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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스페인

꿈으로 끝난 포르투갈왕의 제국건설

by uesgi2003 2019. 12. 3.



1578년 8월 4일 정오 무렵, 크사르 엘 케비르Ksar el-Kebir(지도 참조)라는 모로코Morocco마을 부근의 전장에서 3명의 군주가 전사했다. 두 명은 무슬림이고 한 명은 기독교였는데 이후 수십년 동안 유럽과 북아프리카 전역에 큰 영향을 남겼다. 그리고 영국과 스페인이 어부지리를 누렸다. 




일명 세왕의 전투로 알려진 알카세르 퀴비르Alcacer Quibir전투입니다. 좌측이 기독교 원정군, 우측이 무슬림 모로코군인데 벌써부터 그 결과를 알 수 있겠죠?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는 알카사르Alcazar전투로 더 유명한 크사르 엘 케비르전투는 세 왕의 전투로도 불린다. 가독교군주인 포르투갈왕 세바스티앙Sebastian 1세는 축출된 모로코술탄 모울라이 모하메드Moulay Mohammed(모하메드 2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모로코 사아디Saadi왕조를 연 모하메드 아쉬-쉐이크Mohammed ash-Sheikh의 아들이자 자신의 작은 아버지인 압델말레크Abdelmalek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났다. 

압델말레크는 형인 압달라 알 갈립Abdallah al-Ghalib이 왕위에 오른 후에 자신을 죽이려하자 1557년에 동생과 함께 오스만Ottoman제국으로 달아났었다. 1574년, 압달라가 죽고 아들인 모울라이에게 왕의가 계승되자 왕위계승을 주장하고 나섰다. 

모로코왕국은 내전으로 분열되었고 1576년, 오스만군의 지원을 받은 압델말레크가 수도에 진입했다. 모울라이는 왕궁에서 탈출해 게릴라전을 벌이며 세바스티앙의 지원을 간청했다. 



24살의 포르투갈왕은 모로코십자군원정과 구시대 기사도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병사를 일으켜 모울라이 모하메드를 돕고 바르라리Barbary영토를 침공하기로 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쇠락한 영광을 되찾기 위해 지휘경험이 전혀 없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 토마스 스투컬리Thomas Stukeley라는 젊은 영국인을 데려갔다. 영국왕 헨리 8세의 서자라는 소문이 있는 스투컬리는, 에드워드Edward 6세부터 온갖 종류의 대외공작에 개입했다. 

1550년대 초반부터 첩보원, 용병, 해적, 밀수꾼, 건달 등을 전전한 그는 늘 운좋게 위기를 모면했지만 동료는 쳐형되었다. 그가 계속 처형을 모면하자 영국왕실과의 연줄이 있다는 소문이 생겼다. 


1558년, 엘리자베스Elizabeth여왕즉위 후에도 스투컬리는 왕실에 걸림돌이 되었고 1570년에 영국을 탈출해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스페인의 영국과 아일랜드침공 계획에도 참여했다. 1578년 2월 2일, 교황의 지원을 받아 3,000명을 무장시키고 보급할 수 있는 군수품을 가득 실은 배에 몸을 실었다. 이탈리아용병 600명도 함께였다. 이들은 스페인에 있는 아일랜드반란군과 합류해서 아일랜드를 침공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계획이 취소되었다.

선박은 심각한 상태였고 2주면 충분한 거리를 2개월이나 걸려 항해했다. 그동안 600명이 배에 실린 모든 식량을 먹어치웠다. 

4월 중순, 배가 카디스Cadiz에 도착하자 이탈리아용병은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위기에 몰린 지휘관에게 반가운 전령이 찾아왔다. 스페인국왕 펠리페Pelipe는 스투컬리에게 리스본Lisbon으로 가서 세바스티앙의 원정군과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교황은 돈만 날리고 농락당했다.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입니다. 철저한 가톨릭 지지자로 유럽의 온갖 종교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만약 그가 조금만 관용을 베풀거나 정치적이었다면 세계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스투컬리는 아일랜드를 가톨릭Catholic으로 복구시키는 신성한 명령을 저버렸다. 심지어 교황은 사악한 여자(엘리자베스여왕)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해두었는데 말이다. 펠리페는 아일랜드침공을 도와달라는 교황의 요청을 무시했다. 그는 저카 세바스티앙의 모로코원정을 지지하고 있었다. 

세바스티앙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17,000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약 9,000명의 농부징집병, 1,500명의 영주지원병, 1,000명의 귀족출신기병, 5,500명의 외국용병(발룽, 스페인, 이탈리아 출신)과 포병부대였다. 

이렇게 잡다한 편성은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스투컬리의 이탈리아용병은 처음 목적과 달리 외국지휘관의 명령을 받고 식량을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사실에 거칠게 반항했다. 30개의 화약통과 7,000자루의 화승총이 준비되었지만 징집병 대부분은 창과 같이 전통적인 무기로 무장했고 전투대형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세바스티앙은 서둘렀다. 그는 선두에서 서서 부대를 이끌고 돌격하는 환상에 젖어있었다. 경험이 미천한 지휘관이 현실과 조언을 무시하면 참담한 결과는 당연했다. 



6월 24일, 500척의 원정함대가 리스본 타구스Tagus강을 출발했고 7월 14일에 모로코의 대서양해안의 아실라Asilah에 도착했다. 원정은 처음부터 삐걱댔다. 원정군은 적국에 있으면서도 방어진지를 세우지 않고 들판에서 야영했다. 훈련은 거의 하지 않았다. 역할이 불분명해서 약간의 소동만 일어도 군대 전체가 뒤집혔다.

원정군이 도착하자 압델말레크는 협상에 나섰다. 해안영토를 내주겠다는 관대한 조건이었는데도 바스티앙은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감이 넘친 그는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해안을 따라 내려간다는 계획을 취소했다. 

6월 23일, 전쟁회의를 소집하고 신속하게 내륙으로 진군해서 승전한다는 계획을 주장했다. 보급을 받기 위해서라도 함대가 필요했다. 세바스티앙은 어떤 조언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스투컬리와 다른 지휘관 2명이 왕에게 맞서며 성급한 진군은 절대로 안된다고 말렸다. 세바스티앙은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입다물게 했다. 



포르투갈의 모로코 식민지입니다. 


7월 29일, 원정군이 진군에 나섰고 그 뒤를 성직자, 장사꾼, 창녀, 음악가, 노예 등 수천 명이 따라갔다. 가족까지 합치면 원정군과 맞먹는 숫자였다. 1,100대의 마차에는 귀족의 품위를 유지하는 천막, 가구, 식기 등이 가득 실려 있었다. 

오래전에는 이런 일이 일반적이었지만 1570년대는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엄청난 수송마차대열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곧바로 식수와 식량난에 직면했다. 그리고 원정군 뒤를 모로코경기병이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오합지졸 원정군은 겨우 50km를 진군하는데 6일이나 걸렸다. 압델말레크는 원정군의 위치와 방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8월 3일 밤, 모울라이 모하메드는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면서 세바스티앙에게 이튿날 늦은 오후까지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압델말레크의 건강이 하루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서 적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했다. 

스투컬리도 그의 조언을 지지했지만 왕은 다시 한 번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입을 다물게 했다. 세바스티앙은 모든 조언을 거부하며 동이 트면 바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포르투갈군의 공격로로 미리 정해두었는데 기병의 멋진 돌격을 위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병사들을 수송마차대열과 함께 사각형 방진대형으로 펼쳐두었다. 창병 대부분은 수송마차를 지키는 역할로 전락했다. 


스투컬리와 이탈리아군, 스페인군은 보병의 좌익을, 독일과 발룽군은 우익을 맡았고 농부징집병은 그 뒤에 집결했다. 불안했던 스투컬리는 이탈리아용병을 작은 부대로 나누어 스페인부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세바스티앙과 포르투갈귀족이 기병을 이끌었고 모울라이군은 방진의 측면을 지원했다. 화승총병은 후위를 맡았다. 

총 23,000명의 원정군 건너편에는 약 60,000명의 무슬림군이 3열로 서 있었다. 압델말레크도 대포를 배치했고 화승총병의 숫자는 원정군보다 훨씬 많았다. 


세바스티앙이 바라던대로 알카사르Alcazar전투가 시작되었다. 겨우 6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양쪽은 각각의 전투대형을 만들고 함성을 지르고 소리만 요란한 포격전을 주고 받은 후에 보병대가 앞으로 나가 치열한 백병전을 시작했다. 세바스티앙은 포르투갈기병대를 선두에서 이끌며 적진에 뛰어들었다. 순간의 충격으로 적진에 큰 구멍이 생겼지만 후속병력이 없어서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무슬림예비대가 앞으로 나와 빈틈을 채웠고 10배나 많은 압델말리크의 기병이 포르투갈기병대를 전멸시켰다. 이후부터는 숫자싸움이었다. 무슬림군은 원정군의 방진을 포위해 사방에서 쓰러트렸다. 



원정군은 8,000명 이상이 죽고 15,000명이 포로가 되어 몸값을 치루지 못한 사람은 노예가 되었다. 생존자는 아실라의 함대로 돌아갔지만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무슬림군은 4,000명 정도를 잃었다. 

전사자 중에는 세바스티앙도 있었고 모울라이 모하메드 그리고 압델말레크도 있었다. 모울라이는 강을 건너 달아나려다가 익사했고 압델말레크는 모울라이가 말했던 것처럼 그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스투컬리도 죽었다. 

스투컬리의 죽음에는 두 가지 소문이 전해지는데, 무슬림대포에 다리를 잃고 전투초반에 죽었다는 소리가 있고 패전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이탈리아용병이 죽였다는 소리가 있다. 

후자의 소문은 영국극작가 조지 필George Peele의 알카사르전투The Battle of Alcazar(1594년 출간)과 작자미상의 토마스 스투컬리대장의 삶과 죽음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The Famous History of the Life and Death of Captain Thomas Stukeley (1600년 출간)으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3명의 군주와 40명의 귀족이 죽었기 때문에 스투컬리의 죽음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특히 세바스티앙은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왕좌는 2년 후에 스페인 펠리페의 손에 넘어가 포르투갈은 1640년까지 합스부르크Hapsburg왕가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세바스티앙은 원정으로 국고를 완전히 바닥내 포르투갈은 왕도 없고 귀족도 없고 돈도 없는 나라로 전락했다. 

스투컬리의 죽음은 조용히 그리고 무척 심각하게 조국에 영향을 미쳤다. 스투컬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편력과 모험에 대해 정치적인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국은 설탕과 화약생산에 필수적인 질산칼륨을 모로코의 압델말레크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영국출신의 지휘관이 부대를 이끌고 적과 함께 참전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모로코와의 교역강화를 원했지만 압델말레크 다음으로 술탄에 오른 아흐메드 알 만수르Ahmad al-Masud는 협상을 미루다가 나중에야 대사를 파견해 조약을 맺었다. 

그런 면에서 스투컬리는 교황이 애초에 명령했던 대로 엘리자베스여왕을 괴롭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