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포탈에 맥아더의 정체(?)를 밝히는 기사가 나왔다가 바로 사라졌기에 맥아더에 대한 미국인의 평가자료를 하나 더 급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맥아더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의견과 자료가 많은데, 중국본토를 위협하다가 해임되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필립 바이들러Phlip Beidler 교수가 2007년도 군사잡지에 정리한 내용입니다. 늘 그렇듯이 제 개인적인 의견은 따로 표시했고 본문은 최대한 원자료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아이젠하워와 맥아더의 인물비교 (1부)
두 사람 모두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를 졸업해 육군에서 함께 복무했고 2차대전에 참전했다. 두 사람은 원수로 진급했지만 한 사람만이 백악관에 입성했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조지 워싱턴이후 11명의 미육군 장군이 대통령직에 올랐다.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톰 브로커의 소설제목으로 대공황을 겪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1910~1925년생 세대) 중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백악관을 두고 경쟁했다.
그렇지만 엇갈린 운명의 장난으로 맥아더의 부하, 동료, 경쟁자인 아이젠하워가 승리했고 두 번이나 정치와 군 최고직을 맡았다.
1930년대 초반,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는 명망이 높았던 미육군참모총장 맥아더장군과 루이지애나 급진정치인 휴이 롱Huey Long을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사람이라고 못박았다.
롱은 1935년에 암살당했고 루즈벨트도 2차대전 내내 맥아더를 통제하려고 애쓰다가 1945년에 세상을 떠났다. 전후에는 맥아더만이 홀로 남았지만 루즈벨트가 그에게 붙인 ‘미국인 카이사르Caesar’라는 등딱지는 여전히 붙어 있었다.
(미국인 카이사르라는 말이 마치 대단한 영광인 것처럼 호도하는 저자가 실제로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세계역사에서 손꼽는 영웅이기는 하지만 로마공화정을 몰락시키고 종신독재관으로 독재를 시작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이후부터 로마는 황제 정치가 시작되고 역시 세계역사에서 손꼽는 칼리쿨라부터 네로까지의 악정이 연이어져 로마는 크게 몰락합니다. 루즈벨트가 카이사르로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맥아더를 아시아의 카이사르 등으로 호도하는 것은 곤란하죠. 루즈벨트는 맥아더의 불손한 태도와 항명 때문에 그런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당시에는 선동가이냐 급진파이냐로 논란이 많았던 휴이 롱 상원의원입니다만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옳은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부의 집중을 막고 과격한 서민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암살되었습니다.
맥아더는 운명을 믿으며 전설적인 삶을 보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역사위인의 현신(다시 태어남)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지 워싱턴, 앤드류 잭슨(남북전쟁의 명지휘관), 나폴레옹 등과 같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국경에서 달려온 것처럼 위인으로 생각했고 자신이 생각해도 민주시대에 현신한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가를 선포했다가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했죠.) 카이사르를 표방했듯이 그는 몰락했고 극적으로 그리고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스인은 이런 태도를 휴브리스Hubris(그리스 원어Hybris로 오만함으로 몰락하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의미)라고 불렀는데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맥아더의 비전과 스타일은 가문에서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19세에 미셔너리 릿지Missionary Ridge에서 명예훈장Medal of Honor(최고무공훈장)을 받았던 유명한 북군장군이었다. 아버지 맥아더는 1899년에 반란군 진압을 위해 필리핀으로 건너갔다.
아들 맥아더는 1903년에 웨스트 포인트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혜성과 같은 경력을 시작했다. 필리핀과 멕시코에서 영웅적인 전과를 올리더니 1차대전에서는 믿기 힘든 전과로 7개의 은성훈장과 수훈십자장을 받았다. 명예훈장 후보였지만 존 퍼싱장군의 방해로 못 받았다고 주장했다.
38세에 미원정군 사상 최연소 사단장이 되었고 1차대전 종전 후 귀국해서 사관학교 교장으로 교육개혁을 단행했고 미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사관학교 당시의 맥아더입니다. 재능도 전설적이었지만 어머니의 치맛바람도 전설적이었습니다.
그는 양차 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미군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예산삭감에 대해 다음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죽게 되면 루즈벨트 책임이며 저주가 쏟아질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격분한 대통령이 맥아더의 불손한 언행에 대해 비난하자 백악관 계단에 구토를 했다. 어쨌든 그는 방위예산을 제대로 가져갔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수직출세와 정반대로 천천히 두각을 나타냈다. 모든 사람은 그를 아이크Ike라고 불렀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불렸다. 맥아더가 화려함과 운명을 확고하게 믿었던 반면에 아이젠하워는 화합과 공감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펜실바니아에서 캔사스로 이주한 독일계 아버지 밑에서 5명의 형제와 성장했다. 무료교육 기회를 얻어 웨스트 포인트로 진학했고 무릎을 다친 후에도 미식축구에 심취했고 친구와 어울려 술을 즐겼다.
1차대전 당시에 전방으로 차출되지 못하자 국내임무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섰다. 새로 조직된 전차훈련소 지휘관으로 재직하면서 조직운영과 훈련능력을 인정받았다. 약간 나이가 많은 조지 패튼George Patton(2차대전에서는 부하)과 함께 기갑부대의 가능성을 일찍 깨달은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맥아더는 1930년대 중반에 더 이상 전투를 벌일 기회가 없자 전역하고 필리핀군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이후 25년 동안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다. 2차대전과 진주만 발발 후, 1941년 일본군이 필리핀을 공격하자 루즈벨트는 필리핀 소개를 명령했고 맥아더는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참모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했다.
필리핀 방어와 탈출여정을 인정받아 그가 그렇게 오랜 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수훈무장을 받았다. 맥아더는 이후 일본군의 강력한 거점을 우회해 육군의 공군과 지상군 연합병력을 전개하고 해군과 해병대의 작전과 협력하는 태평양전략으로 태평양전선을 되찾았다.
다시 한 번 그의 대단한 전략을 인정받아, 1945년 USS 미주리 전함 위에서 있었던 일본항복서명을 관장했다. 그리고는 전후 일본의 민주화와 재건을 관장하는 황제역할도 훌륭히 해냈다.
아이젠하워는 양차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육군체계 내에서 조용히 기다리며 야심을 키우고 직업군인의 정치판 안에서 인내를 배웠다. 그는 계속해서 후원관계를 맺었는데 파나마 여행 중에는 폭스 코너Fox Conner장군과 그리고 10년 동안 맥아더를 모셨다.
1932년 워싱턴의 보너스 행진Bonus March과 1935~1939년 필리핀에서 맥아더와 찍은 사진을 보면 보좌관 역할의 아이젠하워가 보인다. 아이젠하워는 포트 리벤워드 미육군지휘참모대학에서 수석졸업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평시 최대전쟁게임인 1941년도 루이지애나 기동작전을 지휘하면서 조지 마샬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2차대전의 암운이 드리우자, 아이젠하워는 갑자기 제3 보병사단에서 마샬장군 휘하의 워싱턴참모로 차출되었다. 전쟁 초에 마샬은 그에게 참모로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야전지휘로 진급하는 장교보다 늦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노한 아이젠하워는 방을 나섰다가 바로 돌아와서 이렇게 대답했다. “장군님. 말씀하시는 바를 알겠지만 진급계획에 대해 내가 전혀 알바가 아닙니다. 현장에서 이 사무실로 호출되었고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 내내 책상에 묶여 있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마샬은 모처럼 미소를 띄웠다. 유럽전선에 알맞는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1939년 중령에서 1942년에는 중장으로 빠르게 진급해 북아프리카 상륙을 지휘했다. 2년 후에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역사상 최대군사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수상, 알란 브룩원수, 버나드 몽고메리원수, 샤를 드골과 같이 난감한 인사들과 까다로운 미군 총사령관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이를 능숙하게 조율해서 유럽전선 승리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올바른 평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앤드류 커밈행, 어네스트 킹, 헨리 아놀드, 칼 스파츠제독과 아더 테더와 트래퍼드 르멜러리 공군사령관과 같이 육군과 껄끄러운 관계의 지도자와도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오마르 브래들리, 마크 클라크, 조지 패튼 등의 육군 부하지휘관과도 끊임없이 소통했다.
처칠은 “그는 기민하게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감독했고 엄청난 일을 직접 해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위임된 권한을 침해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아이젠하워가 독일항복일에 워싱턴에 보낸 내용을 보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제하는 리더십을 볼 수 있다.
“연합군임무는 1945년 5월 7일, 현지시각 0300시에 완수.”
(저자가 왜 이 문장을 강조했냐 하면 맥아더는 반대로 각종 메시지에서 미국과 대통령보다는 자신을 부각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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