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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 (7) - 마지막 기회 그리고 쿠르스크의 여파

by uesgi2003 2011. 8. 13.

모처럼 글을 업데이트하니 꽤 많은 분들이 방문을 하시는군요. 어제 하루 방문자가 글을 올리지 않았던 지난 주 전체의 방문자 수와 비슷했습니다. 댓글 하나 없는 것을 보면 지루하고 부족한 내용이 분명합니다만... 그래도 재미있어 하시고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계실거라 생각하고 번역해둔 내용은 서둘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동부전선의 몰락을 1차 정리한 후에는, 다시 중세나 고대로 돌아가서 새로운 주제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스탈린그라드의 참패로 독일의 승전이 멈춘 후 , 독일군이 전열을 유지하면서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막아내는 내용이었고 앞으로는 독일군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져 러시아군에게 쫓기면서 급하게 후퇴를 거듭하는 이야기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 중간, 독일의 패전이 시작된 쿠르스크 전투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으로, 왜 독일군이 그렇게 급격하게 무너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기회

11,200,000명 총동원-수비 아니면 공세-적의 전력이 소진되었을 때에 공격한다-잘못된 판단

 


아돌프 히틀러가 성벽(Citadel) 작전을 생각했을 때에는 단순히 군사작전만 따진 것이 아니었다. 1943 4월에 나온, 점령지의 모든 포로와 노동가능인력을 총동원하라는 비밀명령에 따르면, 독일 경제가 처한 생산문제는 심각했다. 전선의 병력뿐만 아니라 공장의 노동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전선의 위기를 막기 위해 병력을 소집하면 그만큼 무기와 장비 생산이 적어져 결국에는 상쇄효과만 가져온 것이다.

1943 1월에, 최고사령부는 800,000명의 병력보충을 요구했지만 아무리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도 400,000명이 고작이었고 병력으로 동원된 노동력은 동부에서 데려온 외국 노동자가 채워야만 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모든 군사작전에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말고도 포로와 시민을 송환하는 것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전쟁은 중세시대의 약탈과 노예로 변질되어 갔다.

새로운 작전은 군사적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경제적 목표는 무난한 성공을 거뒀다. 1942 5월 총 병력은 94십만 명이었지만 1943년 봄에는 112십만 명으로 늘었고 366십만 명의 노동자를 확보해 1년 전보다 1백만 명을 더 늘렸다. 병력은 2백만 명, 노동자는 1백만 명을 늘렸다는 것이다.

생산성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끊임없는 공습과 식량부족에도 불구하고 전쟁상 알버트 스피어(Albert Speer)는 대량생산을 도입해 1942년의 매달 350대의 전차와 50대의 돌격포 생산에서 1943년에는 700대의 전차와 200대의 돌격포를 매달 생산해냈다.


노동력과 생산성의 증가 말고도 타이거, 팬더, 페르디난드 자주포와 같은 대형전차와 각종 대구경 포와 같은 신무기가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히틀러는 다시 한 번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되살리게 되고 최고사령부는 원자력이라는 미래기술에 관심을 쏟지 않게 된다.

독일 과학자들은 회의 때마다 원자력에 대해 보고를 했고 핵융합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폭발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기개발국은 향후 9개월 내에 전장에 투입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무기도 개발을 중지한다는 원칙을 문제 삼아 과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진 설명: 쿠르스크 전투 후에 러시아군이 노획한 페르디난드 구축전차(Elefant로 더 유명합니다)입니다. 88mm 장포신을 장착하고 있어서 파괴력은 타이거보다 좋았고 전면장갑 200mm(방어력으로 유명한 타이거가 120mm)로 러시아군의 왠만한 대전차포는 근접거리가 아니고서는 파괴시킬 수 없었습니다. 사진에서도 전면에 3발의 피탄자국이 있습니다만 뚫지를 못했습니다. 쿠르스크에서는 13대의 페르디난드가 무려 320대의 러시아군 전차를 부순 기록이 있습니다. 

수비에서는 하나의 성채와 같았습니다만, 공격에서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비전용으로 설계된 탓에 동축 기관총이 하나도 없어서, 보병이 달라붙으면 전차병이 해치열고 총격전을 벌이는 황당한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채답게 무게가 65톤(포탑을 가진 타이거보다 8톤이 더 무거움)이나 나가 최대 시속 30km에 불과해 대전차포의 좋은 목표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의 모든 사진과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히틀러를 제외한 다른 지휘관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지 못하는 질문은 "독일을 대재앙에서 어떻게 구해낼 수 있는가?"였다.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반역, 혁명, 저항과 같은 정치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군사적인 도박이 될 수도 있었다.

1943년 봄에 이룩한 놀라운 군사와 경제적 성공덕분에 러시아에서 새로운 캠페인을 벌일 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 캠페인과 다른 점은, 러시아를 궤멸시킬 목적이 아니라 최대한 피해를 입혀 스탈린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낼 목적이었다. 승리가 아니라 무승부가 최종 목표였다. 다만 히틀러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동의할 것인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도우너 강까지 이르는 길을 스탈린도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 남부집단군을 포위 섬멸한다던 그의 목표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얻는 성공과 맞먹는 대참패를 당했다.

군사천재 만슈타인(Menstein) 원수는 동부전선에서의 작전은 군사적 재앙을 막기 위해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우리가 실시했던 원대한 작전은 이제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수비뿐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수비를 말하는 것일까? 수비형태에는, 단 한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는 결사적인 수비와 상황에 따라 물러나고 반격을 하는 유연한 수비가 있다. 독일군 전력으로는 결사적인 수비는 불가능하다. 북극에서 아조프 해까지 이어지는 긴 전선을 모두 방어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남부 집단군만 해도 750km의 전선을 44개 사단으로 지켜야 했다. 최소한 20~30개 사단이 부족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대규모 포병과 전차지원을 받아 몇 군데 집중공격한다면 이렇게 얇게 펼쳐진 수비선은 바로 뚫리게 된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1942`43 겨울공세에서 이런 형태의 전략을 완성시켰고 독일군 수비가 무너진 지역의 강습군을 즉시 다른 작전에 투입해서 독일군이 예비병력이 제 때에 투입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코카서스, 볼가, 도우너 일대에서 독일군을 포위해 많은 병력과 전략물자를 잃게 만들었다.


그림 설명: 쿠르스크 전투 후 러시아의 61개 군이 독일 전선에 배치됩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만슈타인은 어떻게 휴전을 이끌어낸다는 것이었을까? 그는 "우리는 아직 우위에 있는 요인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그게 제대로 먹혀도 수세일 수 밖에 없고 적을 최대한 죽이고 많은 수의 포로를 잡아 협상에 나오게끔 만들어야 한다. 수비전략을 채택한 경우에도 최대한 유연한 기동전을 펼칠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각은 공세로 나가지는 않더라도 러시아군이 공격을 하게끔 유도한 후에 전력이 소진되어 공세가 무디어졌을 때에 일격을 가한다는 것이다. 만슈타인은 이런 전략을 사용해 1943년 봄 도우너와 드니에페르 강 사이에 있었던 전투에서 스탈리그라드의 복수를 했었다.


사진 설명: 롬멜과 같은 다른 독일군 장성은 오만함이 곁들여진 카리스마가 인상적인데, 만슈타인은 그냥 인상좋은 노교수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사진만 보면, 이런 사람이 수십 만명을 지휘한 천재전략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롬멜, 몽고메리, 패튼과는 차원이 다른 천재전략가인데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진의 젊은이는 아들 게로인데, 1942년 10월에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히틀러가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의 과대망상 계획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전선을 축소해서 예비병력을 얻게 되자 다시 한 번 광적인 환상에 빠져들었다. 이미 병적인 자부심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지 오래였고, 오렐과 벨고로드 사이의 삐죽 솟아있는 쿠르스크는 그의 환상을 유혹하는 아주 매력적인 지역이었다.

성벽작전으로 알려진 대규모 협공을 위해, 그는 구데리안이 간신히 재건한 기갑병력을 포함해 모든 예비병력을 투입한다. 이 작전을 통해 쿠르스크에 몰려있는 러시아군의 기갑전력을 한 번에 전멸시켜 중앙의 러시아군 전체를 지도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리고는 모스크바로 다시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구데리안, 만슈타인, 모델과 다른 많은 장군들이 환상을 버리라고 매달렸고 참모들조차 서유럽과 이탈리아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서 예비병력을 아껴야 한다고 간청했다. 히틀러가 그들의 간곡한 조언에 귀를 잠시 기울이는 듯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쿠르스크의 지옥으로 투입하고 만다.

 

(우에스기 왈: 성벽작전은 워낙 유명해서 여기에서는 생략합니다.스탈린그라드에서 240,000명을 잃기는 했어도 독일군의 승리가 멈춘 전투로 불리는 반면에 쿠르스크는 독일군의 패전이 시작된 전투로 부를 정도로 동부전선에 결정적인 전투였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전력을 소비한 탓에 동부전선은 연쇄적으로 붕괴합니다.

원래대로 6개월 전에 쿠르스크 일대의 성벽작전을 펼쳤다면 러시아군의 피해는 한동안 전쟁을 벌이지 못할 정도로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공격하기 좋은 상태는 상대도 수비하기 좋은 상태라는 것을 잊고 부대배치와 신무기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흘려 보냈고 지리한 참호전에서 귀중한 기갑전력이 모두 사라집니다.)

 

전선을 축소하고 산업인력을 징발해 겨우 모든 예비병력은 모두 소진되고 막강한 신무기였던 팬더와 타이거도 쿠르스크에 펼쳐진 러시아의 엄청난 수비망에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위기가 닥쳐왔다. 거꾸로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적의 맹렬한 초기공세를 버틴 후에 적이 무디어졌을 때를 노려 대반격에 나선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가 정점에 달했을 때에, 러시아군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모델 원수의 배후를 대규모 벙력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때문에 독일군은 쿠르스크 북쪽 전선의 전투를 중지했고 러시아군은 혼란을 틈타 오렐 지역의 제2 기갑군의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1943 7 12일부터는, 러시아군의 교란공격으로 쿠르스크 북부의 독일군 제9 군이 수비로 돌아서면서 중앙집단군의 큰 공백을 급하게 메우게 되지만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마지막 목표를 달성할 뻔 했던 쿠르스크 작전은 모두 중단하게 되어 러시아군이 바라는 대로 전황이 전개된다.

이제 동부전선은 1943년 봄에 전선을 안정화시켰던 당시보다 훨씬 취약하게 되었고 보유한 모든 기갑전력은 사라졌거나 보충을 위해 전선에서 빼낼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된다. 전선의 상황은 스탈린이 1942년 여름부터 별러왔던 바로 그대로 되었고 히틀러는 이제 승리는 고사하고 휴전의 가능성조차 날려버리게 되었다.

 

쿠르스크 전투의 여파

러시아군 전지역을 공격하다-벨고로드와 오렐을 잃다-아크티르카(Akhtyrka)의 한 장면-"장군은 아직 숲에 계시나?"

 

1943년 중반의 대위기 상황을 감안하면,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상당히 괜찮은 성공을 거두고 있기는 했다. 모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제2 기갑군과 9 군은 오렐 지역에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방어에 성공했다. 전력이 거의 소진된 사단들이 브리얀스크(Bryansk)와 드니에페르 강을 돌파하려던 러시아군을 막아 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군도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7 17, 2개군 병력이 이지움(Izyum) 양쪽 방면을 통해 도우너 강 중간지역에 있던 독일군 제1 기갑군을 공격해왔다. 막켄센(Mackensen) 상급대장은 군단병력을 동원해 가까스로 공격을 막는데 성공했다. 러시아군은 미우스(Mius) 강을 수비하던 홀리트(Hollidt) 장군의 제6 군의 수비선을 따라 공격해 스탈리노(Stalino)를 돌파했고 후속공격으로 삭소니(Saxon) 294 보병사단의 수비선까지 밀고 올라와 제513 척탄병 연대가 마리노프카(Marinovka)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의 침투는 허용하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북과 남으로 SS 기갑군단과 제16 기갑보병사단을 투입한 다음에 제23 기갑사단마저 투입해 러시아군이 도우너 강을 돌파하기 직전에 돌려세우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보유한 병력만으로는 위기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1942년 겨울부터 계속되어온 "너무 적은 병력으로 그나마 뒤늦게(Too little and too late)"의 실패가 계속 이어지게 된다.

SS 기갑군단은 반격에 성공하고 제6 군의 이전 수비선을 되찾게 되자 다시 북부전선으로 전출된다. 13 기갑사과 다른 병력이 크리미아에서 북부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남부집단군의 북쪽 전선인 벨고로드 지역에 위기가 다시 닥쳐온다. 공중 정찰에서 강력한 러시아군이 벨고로드 동쪽에 집결하는 것이 포착된다. 러시아 보로네즈(Voronezh) 전선의 하르코프(Kharkov)-드니에페르 방면 공격이 임박한 것이다.

스탈린은 1942년에 실패했던 작전을 다시 시도하려고 한다. 그는 독일 남부집단군을 완전히 단절시킨 후에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지휘관인 바투틴(Vatutin) 1943 8 3일에 벨고로드 양 방면으로 5개 군을 투입한다.

러시아군의 기록에 따르면, 바투틴은 독일군보다 6배나 많은 포와 전차를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군의 전선 1km마다 200문의 대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포격을 퍼부었다. 최정예 기갑군인 제1 5방위기갑군으로 소총사단을 지원했다. 전선 1km 65대의 전차를 동원한 것이다.


사진 설명: 앞으로 자주 등장할 바투틴입니다. 어려운 시기 극복하고 본격적인 승리의 가도를 달리기 직전인 1944년 2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의 기습을 받아 사망합니다. 동부전선 배경설명에서도 강조했듯이, 히틀러가 과대망상의 정신병자가 아니었다면 소비에트 연방에서 주변국가들의 자주권을 보장하고 동맹국으로 받아들였다면 러시아군의 전력중 최소한 1백만 명이 독일군에 합세해 모스크바까지도 진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렐 지역을 수비하던 독일군 제2 기갑군의 전선 전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남부에서는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당한 후 재건된)6 군이 러시아군의 새로운 공격을 맞아 가까스로 시간을 벌고 있었지만 기갑병력을 다른 지역에 차출시킨 남부 전선은 붕괴되기 직전이었다.

3시간의 전투 만에, 5 6 방위군의 소총사단은 독일군 수비선 깊숙이 침투하는데 성공한다. 바투틴은 바로 2개 전차군을 투입해 호트의 제4 기갑군과 켐프(Kempf) 특수작전군(Army Detachment) 사이를 완전히 벌려놓는다. 러시아군은 하르코프를 그대로 우회한 다음 폴타바(Poltava)로 진격한다. 만슈타인은 모든 전선에서 예비병력을 급조해 반격하지만 벨고로드 지역을 지킬 수는 없었다.

모델도 포위되는 것을 피해 오렐을 포기하면서 스탈린이 바랬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모스크바는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축포를 하늘 높이 쏘아 올렸고 벨고로드와 오렐을 탈환했다는 성명이 발표된다. 이제 우크라이나와 중앙 러시아의 최고 전략요충지 두 곳을 완전히 되찾은 것이다. 러시아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며 승리만이 있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모스크바의 격려를 받은 일선 지휘관들은 이제 쫓겨가는 적을 향한 경주에 나서게 된다.

만슈타인의 운명도 이제 다한 것일까? 호트의 제4 기갑군과 템프 특수작전군 사이에는 65km라는 큰 공백이 생겼고 드니에페르 강으로 향한 길이 완전히 열려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히틀러는 고속도로를 따라 하르코프로 후퇴하던 11군단을 하르코프에 밀어 넣으면서 "하르코프를 어떻게든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스탈린을 기쁘게 만든다.

호트 상급대장은 하르코프 북쪽 수비선을 만들기 위해 4 기갑군을 남서쪽으로 후퇴시키는데, 문제는 하르코프에 적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는 가였다. 8 6일 오후, 19 기갑사단을 지휘하는 구스타프 슈미트(Schmidt) 중장은 그라이보론-아크티르카(Grayvoron-Akhtyrka) 지역으로 빨리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최우선으로 우리 병력을 거기에 빨리 보내야 하네. 슈미트. 그로스도이칠란드 사단의 전위병력이 이미 전선을 구축했네. 러시아 놈들을 막지 못하면 집단군 전체가 무너지게 될거야!"

슈미트는 "명령 완수하겠습니다!"라는 확신찬 대답을 하고 연대병력을 급히 보냈지만 이미 러시아군이 자신의 사단을 앞질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러시아 기갑병력은 배후에 침투해 7일 아침에는 독일군의 새 수비선이 만들어지는 고속도로를 끊어놓은 상태였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제19 기갑사단의 수송대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여기를 통과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슈미트 장군은 지휘전차를 타고 대열을 이끌고 있었다. 무선병이 "러시아군의 무선교신이 너무 많이 잡힙니다. 전투 한창일 때처럼요"라고 참모장교에게 보고를 했지만, 참모장교가 뭐라 지시할 시간도 없이 하늘에서 갑자기 대전차포가 쏟아졌다. 고속도로 양 옆에 매복하고 있던 대전차포 망에 대열이 꼼짝없이 걸려든 것이다. 전차와 장갑차들이 불을 뿜으며 터졌고, 지휘전차도 포탄을 맞아 구덩이에 처박혀버렸다.

"즉시 탈출해라!"

장군과 전차병은 급히 길가의 도랑으로 몸을 숨겼다.

T-34가 나타나서 대열을 휘저으며 탈출하는 전차병들을 기관총으로 사냥했다. 전차 한 대가 장군에게 다가오자, 슈미트, 콘네(Kohne) 중위, 슈테(Shutte) 하사와 몇 명의 전차병이 급히 숲으로 몸을 피했다. 숲 곳곳에 러시아군이 있었지만 그들이 가진 무기라고는 두 자루의 카빈과 권총이 전부였다.

러시아 보병들과 교전을 벌이다가 탄약이 모두 바닥나자 장군은 "너희 둘은 빠져나가라. 콘네 중위와 내가 러시아군을 유인하겠다"라고 외쳤다. 슈테 하사는 어이가 없었다. 겨우 4발 남은 권총으로 러시아군과 맞서겠다니?


사진 설명: 숨어있던 건물에서 파르티잔에게 끌려나오는 독일군 포로입니다. 그런데 표정들이 너무 차분한 것을 보면 연출사진이 분명하죠? 클릭하면 커집니다. 


부하들의 표정을 읽은 슈미트 장군은 싱긋이 웃고는 "지금 즉시 뛴다! 명령이다!"라고 거칠게 외쳤다. 그리고는 "무사히 빠져나가면, 안사람을 찾아서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주고 제대로 설명해줘"라고 부탁했다.

전차병들이 달려나갔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러시아군에게 사로잡혔다. 러시아군은 슈테에게 통역을 통해 "장군은 아직도 숲에 계시냐?"라고 물었다. 슈테는 눈치를 보며 "장군이 어디에 계신지 모른다"라고 대답했지만 두 사람의 시체가 곧 발견된다. 슈테는 러시아 지휘관에게 상관을 제대로 묻고 싶다고 요청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장소를 찾아줘라!"라고 말한다.

슈테 하사는 5 3개월 후에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