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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스페인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1부)

by uesgi2003 2015. 3. 29.


역사를 공부하면서 크게 2가지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먼저 아무 책이나 펼쳐도 놀라운 인물과 사건이 이어지며, 내가 몰랐던 지식의 창고를 발견하며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쌓이면 자신의 역사를 상상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만약 그랬다면? What if?”의 즐거움 말이다.

선조가 성웅을 절대 신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더 이전으로 돌아가 서인파의 의견(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전쟁발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좀 더 이전으로 돌아가 일본 전국시대를 오다 노부나가가 아니라 이미가와 요시모토나 다케다 신겐이 장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상상은 당연히 당시 역사를 잘 알고 있어야 즐거운 상상이 되고 지식을 넓히는 또 다른 계기가 된다. 역사사실과 배경을 알지 못하고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 상상은 그저 상상에 그칠 뿐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즐거운, 현실성 있는 상상을 하려면 그 당시의 주요 인물과 배경을 알아야 한다. 조선과 왜 수군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도 없이 성웅의 부재에 대해 가정을 해봐야 별 의미가 없고 토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임진왜란까지 몰고 온 나비효과에 대해서도 가정을 할 수 있다.

역사 이야기를 즐기게 되면 자신만의 만약 그랬다면?”의 상상날개를 마음껏 펼치기 바란다. 그렇지만 그 상태로는 남 앞에 내놓기에는 조악한 음식이 될 테니까 관련역사의 양념까지 뿌리는 수고를 좀 더 곁들일 것을 조언한다.

 

만약 그랬다면?”으로 가정과 상상해보았을 때에 가장 파급력이 컸을 인물이나 사건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미래는 어떻게 될 지 몰라도 현재까지로 만 본다면 아무래도 영국, 미국과 러시아 국가형성과 확장에 관련된 인물과 사건이 세계역사를 송두리째 바꿀 것이다.

예를 들어 워싱턴이 델라웨어강을 건너 헤센용병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미국독립이 가능했을까? 영국군에게 밀려 독립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겨우 1,400명 밖에 남지 않았던 절대절명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의 독립은 훨씬 뒤로 미뤄지고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의 가정과 상상 중에서 가장 파괴력있는 것을 꼽으라면 스페인 무적함대의 영국원정(1588)과 러시아와 스웨덴의 대북방전쟁(1700~1721)을 주저 없이 선택하겠다.

당시 세계최강이던 스페인육군이 영국에 발을 디뎠다면, 아니 스페인무적함대가 영국함대를 선제공격하는 과감성을 보였다면, 아니 돈 알바로 데 바산Don Alvaro de Bazan 1년만 더 살았다면 미국은 물론이고 개신교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대북방전쟁에서도 스웨덴의 소년왕 카를12세가 왕으로서 뒤에 물러 앉았다면, 레벤하웁트가 군수품수레를 끝까지 지켰다면, 오스만투르크군이 프루트전투에서 표트르를 잡았다면 예카테리나여제의 치세는 물론이고 세계역사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분량이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대학전공이 스페인어(부전공인 무역학에 빠져서 대학원에서는 경영학전공)였기 때문에 스페인의 아르마다Armada 원정을 다룬 자료는 일부러 피할 정도로 아쉽게 생각하는 사건이었다. “만약 그랬다면?”이라는 주제로 자료를 정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아르마다 원정을 가장 먼저 꺼낼 수 밖에 없는데, 이왕이면 내 서재에 놀러 오는 블로그 독자에게 가장 먼저 설명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당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만 그치고 상상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맡길 생각이다. 나중에 책으로 출간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내 생각과 근거에 대해 밝히겠지만 말이다.

 

다시 한 번 당부하지만 이번 아르마다 원정뿐만 아니라 블로그의 모든 이야기에서 독자 여러분의 가정과 상상을 이어가기 바란다. 네이버 지식인 질문과 답변에만 머무르지 말고 여러분 자신의 레시피에 역사지식의 양념을 곁들여서 세상에 둘도 없는 독특한 음식을 만들어보기 바란다.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1부)


(당시 유럽역사의 주역이 대거 등장하다 보니 인물소개가 많습니다. 모두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주역들이기 때문에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아르마다 원정의 주인공 펠리페Felipe 2세가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와 함께 영국을 통치했던 국왕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선왕이었던 신성로마제국 카를Karl 5세 황제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각지, 중남미 대륙과 필리핀 제도까지 식민지를 건설하며 스페인의 최절정기를 열었지만 끊임없는 전쟁과 내부갈등에 지쳐 1556년에 퇴임하며 신성로마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Ferdinand에게, 스페인은 아들 펠리페에게 물려주었다.




카를 5세의 문장입니다. 무척 복잡하죠?


1554년에 영국여왕 메리 튜더와 결혼해 영국공동국왕으로 있던 펠리페는 2년 만에 스페인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날 당시만 해도 두 국왕과 두 나라의 앞날은 탄탄할 것처럼 보였다. 펠리페는 작은 아버지와 아내를 통해 프랑스를 압박할 수 있었고 메리는 남편의 후원을 받아 영국에 확대되고 있는 개신교 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 메리여왕은 여왕즉위 전까지 불행한 시간을 보내며 성공회 세력의 탄압을 받았는데, 여왕즉위 후에 영국의 로마가톨릭 교회의 복권을 추진하며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 300명을 처형해서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었다.



역사는 이래서 재미있습니다. 메리여왕이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펠리페와 메리 두 부부 사이에 후손이 있었다면, 펠리페왕이 영국공동국왕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영국, 미국과 개신교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겁니다.

 

메리는 불행히도 불임으로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즉위 5년만인 1558년에 사망하면서 30년 후의 아르마다 원정의 씨앗이 심어졌다. 이복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성공회)와 스코틀랜드여왕 메리스튜어트Stuart(가톨릭)가 여왕 후계자 물망에 올랐는데 펠리페에게는 난감한 선택이었다. 아버지가 아우스부르크Augsburg 화의로 제후의 종교자유를 보장한 것에 크게 반발하며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로 나선 그였기 때문에 당연히 메리여왕을 지지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적대국 프랑스의 왕비출신이었기 때문에 둘 중에 그나마 문제의 소지가 적은 엘리자베스를 지지했다.



14살당시 엘리자베스의 모습입니다. 극심한 갈등관계였던 이복언니 메리에 비해 온화한 표정입니다. 아래는 29살 당시의 메리모습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이복언니 메리와 반대로 가톨릭의 탄압을 겪으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기죽지 않았고 겨우 25살의 나이에 여왕에 즉위한 후에는 국내로는 추밀원과 긴장과 협력의 교묘한 줄타기를 벌이는 동시에 국외로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양국과의 갈등을 피했다. 그리고 영국을 끊임없이 내전으로 이끌었던 종교갈등에 있어서도 성공회를 국교로 복귀시키는 대신, 가톨릭과의 화해를 이끌어내며 중도노선을 걸었다


스페인과 영국의 줄타기 외교는 1566, 네덜란드에서 개신교의 저항이 시작되며 깨졌다. 당시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스페인 육군은 네덜란드 개신교의 저항을 진압하며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이 개신교 제후들에게 온갖 모욕(보스웰백작에게 성폭행당하고 강제결혼, 탈출 후 패전)을 당하다가 영국으로 탈출해 엘리자베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감금(18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1587년에 처형)해서 가톨릭세력의 심기가 불편했던 참에 1568, 스페인 선박 5척이 영국으로 피항했는데 플랑드르Flanders 스페인군의 군자금을 운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수하는 강수를 뒀다.

 

스페인은 1568년 산 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ua(지금의 베라쿠르스Veracruz)전투에서, 영국과 캐리비안해를 오가는 사략선Privateer 함대를 공격해 6척 중 4척을 노획했다. 존 호킨스John Hawkins와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겨우 7~80명의 선원(존 호킨스 함선은 겨우 15)만 데리고 돌아오자 영국은 반스페인 노선을 분명히 했다.

1570, 교황은 엘리자베스를 파문하며 가톨릭국가의 처벌을 요구했고 1571년에는 국제금융가 로베르토 디 리돌피Roberto di Ridolfi가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메리를 여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발각되었고 런던주재 스페인대사(외교관이 기밀을 누설했습니다)는 추방당했다.



영국 사략선은 포르투갈 상선과 노예수입으로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공격을 받는 영국사략선입니다. 불행하게도 이들이 만난 스페인함대는 멕시코 반란을 진압하려는 정규군이 타고 있었고 참패를 당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일을 계기로 가톨릭세력과 분명한 거리를 두게 되었고 사략선에게 노골적으로 스페인 항구와 상선을 공격하라고 지원했다. 영국의 유명한 해적 드레이크는 3년에 걸쳐 세계일주(그림참조)를 하며 스페인 수송선과 항구를 노략질하며 엄청난 노획물을 거뒀고 (세뇨라 델라 콘셉시온에게서만 36kg의 금, 26톤의 은과 귀중품 13개 상자)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기사작위를 내렸다.

스페인의 펠리페왕은 네덜란드의 개신교 저항에 발목을 잡힌 상황이었다. 1572년부터 시작된 네덜란드 반란은 4년간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파르마공Duke of Parma와 스페인 정예를 파견해 저항군 지도자 오라녜의 빌럼William of Orange를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펠리페는 1580, 아일랜드 가톨릭교도 봉기를 지원하면서 아일랜드에 자원병을 투입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을 공격해 리스본Lisbon을 함락시키고 (아르마다 원정에 동원할)포르투갈 함대를 손에 넣었다. 1582년에는 상 미구엘Sao Miguel에서 프랑스-포르투갈 반란함대를 격파하고 아소로스Azores 제도(포르투갈 먼 앞바다)의 포르투갈 요새도 점령했다.

그는 주앙벨Joinville 조약을 맺고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가톨릭세력을 10년 동안 지원하며 배후를 다졌고 파르마공은 네덜란드의 전략요충지인 안드워프Antwerp항을 점령하면서 영국정벌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파르마공,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se가 본명. 카를 5세의 손자이자 펠리페의 조카.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자랐고 1571년 레판토해전에 참전했고 1578년에 네덜란드총독에 임명되어 스페인 최정예군을 이끌었습니다. 뛰어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영국본토에 상륙만 했다면 런던까지 순식간에 진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좁은 해협건너의 거대한 스페인제국을 상대하게 되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네덜란드 개신교 동맹군을 지원했고 넌서치Nonsuch 조약(1585)으로 펠리페의 주앙벨 조약에 맞대응하며 스페인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과 엘리자베스를 벼르고 있던 펠리페는 메리가 또 다른 반란음모인 바빙톤Babington 음모연류로 1587년에 처형되자 그것을 명분으로 원정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드레이크는 1587 4, 스페인 남서부의 카디스Cadiz항을 급습해 100척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선을 부수고 노획해서 아르마다 원정을 1년이나 늦춰 성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노획한 항로와 기밀문서덕분에 영국은 동인도 노선을 개척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의 카디스 작전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