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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 (5) - 작전명 들소(Buffalo)

by uesgi2003 2011. 8. 12.


 

독일군의 동부전선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올린다고 했는데, 정작 이야기를 읽다보면 독일군이 선방하고 러시아군이 국토를 되찾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는 내용만 나와서 괴리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배경지식에서 제가 올렸던 문구 "스탈린그라드는 독일의 승리가 멈춘 전투"라는 말 기억하시나요? 

바로 그렇습니다. 동부전선이 무너지고는 있지만 아직 휴전을 이끌어낼 충분한 여력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독일의 패전이 시작된 전투, 쿠르스크"까지는 그럭 저럭 버티고 거꾸로 러시아군을 두들기는 내용이 이어질 겁니다. 

벨리키예 루키 편이 끝나면 독일군이 완전히 궤멸하는 과정이 설명될 것입니다. 

 

작전명 들소(Buffalo)

 

 

 

 

르제프. 홍수를 막아서는 방파제-4번의 여름, 4번의 겨울전투-350km 늘어진 전선-250,000명의 탈출-"장교는 짐을 싸고 있다"-공병의 "지옥정원"-전화로 교량폭파-완벽한 후퇴-풀려난 22개 사단


2차대전 동부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세바스토폴, 로스토프, 레닌그라드, 모스크바와 같이 유명한 도시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가 유명하지만 데미얀스크와 같이 마을 수준의 작은 도시를 둘러싼 전투도 그 어떤 전투보다 치열했던 경우가 많다. 볼가강 상류의 르제프(Rzhev)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가장 치열했던 전장 중 한 곳이다.

1941 10월부터 1943 3월까지, 동부전선의 한 모서리였던 이 도시는 볼가강 상류에서 하류로 목재를 흘려 보내는 경제 중심지였기에 수 백년 동안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 귀족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대전 기간 중에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1941 10, 동 프러시아 제206 보병사단의 척탄병대대와 라인랜드-베스트팔리아 제26 보병사단의 정찰대대가 모스크바 진격로에 있던 르제프를 점령하면서 러시아의 젖줄인 볼가강에 처음으로 도착한 독일군 부대로 기록된다.

러시아군은 첫 번째 동계공세에서, 르제프를 해방시키는데 데에는 실패했지만 칼리닌(Kalinin)을 탈환하고 볼가강에 접근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독일 최고사령부는 데미얀스크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르제프를 고집하면서 중앙집단군의 최전선으로 자리잡게 된다.

 

1942 1월과 2,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예레멘코(Yeremenko) 대장은 강습군을 동원해 르제프 수비군을 몰아내려고 전면공격을 했지만 실패한다. 그 다음의 포위공격에서도 실패한 그는 도시를 남겨둔 채로 우회해 남하하면서 제9 군을 뒤로 밀어낸다.

르제프는 예레멘코라는 홍수를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했으며 힘을 잃은 그의 공세는 벨리즈(Velizh)와 벨리키예 루키(Velikiye Luki)에서 멈추게 된다. 상급대장 모델(Model)이 중앙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첫 번째 동계공세를 좌절시킨 전환점이 바로 르제프였다.

러시아군은 2년에 걸쳐 여름과 겨울공세를 펼쳤지만 르제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모델은 수비의 대가로 불리는 계기가 된다. 모스크바에서 겨우 180km 정도 떨어진 르제프는 러시아를 향해 뻗은 주먹과 같은 존재였고 히틀러가 다시 공세에 나선다면 데미얀스크와 함께 주요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최우선 공격목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 군의 240,000명이 전멸하면서 독일은 공세에 나설 힘을 잃었다. 히틀러는 돌출지역에서 물러나 전선을 축소시켜 모자라는 병력을 보완했어야 했지만 북부집단군에게 데미얀스크를 강요했던 것처럼 중앙집단군에게는 르제프 고수를 강요했다.

모든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은 히틀러의 고집을 비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첫 번째 겨울 공세가 끝나자, 르제프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유일한 돌출 전선이었고, 특히 볼가강을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얻는다면?"이라는 기대를 접고 물러날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사진 설명: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입니다. 


르제프에서 군대를 철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병력을 이동하거나 전선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승리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르제프에서 철수하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그라드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레닌그라드에서 코카서스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위기에 몰리면서, 히틀러는 참모 장군들의 강력한 조언을 따라 9군 전체와 4군 일부를 르제프에서 빼내 전선을 축소시키기로 결정하고 '들소작전'을 진행하기로 한다.  

4주의 준비시간이 주어진 9 군은 진흙장군(Mud General, 러시아의 봄은 모든 땅이 진흙으로 변해 군사작전이 거의 불가능해진다)이 오기 전에 새 수비선으로 물러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설명: 봄이 되면 어떤 전투도 벌이지 못할 정도의 진흙장군이 찾아옵니다. 

사진에서와 같이 일반 도로도 모두 진흙수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러시아군의 전차의 캐터필러는 상당히 넓게 만들어져 있으며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큰 통나무를 전차에 싣고 다닙니다. 


 

사령부의 지도 앞에 앉은 모델은 참모들과 철수작전에 대해 협의하고 있었다뭘 준비해야 할까먼저 새 수비선을 정찰해야 하고단계별 철수를 위해 후위 방어선을 정해야 하고 190km의 도로와 철로를 깔아 모든 무기와 군수품을 실어 날라야 하고가축과 농기계와 같은 자산도 잊어서는 안 된다그리고 열차와 트럭의 적재용량도 미리 파악해서 계산해야 한다.


단 한가지도 운에 맡겨서는 안된다. 특히 독일군에 협력했기에 보복당할 60,000명의 시민도 후송해야 한다. 그리고 운송이 끝나면 1,000km의 철로와 1,500km의 전선을 철거하거나 파괴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29개 사단, 250,000명의 병력을 어떻게 철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등 뒤에 적을 둔 상태에서. 수송과 전투준비, 철수와 전투를 동시에 벌여야 하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보안을 위해 모든 것을 위장하고 심지어 일부 참모들 외에는 작전에 대해 알리지 않았지만 러시아군은 최전선의 스피커를 통해 "너희들 장교는 짐싸고 있다는구나. 낙오되지 말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미리 확인해봐라!"라는 방송을 했을 정도로 보안이 지켜지지 않았거나 러시아의 정보망은 막강했다.

독일군은 정보누설보다도 더 심한 두통을 앓고 있었다. 2월 중순이 지금은 아직 눈이 많이 쌓인 상태라 썰매를 기반으로 철수작전을 준비하면 되지만 3월 초가 되면 썰매는 거꾸로 장애물이 되고 만다. 썰매? 트럭? 어느 것으로 작전계획을 짜야 하는 것일까? 결국 날씨가 어떻게 변하던 대응할 수 있게 준비하는 수 밖에 없었다.

3 1일의 날씨는 얼음이 녹으면서 도로에는 물이 올라왔다. 그러나 저녁 7시로 예정된 철수시작을 위해 전화선을 걷어내고 지뢰매설 작업을 하던 중에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면서 다시 도로가 얼어붙었다. 다시 급하게 썰매를 동원해 급하게 옮겨 실었다. 날씨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했기 때문에 예정된 7시에 작전을 시작했고 추격하는 적을 막을 후위부대만 남겨졌다.

 


뮌스터(Munster) 6 보병사단의 대대가 워낙 오랜 동안 진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런 행군이 이제는 낯설었고, 병사들 마다 소총, 진지공사용 도구, 수류탄을 운반하느라 주저앉고 싶은 지경이었지만 밤새 34km를 걸어 첫 번째 수비선에 도착했다.

최전선에는 약 1/3의 병력이 남아 후위방어를 맡았다. 독일군은 이리 저리 움직이고 기관총을 갈겨대며 마치 병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러시아군은 공격정찰을 하기로 하고 제58 척탄병연대, 8 중대의 참호를 기습해 장악한다. 마침 일대를 순찰하던 호첼(Hotzel) 중위는 기관총을 전방에 발사해 더 이상의 병력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참호 양쪽 끝으로 병사를 투입해 러시아군을 밀어낸다.


그림 설명: 22개 사단이 르제프 돌출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전선을 줄이고 22개 사단이 포위당하지 않도록 들소작전이 1943년 봄에 진행됩니다. 돌출부 전선을 줄여 상당한 예비병력을 만들어냈습니다만 히틀러의 과대망상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러시아군은 후퇴했고 그들은 한 명의 포로도 데려가지 못했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여전히 독일군이 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동안 볼가강의 왼쪽 전선의 상황은 심각하게 발전했다. 레페티카(Lepetikha) 돌출지역에 박격포 세례를 퍼부은 다음, 200명의 러시아군이 얼음을 건넜다. 박격포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독일군은 이미 보병포와 기관총을 배치했고 러시아군이 참호 근처까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을 퍼부어 전멸시켰기 때문에 이번에도 러시아군은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다. 후위부대의 기민한 대응덕분에 첫 번째 수비선으로 아무런 차질없이 철수할 수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러시아군은 전병력을 동원해 추격에 나설 것이고, 후위부대만으로는 추격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러시아군의 추격을 지연시킬 수 있을까? 도로, 철로, 교량, 건물 파괴방법은 전쟁초기에는 러시아군이,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참패 후에는 독일군이 사용했었지만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적을 잡아두지 못했다. 그리고 방어만으로도 병력이 모자라는 후위부대가 대대적인 공병작업에 매달릴 수도 없었다.

1차대전부터 적의 발목을 잡아두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지뢰매설이었다. 다양한 지뢰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뿌려질 수 있는데, 독일군의 S-지뢰(Mine)는 사람의 머리 높이로 튀어올라 파편을 뿌리는 악명높은 지뢰였다.

 

(우에스기 왈: S-지뢰는 지연신관을 사용할 경우 4~5초 후에 튀어 올라 적의 중심에서 반경 90m 범위에 320개의 쇠구슬과 파편을 흩뿌리는 한 번 걸리면 치명적인 지뢰입니다. 러시아군도 온갖 폭발물 설치에 재능을 보였지만 지뢰매설과 응용에 대해서는 독일군이 거의 모든 악독한?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이 지독한 문명의 이기는 독일군이 빠져나간 참호, 각종 교량, 도로, 장애물에 설치되었다. 러시아군은 이미 전쟁초기에 온갖 폭발물을 설치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속이려면 뭔가 더 교묘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림 설명: 탈환한 지역에서는 어떤 물건도 함부로 만져서는 안됩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지뢰를 연달아 3발을 묻어서 영국군이 두 발을 들어올리고 안심하면 터지게 하거나, 신관을 아래에도 연결시켜서 제거하려고 들어올리는 순간 터지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신무기가 전차 앞에 테니스 땅을 다지는 도드레를 달거나 쇠사슬 뭉치를 달아서 밀고 가며 터지게 만드는 특수전차였습니다.  


9 군의 공병장교들은 1차대전을 겪었고 지뢰사용의 대가로 알려진 롬멜을 따라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지뢰가 제 역할을 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롬멜이 죽음의 정원(Infernal Gardens)”이라고 부른 지뢰밭은 적에게 심각한 정신적 타격도 주었다. 행군하던 적이 죽음의 정원에 걸리면 꼼짝도 못하게 되고, 심지어 전차까지도 그 자리에 얼어붙게 된다. 주변의 땅을 한 뼘씩 모두 조사할 때까지 아무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공병이 도착해 지뢰탐지기를 사용해도, 지뢰 위에 일부러 빈 깡통이나 포탄 조각을 올려두었기 때문에 지뢰제거 작업이 끝난 후에도 다시 한 번 죽음의 정원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지뢰 밑에 지뢰를 심어, 위의 지뢰를 걷어내는 순간 공병을 하늘 높이 날려보내기 때문에 공병의 지뢰제거 작업도 아무런 도움이 안될 경우가 많다.

롬멜의 아프리카식 죽음의 정원은 르제프에서 더욱 진화한다. 9군 공병대는 집 문에 도화선을 설치해 문을 열면 문지방에서 지뢰가 터지게 했고, 창문과 대전차 지뢰를 연결해 창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노렸다. 심지어 벽에 기댄 사다리, 손수레, 삽과 괭이에도 지뢰를 연결해 터지게 만들었다. 계단에도 어김없이 지뢰가 숨겨졌다. 러시아군이 독일군의 정보에 목말라 있는 점을 노려 서류라고 씌어진 종이상자에도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다.

지뢰와 부비트랩이 얼마나 잘 설치되었는지 후위부대가 필요없을 정도였다. 지옥의 정원에 걸린 러시아군 사이에서는 대공황이 일어났다. 러시아군 진영에서는 포성대신에 지뢰매설을 알리는 경고음이 끝없이 울렸고 장교들은 병사들을 전장으로 몰아내는 대신에 자신의 목숨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러시아군은 마치 유령을 만난 사람처럼 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진 설명: 독일군의 교묘한 지뢰와 부비트랩 매설때문에 러시아 공병의 피해가 유달리 컸습니다. 이렇게 금속탐지기로 뒤지는 동시에 왼쪽의 병사처럼 긴 장대로 땅을 일일이 쑤시고 다니며 찾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암호를 사용하지 않고 통신하기 때문에 독일군의 감청에 그대로 노출되는데, 206 보병사단은 다음과 같은 교신을 포착했다. “말을 마구간에 넣고 집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폭발하더니 마구간과 집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망할 독일놈들은 우리가 의심하는 곳에만 지뢰를 심지 않았습니다.” 다른 교신에서는 공병이 도착하기 전에는 건물에 들어가지도, 어떤 물건도 건드리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모델 원수가 바라던 대로 지뢰매설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21일 만에 독일군은 르제프 돌출부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340km 정도의 전선을 줄인 덕분에 3개의 기갑사단을 포함해 총 22개 사단의 여유병력이 생겼고 중앙집단군은 이제 예비 병력없이 전투를 벌이는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의 공식 전쟁기록은 모델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2개 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독일군 1.5개 군이 손실을 거의 입지 않고 탈출했다는 것은 지휘관의 심각한 실책이었기 때문이다. “칼리닌(Kalinin)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해 상당한 장비를 노획하고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독일 역사가들은 성공적인 후퇴작전의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적군(Red Army – 러시아군의 또 다른 호칭)에 황급히 쫓겨나 도시를 파괴하지도 못했다.”라는 애매한 기록만 남기고 있다.

독일군 제78 보병사단과 98 보병사단의 전쟁일지에 따르면, 교량을 제대로 파괴하지 않아 적의 추격을 허용한다고 불만을 가졌던 히틀러가 볼가강의 교량 폭파를 직접 지휘하겠다고 말했다가 '베어울프(히틀러의 작전건물)'에서 전화로 폭파를 지시하고 직접 폭파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 후위부대가 후퇴하고 러시아군은 그 다음에야 진입했다고 하니까 러시아의 기록과 달리 후퇴작전은 상당히 여유있게 진행되었다.

29,000명의 공병이 7주 동안 요새화시킨 새 수비선에 제9 군과 4군이 예정대로 도착한다. 강력한 수비선에 막힌 러시아군은 더 이상 공격을 못하고, 1942-43년의 겨울공세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르제프에서의 철수로, 북부와 중앙집단군의 위험지대는 모두 해소되었고, 도우너(Donet) 분지의 공업지대는 다시 독일군이 장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