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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스페인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2부)

by uesgi2003 2015. 4. 5.


16세기 서유럽역사 그것도 해양사에 대해서는 정리한 적이 없으니 이야기를 좀 자세하게 설명해야겠습니다. 여러 자료를 참조하다 보니 분량이 좀 나올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3부에서 정리할 생각인데 그렇다고 복잡한 내용은 아닙니다.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2부)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직접 국영함대를 운영하면서 선박의 성능과 위력은 크게 발전했다. 이전처럼 연근해를 건너 병력을 수송하거나 적대국의 해안을 약탈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바다 자체를 지배하기 위한 함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16세기 말이 되자 대부분의 국가는 선박의 크기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등선육박이 아닌 포격전이 대세가 되면서 기동력이 좋은 배가 둔한 적선에게 포격을 가한 후에 재빨리 벗어나서 재장전을 할 수 있었고 심지어 적의 포탄이 미치지 않는 원거리에서 안전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영국함대는 스페인함대를 상대하면서 우월한 기동력과 화력을 보이며 이 방향이 맞음을 입증했다. 그렇다고 흔히 알고 있듯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아니었다. 작고 날렵한 영국전함이 크고 둔한 스페인 갈레온을 상대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약간 달랐다. 스페인 갈레온 대부분은 그렇게 크지 않았고 영국함대 중 일부 전함은 스페인 기함만큼이나 컸다.



아르마다 원정을 막은 영국의 쾌속형 갈레온 단면도입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존 호킨스John Hawkins는 영국에 귀환하자 마자 두 가지 결정을 했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여왕이 왕실해군으로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돕기로 했다. 그리고 스페인 선박보다 우월한 전함을 만들기로 했다.

1570, 호킨스는 리차드 챕맨Richard Chapman과 계약을 맺고 포사이트Foresight(300톤의 소형 갈레온)을 만들었다. 전투갤리의 날렵한 선체를 그대로 가져와서 흘수선이 낮았고 배허리부터 선비는 급격하게 올라가는 반면 선수는 날렵하고 길게 뻗어서 거친 바다에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리고 주돛대도 이전보다 앞으로 옮겨서 배를 보다 쉽게 조종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설계는 시험항해에서 그대로 적중했다. 포사이트호는 다른 배보다 조종이 쉬웠고 바람을 잘 탔으며 동급보다 2배나 많은 포를 실었다. 그리고 흘수선이 깊었기 때문에 해상포대로도 안정적이었다.

한쪽 포갑판에 28문의 포를 일렬로 장착했는데 이름 그대로 미래를 제시하는 배였다. 선체가 곡선으로 되어 있고 선미로 급격하게 올라가는데 어떻게 포를 일렬로 배치할 수 있었을까? 뒷돛대Mizzenmast 바로 뒤 아래에 총포실Gun Room을 만들어 대포를 일렬로 배치했고 중심도 이전의 배보다 낮췄다.


그는 당시 기술이 허용하는 최고의 전함을 만들어냈고 나중에 쾌속형Race built 갈레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577, 해군출납관Tresurer of the Navy이 된 존 호킨스 경은 10년 동안 포사이트호를 바탕으로 영국해군을 재구성하는 책임을 졌다.

 

스페인의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돈 알바로 데 바산Don Alvaro de Bazan은 리스본항에 150척의 대형선박을 모아 55,000명을 영국으로 어떻게던 수송해 일단 상륙하면 스페인군 전력으로 런던점령은 시간문제였다.

스페인 함대는 밀집수비대형으로 영국해변에까지 영국해군의 공격을 막아낸 후에 200척의 상륙용 바지선으로 육군을 실어나르고 40척의 갤리와 6척의 갈레아스가 상륙선을 엄호할 생각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급하게 긁어 모은 시민군이 해안에 모여있겠지만 세계최강의 스페인 육군을 보면 바로 달아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늘 그랬듯이 책상 위의 작전계획은 방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그러지기 마련이었다.

 

펠리페 2세는 자신의 오른팔인 알레산드로 파렌세Alessandro Farense(파르마 공작Duke of Parma)에게도 작전계획을 물었다. 그는 아일랜드에 병력을 상륙시켜 영국을 교란시킨 후에 플랑드르에서 해협을 바로 건너 침공할 생각이었다.

1586 4, 펠리페는 두 사람의 계획을 모두 검토한 후에 최악의 절충안을 제시했다. 돈 알바로는 이미 리스본항에서 선박을 모으고 있었는데 규모를 100척으로 줄이게 되었고 스페인에서 병력을 직접 나르지 않고 플랑드르 해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네덜란드 원정군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병력도 35,000명으로 크게 줄었는데 절반은 스페인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플랑드르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어느 한 쪽의 계획을 지지했다면 거대한 반면 단순한 작전이 되었겠지만 양쪽 모두의 계획을 받아들이면서 복잡해졌고 두 지휘관의 긴밀한 통신이 작전성패를 결정짓게 되었다


리스본에서는 유럽전역에서 배를 모았는데 심지어 중립국 선박까지 계약을 맺거나 몰수해서 급하게 숫자를 채웠다. 그리고 소함대는 선박의 소속지역에 따라 나누었다가 첫 번째 전투 후에는 전력등급에 따라 다시 재배치했다. 1580년에 리스본 항에서 노획한 포르투갈 선박은 가장 크고 무장이 잘되었기 때문에 원정이 끝날 때까지 스페인 함대의 핵심전력으로 최전열을 유지했다.

급하게 끌어 모으다 보니 문제도 많았지만 역사상 최대의 함대가 결국 마련되었다.

 

영국도 함대를 급히 모으고 있었다. 1587, 엘리자베스는 어떤 선박도 항구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소형상선도 무장을 시켰는데 163척의 상선 중에 108척이 적재량 100톤 이하의 소형이라 전력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영국도 스페인처럼 제대로 된 전함은 소수에 불과했다. 1588, 200톤 이상의 전함은 21척이었고 그 중에서도 10년 내에 건조된 전함은 4(쾌속형 갈레온. 리벤지Revenge, 밴가드Vanguard, 레인보우Rainbow와 아크로얄Ark Royal)뿐이었다. 다른 선박도 전함으로 개장되어 스페인 선박에 비해 더 많은 무장을 갖췄다.

두 나라 모두 급하게 온갖 상선까지 끌어 모았지만 역사상 최대의 해전을 가를 주인공은 왕실전함과 포르투칼전함이었다.  


스페인 지휘관은 지중해에서 해전을 치렀기 때문에 육상전투를 해상으로 그대로 옮긴 갤리선 전투에 익숙했다. 중앙, 좌우익, 전위와 후위로 대형을 이루고 적을 치열한 근접전으로 묶어둔 후에 포위해서 격파했다. 각개전투에서는 적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덩치의 스페인전함이 근접전에서 포격으로 적의 갑판을 쓸어버리고 육군이 건너가 적선을 하나씩 굴복시켰다.

영국해군은 지중해식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었고 스페인 육군에 맞설 병력도 부족했다. 그리고 영국은 갈레온의 크기보다는 속도와 화력에 집중했다.

 

포르투갈에게서 노획한 산 마르틴San Martin(그림참조. 가장 큰 배)은 길이 55m, 12m로 다른 스페인 갈레온에 비해 날렵했다. 3개의 돛을 달고 있었고 선수는 낮고 선미로 가면서 높아지는 전형적인 갈레온 디자인이었다. 크기에 비해 기동성은 좋은 편이었다.

 


48문의 포를 장착했는데 절반 정도만이 대구경 포였고 나머지는 선회식포Swivel Gun(그림참조)이었다. 백병전을 선호하는 스페인기준에 맞는 무장이었지만 영국함대와 비교하면 화력이 심각할 정도로 모자랐다.



아크로얄은 반대로 해상포대였다. 뎁트포드Deptford에서 2년 전에 건조된 개인소유의 최신전함이었다. 주인은 워터 롤리Walter Raleig로 여왕의 근위대장이자 탐험가였는데 영국에서는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워터 롤리는 카톨릭에 대한 증오로 유명했고 미국 로어노크섬에 처음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가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서 최초 이주민이 모두 굶어 죽거나 원주민에게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크로얄은 원래 아크롤리로 불렸는데 10년 먼저 건조한 리벤지를 개량했으며 같은 조선소에서 건조한 380톤급 레인보우에 비해 적재량 550톤으로 훨씬 컸다(실제 적재량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크기는 산 마르틴에 비해 작은 반면에 55(38문의 대구경포)을 장착해서 화력은 훨씬 막강했다. 4문의 데미캐논Demi-cannon, 4문의 캐논 페리에Cannon perrier(돌 포탄을 쏘는 구경이 넓은 구형포), 12문의 컬버린Culverin, 12문의 데미컬버린과 6문의 세이커Saker를 장착했다. 12문의 선회포도 장착했는데 32명의 포수, 100명의 선원과 268명의 해병 등 400명 이상의 병력이 탑승했다.



앞의 2개가 데미캐논이고 뒤의 2개는 캘버린입니다.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스페인이 국력을 쏟아 부었고 영국조차도 아르마다를 무적함대Invincible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는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막은 결정적인 요인은 포술Gunnery였다. 영국선원은 스페인선원에 비해 2가지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해군은 현대식 포를 더 많이 보유했고 기동력이 더 우수했다. 영국함대는 원거리에 머무르면서 포격전을 벌이면서 스페인함대의 장기인 백병전기회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스페인전함도 현대식 전장식Muzzle-loading 포를 장착했지만 구형의 후장식Breech-loading 포가 대부분이었다.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스페인의 강점은 막강한 육군에 있었고 전함의 포는 부수적인 역할이었다. 그래서 전함의 포는 육상에서 사용하던 그대로 두 바퀴에 얹은 형태로 영국에 비해 50년은 뒤떨어져있었다.



영국의 포가는 4개의 작은 바퀴 위에 얹었다. 포가가 두 축 위에 앉아있기 때문에 전함의 포갑판에서 사용하기 알맞았다. 스페인의 두 바퀴 포가는 높이가 높은 반면에 영국의 네 바퀴 포가는 낮고 공간도 덜 차지했다. 그리고 발사충격도 훨씬 잘 흡수했다. 사각의 높낮이를 조정하거나 재장전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스페인포가는 선체에 밀착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선체에 큰 부담을 주었고 재장전하려면 묶었던 밧줄을 풀러 포를 미룬 다음에 재장전하고 다시 밧줄로 고정시켜야 했다. 영국포가는 충격을 4개의 바퀴가 굴러가며 흡수하고 자리를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만 밧줄로 연결해두어서 선체에 부담도 없었고 포격전 중에도 쉽게 재장전할 수 있었다. 포격 후에 뒤로 밀려난 포를 재장전하고 다시 포가를 앞에서 당기고 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르마다 원정 이후 이런 4바퀴 포가가 해군포의 기본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장착한 포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영국해군은 포격전에서 만큼은 스페인함대를 압도했다.

 

무엇보다 스페인의 전투교범은 포격전 자체를 경시하고 있었다. 대포에는 한 명의 포수와 선원이 배치되는데 일단 대포 발사준비를 마친 후에 전투가 시작되면 선원은 각자 창, 도끼와 권총을 들고 백병전 대열에 서도록 되어 있었다. 남은 포수 한 명이 대포를 발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면 포연이 가시기 전에 적선에 달라붙어 각개전투를 벌이는 전술이었다.

당시 스페인육군은 전설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영국해군을 상대하기 충분했다. 영국전함을 따라잡아 올라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영국의 전투교범은 정반대였다. 영국함대는 원거리를 유지하면서 포격으로 적선을 두들기는 전술이었다. 스페인함대의 사거리에 들어간 것은 결전을 각오한 그하블린느Gravelines 전투가 처음이었다. 영국함대가 근접거리에 들어오자 스페인의 구형포도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 때는 이미 스페인 무적함대가 심각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