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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
습지대의 요새-3개 사단에 맞서는 1개 연대-방위소총군의 알렉산드르 마트로소프-15대 전차의 돌진-부다페스트의 디프테리아-빵 한 조각과 권총 한 자루-벨리키예 루키에서 탈출했소-각 계급에서 한 명씩 처단한다.
겨울공세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전장은, 로바트(Lovat)와 서쪽 드비나(Dvina) 사이의 비테브스크(Vitebsk) 북부 습지대에 있는 요새도시, 벨리키예 루키다.
벨리키예 루키는 1941년 독일군 공세에서 요충지였으며 모스크바의 첫 번째 겨울공세에서도 중요한 목표물이었다. 독일군이 처음으로 점령한지 4개월 후인, 1942년 1월 9일 예레멘코와 푸르카예프(Purkayev) 장군은 모스크바를 노리는 중앙집단군을 밀어내기 위해 강습군을 비브테스크 방면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콤(Kholm), 벨리즈(Velizh), 벨리키예 루키와 같은 고립지대의 굳건한 수비에 막혀 피해만 입고 말았다. 벨리키예 루키는 프랑스에서 급하게 전출되어온 제83 보병사단 제277 척탄병연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1942년 여름 내내 러시아 제3 강습군이 포격과 함께 공격을 해와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벨리키예 루키는 그나마 본대와 멀리 떨어지지 않아서 뮌헨에서 가져온 3번과 28번 장갑열차를통해 보급을 어렵게나마 받았지만 콤과 로바트는 보급을 받기 힘들었다. 콤 남부에서 제8 기갑사단이 지키는 수비선이 다시 시작되는데 러시아군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을사람을 징병하고, 가축과 도구를 징발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정도였다.
사진 설명: 파괴된 러시아군의 장갑열차입니다. 이야기에 맞춰 독일군 장갑열차 사진을 올려야 하지만 러시아군의 장갑열차가 독특해서 가져왔습니다.
프랑스, 폴란드 등도 장갑열차를 사용했고 독일군도 장갑열차로 군수품을 수송하거나 일종의 움직이는 포대로 화력을 지원했습니다. 독일군의 경우에는 앞서 설명했던 것과 같이 점령지역의 시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러시아 포로를 거의 사람취급을 하지 않은 탓에, 후방지역은 장갑열차의 호위없이는 수송열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파르티잔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진의 러시아군 장갑열차는 T-34와 KV-2 전차의 포탑과 함께 잡다한 포탑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1942년 11월 19일, 두 번째 겨울공세가 스탈린그라드와 돈(Don) 강을 최우선 목표로 시작된다.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북부전선의 독일군을 꼼짝도 못하게 묶어두는 동안, 비테브스크 지역의 거슬리는 독일군 주둔지를 이번에 쓸어낼 생각이었다. 러시아 제3 강습군은 결국 이 지역을 손에 넣는데 성공하지만, 그 전에 먼저 벨리키예 루키부터 점령해야 했다.
푸르카예프 장군은 1개 연대가 지키는 이 도시를 3개 사단을 동원해 공격했다. 독일 제83 보병사단을 위 아래로 관통해 도시를 포위했다. 폰 사스(Von Sass) 중령의 지휘를 받는 7,500명의 독일군이 이 도시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전선에서 밀려 후퇴하던 병력이 도시로 밀려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병력이 증원되었다. 척탄병, 포병, 공병, 의무병, 에스토니아 자원병 등이 뒤섞이면서 미니 스탈린그라드가 만들어진 것이다.
푸르카예프 장군은 강습으로 이 도시를 점령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포병과 공군을 동원해 철저하게 두들기기로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폭탄이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건물, 벙커, 거리가 하나씩 폐허로 변했다.
완전히 포위된 독일군은 공수지원을 받았지만 너무 많은 양이 러시아군 진영으로 떨어지자 제6 비행단은 혼성부대를 구성해 수투카로 공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하늘을 점령한 러시아 공군과 도시 주변의 엄청난 대공포 망을 피해, 매일 조금씩 줄어드는 방어진지 안으로 정확하게 군수품을 떨어뜨렸다.
사진 설명: 공습하는 독일공군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포위망 안에 군수품을 공수하려는 수송기를 노리는 러시아군의 대공포망입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폭격기들이 전략폭격임무보다는 군수품수송이라는 황당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우에스기 왈: 이 당시부터 하늘을 러시아군에게 내주게 되는데, 독일공군의 피해가 크거나 갑자기 러시아 공군이 우월해진 것이 아니라, 늘어가는 연합군의 폭격에 대응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동부전선의 공군을 프랑스와 본토로 옮긴 탓입니다.
공격군을 저지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수투카를 동원해 군수품을 공수하게 만들었으니 공군의 지원은 거의 받지 못할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더욱 심각했는데 폭격과 병력 수송에 동원되어야 할 엄청난 수의 폭격기와 수송기가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240,000명의 병력을 먹여 살리느라 대공포 망과 러시아 공군에게 격추당합니다. 지금은 정확한 숫자를 찾지 못하니까 나중에 따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2월 13일, 무지비한 포격에 이어 4개 소총사단과 1개 기갑여단이 서쪽 방어선을 공격해 온다. 로바트(Lovat) 강의 교량을 방어하던 공병대는 10배가 넘는 적을 맞아 교두보를 내줄 때마다 다시 반격에 나서 교량을 조금도 내주지 않았다. 알브레트(Albrecht) 중위는 목 관통상을 입었으면서도 전선을 떠나지 않고 계속 지시를 내렸다.
사진 설명: 러시아군의 공격을 격퇴한 후에 독일군 장교가 참호를 순시하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시체가 썩기 때문에 바로 치워야했지만, 겨울에는 사진과 같이 그대로 둬서 참호 곳곳을 시체가 메우게 됩니다.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 날, 러시아군은 기갑군을 동원해 남부와 남서부 방면에서 공격해왔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러시아군은 작은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성공했고 독일군의 대형 화기와 대전차포는 차례로 파괴되면서 전차공격에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보병도 이번에는 제 역할을 다해주었다. 특히 광적인 공산주위자들인 콤소몰(Komsomol, 공산청년연맹)은 앞으로 이어질 몇 주간의 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서 조국을 되찾는데 큰 역할을 한다. 제254 방위군 소총연대의 알렉산드르 마트로소프(Matrosov) 일병은 목숨을 대가로 소련영웅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마트로소프는 자신의 중대가 독일군 벙커를 돌파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자 벙커의 기관총 총구 앞까지 기어가 자신의 몸으로 벙커 창을 덮고 기관총 총구를 죽은 다음에도 놓지 않았다. 그 덕분에 벙커는 제압되고 중대는 진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43년이 되자 이제 벨리키예 루키 지역은 성과 철도역, 2개의 방어점만 남게 된다. 성은 427명의 정비대대 병력이 지키고 있었고, 철도역은 1,000명이 남아있었다. 이들에게 공수된 45개의 컨테이너 중에 7개만이 제대로 떨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군 수중에 들어가버려 굶주리고 있었다. 300마리가 넘던 말도 모두 먹어 없앴고 매일 10명당 빵 한 덩어리만 주어졌고 20명이 고기 통조림 하나를 나눠먹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최소한의 위생시설도 없이, 온 몸은 이로 뒤덮인 채 굶주려가면서도 독일군은 항복하지 않고 계속 저항했다. 매일 그들에게는 3,000발 이상의 폭탄이 쏟아졌기 때문에 시체를 참호 밖으로 끌어내지도 못했다. 부상병은 가까스로 자리를 피해 상처를 스스로 묶어야만 했다. 식수는 죽음을 각오하고 진지 밖에서 길어와야 했는데 그나마도 파괴된 전차의 기름과 죽은 병사의 피가 섞인 물이었다.
사진 설명: 가끔은 이렇게 여유있는 군수품이 공수되기도 합니다. 사진에서는 부활절을 맞아 포위망에 갇힌 아군에게 삶은 달걀을 잔뜩 투하한 것입니다. 후방의 본대는 여전히 아군을 잊지 않고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죠.
도대체 독일군의 주방어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절망적인 상태의 이들을 구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구원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항상 그랬듯이 턱없이 부족한 구원병력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부근에는 브란덴베르거(Brandenberger) 장군의 제8 전차사단이 있었고, 휘하의 연대가 콤(Kholm) 남부전선을 적에게 내주고 스탈린그라드로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재앙을 막기 위해 기차에서 다시 모두 내렸다.
11월 21일 저녁, 8 기갑척탄병연대는 "연대는 레닌그라드-오데사 철로를 관통해 벨리키예 루키 서쪽으로 진군 중인 적을 즉시 격퇴하고 노보소콜니키(Novosokolniki)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림 설명: 북서쪽에서 벨리키예 루키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야전병원 기지였던 노보소콜니키는 이미 러시아군 전차대대와 기갑여단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독일군 제3 산악사단의 수송대가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22일 오전, 연대는 고르키(Gorki)에서 예상하지 못한 적을 만났지만 격퇴했고, 다음 날에는 2개의 기갑척탄병연대가 동쪽으로 전투를 벌여나갔다. 제28 연대는 고르키 동쪽의 고지대를 공격했고 제8 연대는 벨리키예 루키 방면으로 공격했다.
10대의 노획전차의 지원을 받은 8연대 제2 대대는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글라지리(Glazyri) 마을을 점령해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되는 듯 했다. 이제 멀리 벨리키예 루키의 건물 첨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부전선에서 늘 그랬듯이, 단 한 개의 대대가 모자라 마지막 순간에 물러나야 하는 일이 다시 벌어진다. 노획전차의 탄약이 다 떨어지고, 제1 대대는 아직 합류하지 못하고 있고 제2 대대는 적의 반격을 받아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러시아군 연대들이 기습의 충격에서 깨어나 반격에 나선 것이다.
독일군 제80 포병연대가 다시 구원에 나섰다. 지휘관인 스코티(Skotti)는 정확한 판단과 집중력으로 유명한 지휘관으로 제8 기갑사단의 전차전력이 바닥나면서부터 전투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 연대는 노획한 러시아 전차, 체코 스코다(Skoda)-38 전차와 몇 대의 4호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전의 80 연대도, 급하게 더 보강된 함부르크 제20 기계화보병사단과 제291 보병사단의 파견군도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북서쪽에서 포위된 도시에 접근하려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림 설명: 벨리키예 루키를 구원하려던 두 번째 시도도 불과 10km를 남기고 실패하고, 도시의 방어는 무너져내립니다.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던 80 포병연대는 장포신 화기를 동원해 포위된 수비병들에게 지원사격을 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동안 남서쪽에서도 구원작전이 시도되고 있었다. 60 군단이 비테브스크 부근에서 수비선을 펼치는 동안 12월 24일에 혼성부대가 벨리키예 루키를 10km 앞둔 지점까지 전진했다. 제291/331 보병사단, 제76 전차 척탄병연대, 제10 전차연대, 돌격포 대대 237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구성된 구원군은 포위된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전진했지만 거기까지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모든 전력을 소비한 상태였다. 그래도 뵐러(Wohler) 장군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제331 보병사단이 5km 지점까지 마지막으로 더 전진했다. 이제 걸어도 1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 짧은 거리가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고 있었다.
1월 9일에 이리 저리 긁어 모은 전차, 돌격포와 장갑차를 동원해 마지막 돌파를 시도했다. "절대로 멈추지 말고 쏘면서 전진한다"가 그들이 받은 명령의 전부였다. 어떤 경우에도 멈추지 말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에 주저앉은 차량의 병력은 근처에 있는 아무 차량에나 매달려야 살아남았다. 이 무모한 공격은 성공을 거둬 몇 대의 전차와 장갑차가 포위망을 뚫고 도시 안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림 설명: 파괴된 전차의 승무원도 구원하지 못하고 무조건 전투돌진해야 하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만화입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실감나게 감상하시길...
아사직전이던 수비병들이 성벽에서 나와 전차를 본 것이 정확하게 오후 3시 6분이었다. "드디어 왔다!"라며 눈물을 흘리고 환호성을 올렸다. 15대의 장갑차와 3대의 전차가 수비병 앞에 나타났지만 러시아군은 포위망이 뚫린 것을 알고는 요새 부근에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다.
공교롭게도 장갑차와 전차가 성문을 통과하기 직전에 선두차량이 포탄 4발을 맞고 완전히 주저앉아 버렸다. 무기력하게 줄지어 서있던 전차와 장갑차는 한 대씩 차례로 포탄을 맞고 불타올랐고 탈출한 전차병과 운전수들은 이제 보병으로 수비에 합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1월 15일 공수대대가 도시로 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월 16일 동쪽에서부터 독일군에게 재앙이 밀어닥쳤다. 제277 보병연대, 제2 대대의 사령부와 300명의 부상병이 있던 "부다페스트" 방어거점에 디프테리아가 발생했고 러시아 전차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슈바베(Schwabe) 소령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사스 중령도 사령부를 넘겨주고 항복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뵐러 장군은 "남은 병사들은 본대를 향해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탈출과 구원만 기다렸던 수비병은 알아서 탈출할 수 있을 테지만 부상병은? 부상병은 뒤에 남겨질 수 밖에 없었다. 동요를 막기 위해 한 명의 의무장교와 네 명의 의무병이 남았고 그들에게는 탈출작전이 시작된 지 2시간 후에 개봉하라는 편지가 전달되었다.
밤 2시에 모두라고 해 봤자 180명이 전부인 수비병이 집합했다. 그들에게서는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그들은 3개의 대전차와 기관총 진지를 돌파해 새벽 5시 30분에 결국 본대의 수비선에 도착했다. 그것도 포로 7명을 데리고.
밖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성에 남겨진 부상병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걸을 수 있는 30명의 부상병이 탈출을 시도했고 그 중 18명이 본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미처 집합하지 못한 8명이 탈출에 나서 영화에서나 나올 역경을 뚫고 살아남는다.
(우에스기 왈: 베네만(Behnemann) 중위의 탈출기가 4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이야기가 너무 늘어져서 여기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군은 벨리키예 루키에서 싸웠던 포로들만 찾아낸 다음 요새로 끌고가 군법재판정에 세웠다. 그리고는 각 계급에서 한 명씩에게 교수형을 판결했다. 한 명의 장군, 한 명의 대령, 한 명의 중령... 한 명의 일병.
1946년 1월 29일, 벨리키예 루키의 레닌광장에서 교수형을 집행했고, 남은 포로들에게는 20~25년의 노역을 선고했다.
10,000명에 가까운 수비군 중 탈출에 성공한 200명을 빼고는 11명의 포로만이 1953년에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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