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티디우스는 파르티아군의 퇴로인 산악협로를 가로막고 있는 가파른 언덕 위에 진영을 꾸렸다. 적의 기병이 공격해오려면 험준한 지형을 힘들게 올라와야 했다.
뒤늦게 도착한 라비에누스는 상황을 살핀 후에 새벽공격을 결정했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파르티아 궁기병은 아침안개를 뚫고 나타났고 로마군은 투석병과 궁병 대열을 향해 돌격했다. 그렇지만 험준한 지형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한데다가 말을 붙잡고 있느라고 화살을 날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로마군은 적이 충분히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공격신호가 들려오자, 돌, 화살과 창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파르티아 기병은 투사무기를 막아낼 방패가 없었고 공격을 당한 말은 앞발을 들며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파르티아군은 중기병 카타프락트를 내보내 돌파하려고 했다. 평지였다면 지옥의 사신과도 같았을 중기병은 오히려 속도를 더 내지 못하고 일방적인 공격을 당했다.
수백 명이 쓰러지고 벤티디우스는 완승을 거뒀다. 그날 밤, 라비에누스는 몰래 달아났다가 나중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벤티디우스는 소아시아를 침공한 적을 처리한 후에 시리아를 노리고 있는 파코루스 왕세자에 대응하기로 했다.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스파이를 보내 파코루스에게 널리 알려진 유프라테스 강의 여울목을 건너라는 정보를 주었다. 파코루스는 이 정보를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훨씬 아래로 내려가 도강해서 벤티디우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었다.
남쪽으로 돌아가느라 며칠을 더 허비했고 로마군은 신속하게 이동했다.
벤티디우스는 파르티아군의 도강을 일부러 막지 않았다. 파르티아군이 도강하느라 허비한 시간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부대를 정비할 수 있었다. 파르티아군은 도강지점에 로마군을 없는 것을 보고는 기세가 올라, 작은 언덕 위에 있는 긴다루스Gindarus라는 요새도시로 바로 진격해갔다.
파르티아군은 도시 내에 특별한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고는 로마군이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경솔하게 접근했다. 갑자기 성문이 열리더니 로마군이 쏟아져 나와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왔다. 파트티아군은 무방비 도시에 입성하는 줄 알고 중기병을 선두에 세우는 실수를 했었고 로마군의 공격을 받고도 선회하지 못했다.
파르티아군은 전투 한 번 제대로 벌이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은 채로 다시 강을 넘어갔다. 그렇지만 왕세자는 시체로 남았고 로마군은 15년 전에 카레에서 당했던 치욕을 6월 9일, 같은 날에 갚았다.
벤티디우스는 파코루스의 머리를 잘라 시리아 도시를 돌아다니며 파르티아의 침공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탈 움직임을 막았다.
동부에서의 대승은 로마 전체를 환희로 들뜨게 만들었지만 안토니우스만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로마에 있는 동안 부하 혼자서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는 서둘러 동부로 출발했다. 대승의 명예를 다른 사람에게 돌려서는 안되었다.
벤티디우스는 질투에 다급해진 안토니우스의 명령을 받았던지, 만신창이가 된 파르티아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적에게 이탈했던 부족을 처리했다.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사모사타Samosata를 포위하던 중에 안토니우스가 들이닥쳤다.
벤티디우스가 사모사타 시민들에게서 막대한 뇌물을 받고 공격을 중단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로마에서는 그 소문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안토니우스는 벤티디우스에게 마음에 없는 온갖 칭찬을 한 후에 로마로 보냈고 상원은 파르티아를 상대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영웅을 환영했다. 벤티디우스는 영웅으로 은퇴해서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안토니우스는 사모사타 공성전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300개의 금화를 받고 포위를 풀었다. 이제 예루살렘에 있는 파르티아의 꼭두각시왕 안티고누스을 처리할 차례였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붙잡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친구 헤로데Herod(대왕)을 예루살렘 왕좌에 앉혔다.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이미 로마의 공기는 자신에게 차가웠다. 파르티아의 침공위기가 로마를 공포에 몰아넣었을 때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르타와 있었고 옥타비아누스를 로마시민과 함께 했었다.
그의 아내 옥타비아가 간절히 매달린 끝에 남편 안토니우스와 오빠 옥타비아누스의 위태로운 동맹이 계속 이어졌다. 안토니우스는 아예 파트리아 원정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로 했다. 파르티아 내부의 상황이 더 없이 좋았다. 오로데스Orodes 2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에 올라 20년 동안 페르시아를 통치하며 크라수스를 죽였었는데 왕세자로 지명된 프라아테스Phraates 4세에게 목숨을 잃었다.
프라아테스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형제 30명을 모두 죽였고 그렇게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 전체와 로마제국 서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빌려준 전함을 동원해 폼페이우스를 마침내 궤멸시켰다.
안토니우스의 기반은 로마제국 동부였다. 만약 파르티아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크라수스의 원한을 풀어주는 동시에 제국의 막대한 부를 동원해 로마를 움직일 수 있었다. 4년 전과 마찬가지로 길리기아로 병력을 동원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불러 원정에 함께 나섰다. 그녀는 임신을 한 채로 이집트로 돌아갔다.
르네상스 화풍으로 그린 두 사람의 정겨운 모습입니다.
카이사르는 아르메니아Armenia를 통해 파르티아로 쳐들어가려고 했었다. 안토니우스도 그 전략을 따르기로 했다. 시리아에서 6만 명의 로마 군단병, 1만 명의 스페인과 켈트 기병을 집결시켰고, 여기에 주변 동맹국의 3만 명 지원군을 추가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했던 로마군 2만 명은 오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는 가지고 있는 병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크라수스를 배신했던 아르타바데스Artavades 왕도 이번에는 6천 명의 기병과 7천 명의 보병을 보내왔다.
안토니우스 군대의 규모가 워낙 커서 인도까지도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플루타르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인더스 강이 아니라 나일 강이 더 급했을 것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하루 빨리 돌아가서 정부를 안고 싶었기 때문에 파르티아 원정을 몹시 서둘러서 진행했다. 로마에서 아르메니아까지 1,600km를 행군한 후에 쉴 틈도 주지 않고 바로 파르티아 국경을 넘었다.
적이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최대한 속도를 내기 위해 수송마차를 뒤에 남겨두었다. 각종 보급품과 대형 공성무기를 잔뜩 싫은 300대의 수송마차는 아르메니아 기병 등의 지원군 1만 명의 보호를 받으며 좁은 길을 느리게 따라갔다.
기원전 36년, 로마와 동맹군은 현재의 이란 북서부 지역에 들어섰다. 메디아Media 왕이 프라아테스에게 머리를 조아리려 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얻은 안토니우스는 즉시 메디아로 달려가 프라아스파Phraaspa라는 전략요충지를 포위하고 메디아 왕의 동맹을 요구했다. 아마도 안토니우스는 라리우스 3세의 보물과 하렘을 모두 차지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꿈꾸며 메디아 왕국의 보물과 여자를 노렸을 수도 있다(미드 롬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여자를 밝히는 장면부터 소개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메디아 왕은 파르티아 제국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공격해 온 로마군을 반길 생각도 없었다.
프라아테스 왕은 남쪽에서 4만 명(25%는 기병)을 모아 북쪽으로 향하던 중에 로마군의 수송대가 훨씬 뒤에 처져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궁기병을 따로 떼어 수송대를 공격했다.
파르티아군이 다가오자, 아르메이나 기병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파르티아군은 강력한 화살세례로 남은 병력을 몰아낸 후에 로마군의 생명줄과 같은 보급품을 모두 불태웠다.
수송대의 전멸소식이 전해지자, 로마 본대와 함께 있던 아르메니아 왕은 슬며시 빠져나와 자신의 나라로 달아났다. 창피하기도 했고 로마군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수송대의 전멸에도 불구하고 계속 프라아스파를 공격했다. 많은 피해를 입으며 쌓은 포위망을 포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대형 공성무기없이는 막대한 피해를 각오해야 했고 밤공기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로마군은 적의 영토 깊은 곳까지 들어왔고 후방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동맹국없이 겨울을 맞이하게 생겼다. 마치 1812년 모스크바에 들어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안토니우스는 몰려드는 파르티아군을 상대로 기병을 내보내기로 했다. 달아나는 적을 10km나 추격했지만 겨우 100명을 죽이는 것에 그쳤다. 이렇게 소모전이 이어지자 더 이상 원정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프라아테스에게 휴전을 간청했다. 황금왕좌에 앉아 활시위를 매기던 프라아테스는 로마군 사절에게 안토니우스가 이전에 내걸었던 포로반환과 크라수스의 부대상징 반환조건을 철회한다면 후퇴를 해도 좋다고 제안했다.
프라아테스는 로마군을 그대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며칠 후에 로마군이 진영을 비우고 떠나자 마자 파르티아군은 그 뒤를 집요하게 추격하며 공격해왔다.
안토니우스는 앗시리아의 평원을 통과하는 훨씬 짧고 편한 길을 택하려고 했지만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로 계획을 변경했다. 맹추위와 험준한 지형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파르티아 기병을 피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파르티아군의 추격은 로마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한 번은 후위에서 3천 명의 피해가 발생했고 안토니우스는 중보병을 데리고 급하게 달려가 막아야 했다. 그 다음부터는 투석병과 궁병을 측면과 후위에 배치해서 궁기병의 공격을 막았다.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의 숨통을 끊으려고 거북대형 안까지 들어왔다가 맹렬한 반격을 받고 물러나기도 했다.
이렇게 18번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로마군은 아르메니아로 들어가 임시 휴식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어느 한쪽이 승리하고 할 것도 없이 모두 지치고 탈진한 후퇴와 추격전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에 들어서자, 파르티아군도 말머리를 돌려 물러났다. 로마군은 국경을 넘은 후에 2만 명 이상을 잃었는데 전투보나 질병과 추위로 잃은 숫자가 더 많았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도 다시 8천 명을 잃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의 전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에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안티오크로 향했다. 아내 옥타비아가 병사들을 위한 월동복, 군자금과 식량을 가지고 안티오크로 오고 있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의 완전 무장한 2천 명의 지원군도 데리고 왔지만 파르티아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 상태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빌려준 120척의 전함 중에 85척만, 그것도 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 그대로 반환했다.
원정에서 실패하고 처남에게 배신당한 안토니우스는 분통이 터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로마에서는 야만민족에게 참패를 당한 무능력자일뿐만 아니라 아내를 버린 망나니로 낙인이 찍혔다. 옥타비아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추문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헌신적이었는데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안티오크로 오지 말라며 냉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여동생의 모욕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지만 옥타비아는 내전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남편의 집에 살면서 자신과 전처의 아이들을 정성껏 키웠다. 옥타비아가 남편에게 최선을 다할수록 로마의 여론은 안토니우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의 지극한 내조가 오히려 남편의 운명을 더 빨리 끝내는 상황이 되었다.
파트리아에서는 다시 내전이 벌어졌고 포위에서 풀려난 메디아 왕은 프라아테스왕의 공격을 받아 안토니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안토니우스는 지원을 약속했지만 이번에도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기원전 34년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시간을 허비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부로 나선 두 번째 원정에서 아르메니아를 공격해 불충의 책임을 물었다. 크라수스와 안토니우스를 배신했던 아르메니아 왕은 알렉산드리아로 압송되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와 벌인 악티움Actium 해전(기원전 31년, 지도 참조)까지 수감되었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목숨을 잃었다. 아르메니아는 이집트의 결정을 오랫동안 원한으로 삼았다.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정복해 배후를 다진 후에 메디아로 갔고 대단한 환영을 받았지만 이미 상당한 병력을 잃어서 파르티아 내전을 결정지을 전력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에게서 낳은 아들을 메디아 왕가의 딸과 결혼시켜 혈연동맹을 맺은 후에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위해 다시 로마로 향했다.
파르티아 원정은 안토니우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3만 명의 귀중한 병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최대 정적인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국 서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이탈리아 시민의 마음을 얻는 동안,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마음을 얻는데 그쳤다.
그가 잃은 3만 명의 전력공백은 마지막 기회인 악티움 해전까지 복구하지 못했다. 만약 그가 옥타비아누스처럼 클레오파트라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그가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했다면 로마의 역사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세계역사도 그만큼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과에 눈이 어두웠던 크라수스처럼, 그는 적을 과소평가했고 그렇게 파르티아(이란)를 로마의 천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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