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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스페인

세계역사와 종교를 뿌리채 뒤바꿨을 스페인 아르마다 원정 (3부)

by uesgi2003 2015. 4. 20.


칼레와 그하블린느 전투, 그리고 무적함대의 궤멸까지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 되어서 3부는 짧더라도 칼레전투까지만 정리해야겠습니다. 이미 무적함대의 궤멸이라는 스포일러를 꺼냈으니까 결론부터 잠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르마다 원정이 영국과 스페인 두 국가의 미래를 결정 지었고 세계역사 흐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했지만 실제 전투는 의외로 단순하고 지루했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네덜란드의 정예군대가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할 수 있도록 엄호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밀집대형으로 계속 수비만 했고, 영국 왕실함대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해안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고 결국에는 스페인 정예육군이 본토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영국해군은 스페인함대를 추격하면서 조금이라도 기회가 보이면 공격했고 프랑스 그하블린느Gravelines 전투에서는 스페인함대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며 최후의 일전을 감행해 결국에는 스페인함대의 해안접근을 막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영국해군이 스페인해군에게 치명타를 입혀 아르마다 원정을 막았다는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무슨 소리야? 1부와 2부에서는 영국함대의 현대적인 전술이 압도적이었다며? 하실텐데...

영국함대의 현대적인 전술은 스페인함대의 장기인 등선육박을 막는데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스페인함대에 치명타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압도적인 포술로 스페인 함선을 두들겨 비틀거리게 만들었지만 침몰시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30년 전인 1588년 당시의 포와 포탄의 위력은 선원에게는 치명적이었지만 함선의 단단한 목재에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수송함대의 기함인 엘 그란 그리폰El Gran Grifon(적재량 650, 38, 탑승인원 279)은 낙오되었다가 소총사거리까지 접근한 영국함대의 근거리 포격을 40발이나 맞았지만 다시 본대로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인 그하블린느 전투에서 산 마르틴San Matin(적재량 1,000, 48, 탑승인원 469)200발의 포탄을 두들겨 맞았지만 무사히 살아남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르마다 원정을 막은 주인공은 스페인해군의 소극적인 작전도 아니고 영국해군의 적극적인 공세도 아닌, 자연재해였습니다. 많은 병력을 잃고 상처투성이가 되었다고 해도 스페인함대가 그대로 귀환했다면 몇 년 안에 더 무서운 전력의 함대가 보다 적극적인 전략전술로 다시 원정에 나섰을 것이고 아마 그 때에는 영국해안에 무사히 세계최강의 육군을 올려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

뒤에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여전히 전력과 사기를 유지하며 귀환하던 무적함대는 악천후를 만났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결정적인 칼레와 그하블린느 전투만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르마다 원정로를 미리 눈여겨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대부분의 선박은 전투가 아닌 태풍으로 아일랜드 지역에서 침몰했고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르마다 원정은 돈 알바로 데 바산Don Alvaro de Bazan(그림 참조)이 과로와 고질병으로 158829일에 죽으면서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는 레판토(1571)와 아소르스(1582)해전을 겪은 스페인 최고의 해군사령관으로 랑데부 작전에 반대하며 대규모 작전을 주장했었다. 62세의 나이로 고령이었지만 정열적으로 무적함대를 준비했고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영국해안에 육군을 올려두었을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돈 알바로 바산이 레판토해전 승리 후에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펠리페왕은 돈 알론소 페레스 데 구스만 엘 부에노Don Alonso Perez de Guzman el Bueno(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공작, 그림참조)에게 원정사령관 임무를 맡겼다. 대규모 해전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병과 준비부족을 이유로 사양하다가 결국 함대를 이끌게 되었다



영국함대의 끈질긴 공격을 막아내며 함대를 잘 이끌었지만 주어진 목표범위 안에서만 머물렀고 상황에 따른 창의적인 지휘능력이 부족했습니다. 보다 적극적이었다면 원정의 판세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스페인함대의 불운은 사령관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었다. 기상악화로 130척과 18,973명의 병력이 20일 동안 묶여 있다가 528일에야 리스본항을 떠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마치 겨울날씨와 같은 악천후에 시달렸고 원래 느린 수송선함대는 발목을 잡았다.

악천후에 시달린 함대는 스페인 북서부 라 코류냐La Coruna 항에 들러 수리와 재보급을 받기로 했는데 619, 다시 심한 남서풍이 불면서 함대를 비스카이Biscay만에 흩어놓았다. 이 순간 메디나 시도니아는 원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지만 국왕은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을 명령했다.

 

스페인함대는 721일에야 다시 바다로 나설 수 있었고 랑데부할 파르마공에게 바뀐 일정을 알리기 위해 연락선을 보냈다. 4척의 수송선과 비스카이함대의 기함 산타 아나Santa Ana가 선체결함으로 피항하면서 총 125척의 대함대가 반대편 영국해안을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영국본토임을 알려주는 더 리자드The Lizard가 보이자 마지막 작전회의가 열렸다. 돈 알론소 마르티네스 데 레이바Don Alonso Martinez de Leiva와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Juan Martinez de Recalde는 영국함대 집결지인 플리머스Plymouth를 선제공격해서 영국함대를 좁은 공간에 가둬놓고 나머지 함대는 예정대로 그렇지만 여유있게 작전을 수행하자는 제안을 했다. 국왕이 네덜란드 해안에서 건너가는 육군을 보호할 때까지 전투를 피하고 수비만 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원래 작전대로 전투를 피하기로 했다.

 

스페인함대가 적극적인 공세로 나왔다고 해도 가만히 당할 영국함대가 아니었다. 이미 척후선을 통해 스페인함대의 접근을 알았고 하워드Howard는 함대를 둘(자신의 본대와 드레이크의 해안함대)로 나누었다가 거대한 스페인함대에 기죽지 않고 달려들면서 서전일 벌어졌다. 하워드는 80톤짜리 소형선 디스테인Distain을 스페인 기함에게 보내 전투를 알리는 포를 쏘게 했는데 그 배는 데 레이바의 기함 라 라타 산타 마리아 엔코로나다La Rata Santa Maria Encoronada였고 메디나 시도니아는 기함 산 마르틴의 돛을 펼쳐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영국함대의 공세에 대해 스페인함대는 접근하는 영국함대를 포위하는 반달형 밀집대형을 고수했는데 영국함대가 원거리를 유지하며 양쪽 끝을 공격하자 전통적인 테르시오Tercio 밀집대형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리고 대열을 무너트리는 함장은 목대달아 처형하겠다고 경고하면서 작은 배에 처형인을 태워 함대를 돌게 했습니다. 



7월 31일 플리머스, 8월 2일 포틀랜드, 8월 4일 와이트섬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지지만 스페인함대는 원래의 작전대로 수비대형을 유지하며 전투를 피했고 영국함대도 스페인함대의 사정거리 밖을 유지하며 결전을 피했습니다. 



8월 1일 로사리오Rosario가 낙오되자 부제독인 드레이크는 해적질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전열을 이탈해서 노획했고 하워드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로사리오에는 군자금 50,000 황금 두카트가 실려 있었는데 해적은 돈냄새를 맡는 모양입니다. 


그림은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로사리오Nuestra Senore del Rosario의 함장 돈 페드로 데 발데스Don Pedro de Valdes가 항복하는 장면입니다. 항해를 시작하자 마자 회항한 선원도 그렇고 로사리오도 나중의 운명을 생각하면 운이 좋았습니다. 



하워드와 함께 아르마다 원정을 막은 1등 공신인 드레이크는 노예무역과 사략질을 계속하다가 1596년 파나마 근해에서 병에 걸려 죽었고 수장되었습니다. 



82, 바람을 받은 스페인함대는 포틀랜드 경주Portland Race(스페인함대의 동진방향)에서 유리해졌고 영국함대는 스페인의 랑데부 작전을 완전히 알지는 못했기 때문에 스페인함대가 해안에 상륙할 것을 염려해 진로를 막아서려고 연안으로 접근하다가 스페인함대의 공격을 받고 둘로 나뉘게 됩니다.

 

프로비셔Frobisher함대가 고립되어 위기에 몰리자 하워드함대가 구원에 나서고 드레이크는 스페인 후위를 공격해서 격전이 벌어집니다. 스페인함대는 다시 밀집대형을 갖춰 동진하고 하워드는 83, 함대를 4개의 소함대(자신, 드레이크, 프로비셔와 호킨스Hawkins)로 나누어 하루 종일 스페인함대의 발목을 잡습니다.

 


연이은 전투에서 영국함대의 공격을 받아냈던 산 마르틴의 피해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선체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삭구Rigging가 끊어졌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항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영국해군은 원거리 포격전에서 압도했지만 아르마다에 큰 피해를 주지도 못했고 대열을 무너트리지도 못했다. 스페인함대 전체에서 50명 정도가 죽은 것이 전부였고 영국함대의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하워드와 드레이크는 다음 상륙지로 와이트섬을 생각했고 영국함대의 상황이 오히려 더 난감해졌다. 탄약이 거의 바닥나자 하워드는 급히 연락선을 보내 탄약보급을 요청했고 노획한 두 척의 배에서 탄약을 긁어모았다. 만약 스페인함대가 상륙을 감행한다고 해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육지에서는 햄프셔Hampshire 민병대 6,000명이 화톳불을 켜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스페인군의 상륙을 지켜보았다.



당시의 시민군을 재현한 모습입니다. 각 지역 별로 수 천 명의 시민군이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르는 스페인육군의 상륙을 기다렸습니다. 원래는 스페인함대를 따라 계속 이동하면서 런던에서 내려온 정규군과 함께 상륙을 저지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스페인함대가 지나간 지역의 시민군은 그대로 해산해버렸습ㄴ디ㅏ.

그리고 계획대로 모였다고 해도 당시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스페인육군을 상대하기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전력이었습니다. 


 

스페인함대도 영국함대만큼이나 근심이 컸다. 와이트섬을 지나치면 더 이상 파르마공의 랑데부를 기다릴 곳이 없었기 때문에 와이트섬 뒤의 솔런트Solent 해협에 들어서야 했다.


엘 그란 그리폰(그림 참조)이 낙오되어 40발의 포탄을 맞았지만 무사히 견인하는데 성공했고 와이트섬을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하워드는 함대를 4개의 소함대로 나누어 스페인함대를 2시간 동안 결사적으로 막아냈고 메디나 시도니아는 솔런트 해협으로 선회할 바람을 타지 못했다. 이제는 프랑스 칼레Calais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연락선을 보내 파르마공에게 랑데부 지점과 시간변경을 알렸다.


 

템즈강에서는 헨리 시모어Henry Seymour 소함대가 내려와 영국함대이 간절히 기다리던 탄약을 보급했다. 하워드는 이제 다시 다가올 스페인함대를 저지할 수 있게 되었다.

86, 스페인함대는 밀집대형을 유지한 상태로 칼레에 닻을 내렸다. 랑데부 지점은 확보하지 못했어도 스페인함대의 전력은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로 영국해협을 거슬러 올라왔고 이제 덩케르크Dunkirk에 있는 파르마공의 군대가 영국해협 건너로 옮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다시 열린 작전회의에서 칼레에 머물면서 파르마공의 수송선합류를 기다리기로 했다.

시모어의 합류로 140척으로 불어난 영국함대는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교착상태를 돌파할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시도한 작은 시도는 결국 아르마다 원정을 가로막은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