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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로마의 무덤, 파르티아 (1부)

by uesgi2003 2014. 9. 7.


어제 광화문에서 광란의 행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모 앵커의 말대로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표현을 하는 사람도 천박하거나 남을 해치는 자유는 삼가해야겠죠. 나치 친위대, 홍위병과 크메르 루주 모두 이렇게 마음이 병든 사람들의 집단 광기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역사를 배운다면, 집단 광기는 결국 자신에게 더욱 큰 피해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명량 그 이후'는 좀 여유를 가지고 정리할 생각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정치운명이 결정난 페르시아 원정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HBO 서사드라마 롬Rome 1 2를 꼭 보시기 바랍니다.

배우들의 열연도 대단하고,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의 몰락도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페르시아 원정


기원전 53년 6월 9일, 페르시아 출신의 파르티아Parthia 기마부대가 로마 보병부대를 카레Carrhae로 끌어들여 포위했다. 평원을 날렵하게 질주하며 화살을 날려 로마군 방패를 꿰뚫었다. 일방적으로 진행된 이 전투에서 3만 명의 로마군단은 완전히 사라졌다. 전사자 중에는 로마 1차 삼두정치의 마르쿠스 리시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도 있었다. 



파르티아 기병의 개인과 집단전술을 몽골이 그대로 흡수했습니다. 경기병으로 적을 교란, 유인, 분리시킨 후에 중기병 카타프랙트Cataphract로 궤멸을 시켰습니다. 



기원후 2~3세기 당시의 카타프랙트입니다. 몽골 기병도 활만 쏘는 경기병만 있을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데, 몽골 중기병도 이렇게 두터운 장갑을 두르고 도끼나 둔기를 사용해서 적의 중기병이나 중보병을 상대했습니다

눈썰미있는 분은 그림의 기병이 모두 등자없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등자는 아직 사용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병육성이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역사극을 보면 심지어 기원전인데도 등자를 사용하는 옥의 티가 흔합니다

 

로마는 페르시아 왕국에 대한 보복을 간절히 원했지만 국내의 정치상황과 내전이 위급했다. 기원전 4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마크 안토니)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기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병력을 모은 후에 동쪽으로 출발했다. 그는 동부왕국을 거치면서 왕을 만나 자금과 병력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중에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7 여왕도 있었다. 28살이었던 그녀는, 플루타르크Plutarch 말에 따르면 외모와 품성 모두 최절정기였다

사람은 길리기아Cilicia 타르수스에서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궁전에서 겨울을 보냈다. 파르티아 복수계획은 그렇게 미뤄졌고 병력을 시리아 총독 루시우스 데시디우스 삭사에게 맡겼다

그가 이집트에서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파르티아 왕세자 파코루스Pacorus 로마 망명객 퀸투스 라비에누스Quintus Labienus 군대가 선제공격에 나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를 침공했다. 라비에누스의 아버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도와 Gaul족과 싸웠지만 나중에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ius Magnus 편을 들었었다. 라이베누스는 카이사르의 정적인 마르쿠스 브루투스Marcus Brutus 카이우스 롱기누스Caius Longinus 진영에 가담했고 파르티아와의 협상에 나섰었다

 

공화파가 몰락하자 그는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관대한 제안을 뿌리치고 페르시아에 남았다. 이제 그는 파르티아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와 파코루스는 진군로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쓸어버리고 지중해 안티오크Antioch 이르렀다. 알렉산드르 대왕이 300 전에 점령한 처음으로 페르시아군이 안티오크에 나타난 것이었다

 

기원전 40 3,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군의 침공을 보고 받았고 즉시 페니키아Phoenicia 해안의 티레Tyre 달려갔다. 도착해서 받은 보고는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파르티아군은 주변 동맹국을 굴복시켰고 시리아에 남겨둔 로마군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편에서 자신에게 대항했던 공화파였다. 시리아 주둔군은 공화파 라비에누스를 따라 페르시아에 합류하거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시리아를 내줬다. 충성스러운 총독 삭사만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파르티아군은 시리아를 점령한 후에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라비에누스가 절반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향했고 나머지 절반은 파코루스와 함께 남진해서 유대왕국을 점령하고 안티고누스Antigonus 왕으로 앉혔다


동쪽의 절망적인 소식과 함께, 아내 풀비아Fulvia에 대한 소식도 들어왔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 대신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항했던 그녀는 패해 도시에서 도망쳐나와야 했다. 한때 동전에 얼굴을 새긴 최초의 여성일 정도로 강력했던 그녀는 남편에게서 더 큰 힘과 명성을 만들어내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남편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정신이 없다는 치욕스러운 소식이 들려왔고 남편에게 가는 여행길에 죽고 말았다. 


이제 안토니우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았다. 동쪽에 남아 파르티아군을 상대하거나 로마로 돌아가서 무너져내린 기반을 되찾아야 했다. 그는 본국 상황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귀향하기 전에 능력있는 지휘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Publius Ventidius Bassus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진화를 맡겼다. 나중에 탁월한 선택으로 증명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급히 돌아왔지만 10월이 되어서야 옥타비아누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책임을 죽은 아내 풀비아에게 돌리면서 정적이자 동맹인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개선에 최선을 다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에게 이복누나를 새신부로 추천했고 안토니우스는 동맹회복을 위해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전에 새겨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재미있는 것이, 뛰어난 인물의 곁에는 더 뛰어난 인물이 있어서 그의 앞을 막기도 하고 열여주기도 합니다. 로마의 최고 위인 중 한 명인 옥타비아누스(아래 사진참조)가 그의 정적이었다는 것이 불행이었죠. 


이제 안토니우스는 보다 실질적인 동맹을 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시실리, 사르디니아와 서부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카이사르의 정적 폼페이우스의 아들)를 처리해야 했고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안토니우스는 120척의 함선을 빌려주는 대신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모병한 2만 명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렇지만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실제로 전달된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정작 로마에 있는 동안 동부에서 희소식을 들었다. 벤티디우스는 11개 군단을 모병했고 라비에누스의 소아시아 침공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로마군은 15년 전에 크라수스가 겪었던 참패를 잊지 않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궁기병의 강력한 화살세례를 막아낼 것인지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다. 

먼저 로마병사의 표준 나무방패를 보강했다. 이전의 방패는 파르티아 화살에 너무 쉽게 뚫렸었다. 그리고 궁술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했다. 파르티아 궁기병이 사용하는 복합궁을 사용하는 궁병을 대거 고용하거나 징집했다. 

마지막으로 투석병Sling도 대거 동원했다. 



로마군의 비정규 투석병입니다. 일단 대열을 돌파당하면 다른 궁병과 함께 몰살당하는 상당히 약한 병과이지만, 강력한 보병 뒤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경기병이나 경보병의 경우에는 화살만큼이나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수호지의 장청이 내노라하는 양산박의 영웅들을 돌팔매질로 쓰러트리는 일화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빗과 골리앗의 전설적인 대결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원시무기는 집단으로 사용하면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고 큰 비용도 들지 않았다. 단순한 가죽끈만 있으면 무기는 어디에나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빗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단 한 방으로 적을 쓰러트리기는 매우 힘들었지만 수천 개의 돌팔매가 한꺼번에 쏟아지면 적의 궁병이나 기병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특히 (등자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적의 말을 놀라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거북대형으로 수비전술을 바꿨다. 파르티아 궁기병이 로마군 대열을 위협하면, 로마군은 방패를 겹쳐들고 화살을 막았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우스워보이는 대형이지만, 그리스 팔랑스와 함께 로마군 집단대형은 상당히 강력한 대형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찌르는 단검 글라디우스를 장비했었고 대형에 달려드는 적을 방패로 밀어내며 단검으로 찔러 쓰러트리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글라디우스는 세계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을 빼앗은 무기이기도 합니다. 


벤티디우스는 길리기아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에 소아시아 접경의 산악협로로 기병을 보냈다. 만약 협로를 장악한다면 라비에누스의 파르티아군의 배후를 끊을 수 있었다. 전과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렸던 크라수스와 달리, 벤티디우스는 신속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로마군에 유리한 지형을 전장을 선택했다. 평지는 적의 기병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언덕이 이어진 지형을 골라 기병의 돌파력을 상쇄시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