논쟁거리를 만들지 않았다.


 

트루먼은 맥아더와의 충돌을 계속 피했지만 트루먼이 1951년 봄에 공산군과 휴전협의를 한다고 하자 맥아더가 반대했다. 324, 맥아더는 미군의 취약점을 찾아냈으며 정부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성공을 거뒀다고 자랑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트루먼 행정부가 승전보다는 휴전을 모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자신을 옭아매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북한정도가 아니라 중공이 목표가 되었을 것이라는 내용도 발표해서 중공을 위협했다.

 

맥아더는 또 다시 트루먼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항명했고 모든 보도성명은 공개 전에 미리 정부의 검토를 받으라는 지침을 대놓고 무시했다. 맥아더의 3월 성명은 미국정부의 협상계획을 고의로 방해하고 연합국 간의 공조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왔다.

 

맥아더의 중공위협 그리고 군통수권자의 결정에 대한 공공연한 항명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었고 트루먼도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보도성명 발표 전에 검토를 받으라고 했던 1950126일 지침을 맥아더에게 다시 전했고 더 이상의 항명은 용납하지 않기로 했다.

맥아더의 해임을 결정했다.

 

트루먼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맥아더는 대통령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을 다시 저질렀다. 그는 공화당 소수파 리더인 조세프 마틴과 주고 받은 편지에서 미국의 정책을 계속 비난하며 반대했다.

심지어 편지내용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견해를 대중에게 전달할 통신채널로 마틴을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45, 마틴은 하원에서 편지를 낭독해서 백악관을 바쁘게 만들었고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을 더 앞당기게 되었다.

 

411, 브래들리장군이 맥아더에게 온갖 화려한 직함에서 물러나라는 트루먼의 명령을 전달했고 후임으로 매튜 릿지웨이Mattew Ridgeway를 임명했다.

이번에도 트루먼은 맥아더 해임결정을 단호하게 공개하지 않았고 맥아더는 그 틈을 이용해 사임으로 반격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맥아더의 항명은 행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고 연합국 간에 혼란을 가져왔고 미국의 지도력에 의심을 갖게 만들었다. 한국전쟁을 제한전으로 치른다는 정부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확전시켰고 중공과 소련의 참전규모를 늘리게 만들었다. 맥아더의 해임결정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민주당이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원인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고의로 대통령과 합참을 무시하며 항명했다. 트루먼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결과를 무릅쓰고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령관을 해임시켜야 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동안 몇 차례의 전쟁이 더 있었는데, 트루먼의 결정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식축구장에서 연설 중인 맥아더입니다. 한국전쟁에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미국에서의 시각은 매우 냉정합니다. 

이야기 말미에 다시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고 그냥 공화당도 1948년과 1952년 대통령선거에 그를 활용하지 않았고 정치권에서 밀려나 명목뿐인 기업회장직을 맡으며 말년을 보냈다는 정도만 설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