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바이들러Philip Beidler 교수가 베트남전 전사의 대가이기는 하지만 미국문학 교수이다보니 전사관련 도서인데도 표현이 장황하거나 꼬인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생략과 의역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원자료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이젠하워와 맥아더의 인물비교 (2부)
1950년,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기습공격하자 맥아더는 UN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전장에 복귀했다. 그는 부산포위망을 돌파했고 인천상륙을 감행했다. 연합군은 38선을 넘어 중국국경까지 북한군을 밀어붙였다가 수십만 명의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원래 출발점보다 더 후퇴했다.
한국은 2년 동안 격전을 치르며 1945년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맥아더는 적과 듣기 좋은 정보만 전달하는 참모에게 발목을 잡히자 허풍을 부리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는 중국본토 폭격과 침공을 경고했고 대만 국민당 장개석 정부와 마음대로 참전에 대해 협의했다.
해리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은 미군 최고사령관인 자신에게 불복하는 맥아더를 항명으로 해임시켰다. 맥아더는 강제전역당하자 귀국해 미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맥아더는 영웅 대접받았고 가두행진과 최초의 상하원합동연설에 초대받아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자신에 대한 예언과 같은데, 절정의 순간을 만끽한 그는 점차 잊혀져 갔다.
아이젠하워는 마샬의 뒤를 이어 전후 참모총장을 지내다가 콜럼비아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유럽냉전 때문에 군인이자 정치가로 적임자였던 그는 다시 5성장군으로 군복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주당과 공화당은 아이젠하워를 강력한 대통령후보로 영입하고 싶어했고 해리 트루만은 그에게 1948년 민주당후보를 약속했지만 거절당했다.
아이젠하워는 NATO 사령관에서 민간인으로 돌아온 후에 1952년 공화당전당대회에 초대받았고 후보경쟁에서 승리했다. 아이크는 1952년과 1956년 연속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후세계와 미국시대의 지도자로 두 사람은 극적인 대비를 이루었다. 맥아더는 고전 낭만주의와 같은 구세대를 대표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복장에 각별한 신경을 썼는데 1914년 멕시코부터 1차대전 사진에서도 그랬고 왕좌처럼 보이는 사령부 가구에 앉은 사진도 있었다. 2차대전과 한국전에서는 수놓은 모자, 비행사 선글라스와 과도한 옥수수 담뱃대 스타일로 정착했다.
맥아더나 아이젠하워 모두 가문이 경력과 리더십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맥아더의 경우,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 핑키Pinky(Mary Pinkney Hardy)는 19세기 당시 기준으로 보면 위압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웨스트 포인트에서 4년 내내 아들을 돌봤고 그 이후 평생 동안 아들의 경력에 중요한 기회가 올 때마다 오르고 달래며 간섭했다. 생도였던 맥아더는 수석을 차지한 의지는 물론이고 난폭한 교내폭행을 견디는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고통으로 기절한 경우도 있었는데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폭행을 저지른 선배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당시 미사관학교에서는 왕따와 폭행이 무척 심했다는 군요).
1922~1929년의 첫 결혼과 이혼 후에, 1년 동안 젊은 필리핀 여배우와 지내다가 1937년에 진 페러클로그Jean Fiacloth와 재혼했고 아들 아더는 나중에 음악가가 되었다.
1890년에 태어난 아이젠하워는 상대적으로 신세대처럼 보였고 관리전문가 이미지였다. 그는 군전략부터 군수까지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의사결정과정을 섭렵했고 거기에 권한위임, 협력, 세심한 조율의 리더십까지 더했다.
아이젠하워는 보이는 그대로였다. 그는 2차대전 아이크 재킷이라는 패션을 즐겼는데 영국식 전투복에 미국의 실용성을 혼합한 복장이었다. 수 많은 사진에서 손에 담배를 들고 흡연가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하루에 담배 3갑을 피웠다.
아이젠하워는 체격이 커서 아내가 그를 처음 봤을 때에 뷰지Bruiser(체격 좋은 경비원)라고 불렀다. 생도시절에 입은 무릎부상 때문에 전쟁 내내 고생을 했다. 골프를 즐겼고 카드놀이에도 능숙했으며 독서를 즐겨 작문솜씨도 대단했다.
자신이 야심이 부족한 반면에 성격이 난폭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평생 동안 결점을 통제하고 약점을 보완하려고 애썼다.
전쟁기간과 그 후에 그는 사업가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그것도 사심없고, 충성심강하며 조직을 위한 리더십의 사업가였다. 제101 공수사단이 D-Day 하루 전에 찍은 사진에서 그런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있다. 이튿날이면 프랑스에 낙하하게 되는데 무려 70%의 희생이 예상되던 작전이었다.
아이크는 그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D-Day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는 문서의 초안을 지갑에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이젠하워도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와 2차대전 당시 영국인 운전수이자 참모였던 케이 서머스비Kay Summersby(사진 참조)와의 관계에 대해 말이 많았다. 그리고 첫 번째 대선순회에서 조지 마샬을 맹비난하던 조세프 맥카시Joseph McCarthy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인생과 경력은 공사 모두에서 서로 영향을 주었다. 초기 인연을 맺을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함께 지냈던 긴 시간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공개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훨씬 아래의 부하였던 사람의 성공을 몹시 질투했다. 최고사령관에 오른 아이젠하워도 전직 스승이자 경쟁자와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대해 “내 밑에서 일한 중에 최고의 부하”라며 입을 연 적이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응답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 밑에서 7년 동안 극적연출을 배웠죠.”
두 사람은 대통령직을 향한 행보에서 극과 극이었다. 맥아더는 2차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국내에서 공화당 대통령후보라고 부르는 것을 반겼다. 민주당은 맥아더가 공화당 후보로 나오면 아이크를 루즈벨트의 부통령후보로 초대할 계획이었다.
두 사람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이 다음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두 사람의 백악관행 행보는 큰 차이를 보였다.
맥아더는 1944년 선거부터 계속해서 야심을 숨기지 않았고 자신을 공화국 구원자로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바로 국민의 생각이라는 절대적 통치자였다. 결국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평범한 아이젠하워가 공화당후보로 부각되자 상처를 받았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의 태도를 싫어했다.
아이젠하워에게 좋은 않은 기억으로 남은 일화가 있었다. 유럽전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이젠하워가 도쿄를 방문했을 때에 맥아더와 저녁식사를 같이 했고 그 후에 늦은 밤까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출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자 맥아더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이크. 그게 맞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분명히 대통령이 될 거야!” 아이젠하워는 화가 치밀었다.
1948년이 되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가 (대학총장과 NATO 사령관이 되어)백악관으로 향하는 길에 제대로 올랐다는 것을 알았다. 트루먼(민주당후보)과 듀이(공화당후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든 혼전을 벌이는 동안, 맥아더는 패전국 일본에서 황제노릇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전 발발과 항명으로 인한 해임으로, 맥아더는 이제 1952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맥카시McCarty의 선동이 극에 달할 때였다. 38선을 놓고 많은 희생을 계속 치루고 있었고 맥아더는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싶어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종북좌파(?) 광풍의 주인공 매카시입니다.
소련의 대두, 한국전 등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퍼지자 그것을 이용해 정계부터 문화계까지 공산주의자 색출에 나서 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심지어 아이젠하워 대통령까지 공산주의자 혐의를 씌웠는데 그의 주장이 황당무계한 것이 밝혀지면서 종북좌파 광풍이 해프닝으로 끝났고 미국은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아이젠하워가 공화당후보로 부각되자, 맥아더는 어린 경쟁자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중국국경을 폭격하고 만주에 원자탄을 투하해서 북한과 중국국경 일대를 방사능오염지대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면 러시아군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그 당시에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맥아더에게 그런 결정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설상가상으로 한국전 후임자 매튜 릿지웨이Mattew Ridgway가 활약해서 패전이 될 수도 있었던 전황을 복구해 안정시켰다.
맥아더와 공화당 우파는 여전히 1952년 전당대회를 노렸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와 태프트 양자 구도를 깨트리기 위해 전당대회 기조연설자로 나섰다. 더 나아가 태프트의 부통령후보가 되기 위해 작업했다. 태프트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임기 중에 죽을 수 있다는 기대였다.
그렇지만 전당대회에서는 맥아더의 몰락과 아이젠하워의 파죽지세가 결정되었는데 두 사람의 인생곡선의 교차점은 바로 기조연설이었다. 맥아더는 기조연설에서 자신이 그렇게 자신있던 카리스마와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로 판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러질 못했다.
맥아더의 극적인 연설은 오히려 중언부언하고 내용이 과장되고 너무 지루하고 길어 역풍을 맞았다. 얼마나 심각했던지, 그의 연설문은 지금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실 아이젠하워의 연설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이젠하워는 사진만으로 충분했다. 아이크와 매미Mamie(아내), 닉슨과 찍은 사진은 전후 미국 민주주의가 누리게 될 가정, 평화, 안정을 제대로 표현했다.
결국 미국은 아이젠하워를 선택했다. 맥아더는 그렇게 대단했던 영광과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탐욕하고 야심을 대놓고 드러내는 어둡고 악의적인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많은 국민에게 2차대전을 일으킨 독재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맥아더를 존경했지만 두려워했다. 반대로 우리는 아이크를 좋아하고 신뢰했다. 그는 미국을 전성기로 이끌 충분한 지도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의지가 있고 협상을 이끌어내며 국민에게 영감을 주고 세계의 신뢰를 얻었다.
스테펀 암브로스의 전기 머리말 문장 하나가 당시의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위대하며 좋은 사람이었다.” 역사를 보면 위인이 모두 선량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젠하워는 결정적인 시기에 국민에게 승리를 안겨주었고 미국인은 그에게서 위대함과 선량함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와 맥아더에 대해 미국 한인사회에서도 비교한 적이 있었군요.
"한국전쟁 영웅은 맥아더가 아니라 아이젠하워" LA 김태환 회장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620_0013740718&cID=10101&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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