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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히틀러의 마지막 기회, 모스크바 전투 (7부) - 태풍작전 종료

by uesgi2003 2016. 1. 10.


결론부터 말하면 히틀러는 1942년 봄에 모스크바를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소련군의 대대적인 겨울반격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신에 큰 공을 들였던 남부전선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독소전쟁은 소련으로 급속하게 기웁니다.

 


태풍작전 종료, 111~124

 

10월 말이 되자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 70~90km 지점에서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폰 보크는 더 늦기 전에 모스크바로 향하고 싶었지만 보급은 턱없이 부족한데다가 전력도 바닥났다. 히틀러는 2주 간의 작전중단을 허락하고 1115일에 마지막 공격을 이어가기로 했다. 폰 클루게의 4군도 11개 보병사단으로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월 말이 되자 도로는 최악의 상태였고 많은 차량이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독일군의 기동력은 사라졌다. 폰 보크는 모델의 41군군단의 여유병력을 9군의 칼리닌 전투에 응원하면서 오히려 전력을 분산시켰다. 덕분에 호트의 전차군 367전차사단, 14보병사단만 남았고 전차도 150대가 전부였다.

6전차사단 대부분은 체코제 35전차였고 그나마도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이미 12,000km를 달렸기 때문에 41대의 부품을 이리 저리 바꿔도 겨우 10대만 움직일 수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의 무대는 지도 검은색 원 부분입니다.

태풍작전이 성공해서 모스크바에 들어섰다고 해도 중앙집단군의 전력이 워낙 바닥나 있어서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폰 보크는 회프너의 전차군 4(전차 400대)를 호트의 우측에 투입하고 볼로콜람스크부터 모스크바로 합동작전을 펴기로 했다. 회프너는 전력이 바닥난 쿤첸의 57군군단을 4군에 떼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폰 보크의 전차전력은 5개 군단에서 4개 군단으로 줄어들었고 보병전력은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다.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최전방의 사기도 함께 떨어졌고 보급은 도착하지 않았고 소련군의 방어선은 시간이 갈수록 두터워졌다.

히틀러는 마지못해 대규모 충원을 허락하며 10~11월에 397대의 전차를 보냈다.

 

소련 서부전선군은 13개 전차여단의 328대와 1근위기계화보병사단이 아직 남아 있었다. KV-1T-34210대여서 상당한 전력이었다. 1011, 아르한겔스크Archangelsk에 영국 수송단이 마틸다Matilda전차 20대를 내려 놓았고 30일에는 다시 발렌타인전차 76대를 내려놓았다. 모스크바는 영국전차로 146전차여단과 독립전차대대 4개를 편성했다. 1122일에는 200대의 전차가 더 도착할 예정이었다.



러시아의 최대 무역항 중 하나인 아르한겔스크의 위치입니다. 표트르대제가 겨울마다 봉쇄되는 아르한겔스크 대신에 상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를 개발했지만 2차대전 당시에는 봉쇄되어 있어서 영미 렌드리스는 거친 북극바다를 헤치며 아르한겔스크까지 가야 했습니다.


북부집단군이 레닌그라드를 함락시키고 모스크바와 아르한겔스크 교통로를 끊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소련군 전차병은 영국전차의 2파운드(40mm)포나 굼뜬 기동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독일군의 3.7cm5cm 대전차포가 뚫을 수 없는 60~75mm 중장갑은 마음에 들었다. 특히 영국의 장갑은 러시아의 니켈함유 1%에 비해 3배나 높았기 때문에 그만큼 피탄에 안전했다.

2파운드 주포는 원래 보병지원전차였는데도 고폭탄이 없어서 보병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그래도 11~12월 결정적인 시기에 모스크바에 투입된 전차전력의 10%를 차지한 귀중한 전력이었다.



태풍작전 당시가 아니라 이듬해 봄에 전선으로 실려가는 마틸다전차입니다. 가장 얇은 부분이 20mm (3호전차는 8mm)로 독일전차에 비해 강력했지만 오프로드 시속이 14km에 불과한 굼벵이였습니다. 보병지원전차인데도 적재한 93발 모두 철갑탄인 뭔가 이상한 조합이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듯이 소련 전차장갑은 포탄을 튕겨내더라도 차내에서는 장갑 안쪽의 철조각이 날아다녀서 부상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조악한 품질의 초기 T-34는 서류스펙과 달리 방어력이 무척 취약했다는군요. 

 

전차는 적군의 상징과 같아 사기를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고 31전차여단은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10월혁명 퍼레이드에서  붉은광장을 거쳐 전선으로 곧바로 향했다. 그리고 카투콥의 4전차여단은 1근위전차여단으로 개칭했다.

최고사령부는 활약한 부대에게 근위부대 이름을 붙이고 중전차를 우선 배정해서 전력을 유지했다. 그렇지만 1941년 말 당시에는 워낙 전차소모량이 많아서 근위전차부대는 거의 만들지 못했고 독립전차대대나 중대를 만들어 각 군에게 배정했다.


 

주콥은 귀중한 휴식시간을 이용해 새 병력을 모스크바 전방의 방어선에 투입하고 코넵에게 칼리닌전선군을 맡겼다. 코넵은 독일 9군에게 반격해 폰 보크 병력을 모스크바에서 유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회프너의 전차부대는 칼리닌과 이스트라Istra 사이의 라마Lama강을 뚫고 모스크바로 접근하려고 했는데 이 지역은 코멘코Khomenko30군과 로코솝스키Rokossovsky16군이 지키고 있었다. 로코솝스키는 보병사단 5개와 전차여단 5(250)를 새로 받아 전력을 크게 보충했지만 30군은 아직도 허술한 상태였다.

나로-포민스크Naro-Fominsk(지도 참조) 주변은 5, 3343군이 전차여단 8(450)와 함께 방어했다. 11월 중순이 되자 서부전선군은 전차여단 14(1,000)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중에 중전차는 200대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독일군 3/4호전차에 못 미치는 경전차였다.


 

독일군은 모처럼 갖는 2주의 휴식을 환영했지만 주콥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는 독일군의 집결을 방해하려고 끊임없이 반격을 시도했다. 118~12일 기간 동안 로코솝스키의 전차여단과 독일 10전차사단 사이에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7전차연대장의 전차를 파괴하는 전과도 올린 반면에 극동에서 새로 도착한 58전차사단의 반격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58전차사단은 200대의 경전차로 5보병사단을 공격했다가 14~152일 만에 30%의 전차를 잃었다. 사단장 코틀랴롭Kotlyarov은 문책성 처형대신에 자살을 선택했다.

주콥의 연이은 반격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로코솝스키의 전력만 축냈다. 58전차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여단도 중전차 30%를 잃었고 오히려 독일군의 마지막 도박을 위한 판돈만 올려주었다.


 

독일의 태풍 후반전은 전형적인 협공으로 호트와 회프너가 로코솝스키의 16군을 궤멸시키며 모스크바 북쪽의 야크로마Yakhroma(지도 참조)로 진격하고, 폰 클루게는 쿤첸의 전차지원을 받아 나로-포민스크를 점령하고, 구데리안은 툴라를 거쳐 모스크바로 북진한다는 계획이었다.



폰보크는 3개 전차집단이 큰 무리없이 모스크바 동쪽에서 연결될 것으로 믿었다. 그렇지만 중앙집단군은 전반전에 투입했던 70개 사단의 절반 밖에 안되는 36개사단만 투입할 수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측면을 노리는 소련군의 반격에 대비해 남겨두어야 했고 그 동안 승리를 이끌어주었던 공군도 대부분 지중해전선으로 불려갔기 때문에 겨우 300기만 지원할 수 있었다.

철도가 그자츠크, 볼로콜람스크, 칼루가까지 연결되었는데도 수송열차가 부족해서 보급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더구나 동부전선 개전초에 히틀러가 탄약생산량을 줄였기 때문에 마지막 도박의 순간에 포탄이 크게 부족했다. 연료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후반전은 1115, 1전차사단이 칼리닌 부근의 30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고 56군군단이 17일 라마강 도강지점을 확보했다. 회프너는 볼로콜람스크 부근의 로코솝스키 방어선을 뚫고 클린Klin(위 지도 참조)로 전진했다.

다시 한 번 독일전차는 소련 방어선의 연결지점을 정확하게 돌파해 1630군을 단절시켰다. 18일 늦은 오후가 되자 16군은 이스트라 방면으로 후퇴했고 렐류센코는 클린으로 급히 달려와 무너지는 30군의 지휘봉을 잡았다. 보병은 별로 없었어도 3개 전차여단과 58전차사단의 패잔병으로 클린 주변에 방어선을 다시 만들었다.

 

렐류센코는 얼마 안 남은 중전차덕분에 호트를 5일 동안 클린에 잡아 두었다가 2전차사단이 배후를 위협하자 후퇴했다. 스탈린은 주콥에게 모스크바를 방어할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200대의 전차만 더 있으면 막아내겠다고 대답했다. 스탈린은 줄 수 있는 전차가 있었다면 벌써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1125, 적군은 모스크바 부근까지 밀렸을 뿐만 아니라 전차도 부족했다.

로코솝스키의 16군은 이스트라에서 슈툼메의 40군군단을 막아내야 했는데 SS사단 라이히와 10전차사단은 보로디노에서 함께 출발해 78보병사단을 매일 몇 km씩 밀어냈다. 78사단 사단장 판필롭Panfilov이 박격포탄에 전사했고 16군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모스크바는 시베리아에서 막 도착한 78보병사단을 증원했다. 그리고 146전차여단(발렌타인전차 42)도 지원했다.

시베리아 부대는 처절한 저항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회프너는 11전차사단을 재투입했다. 라이히사단은 3일간의 전투에서 926명을 잃었지만 27일에 이스트라를 점령했다. 로코솝스키는 물러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죽으라는 주콥의 명령에 몹시 화를 내며 모스크바 북서쪽 35km 지점에 다시 방어선을 만들었다.

 

이스트라와 클린에서 벌어진 격전 때문에 독일군의 보급은 다시 심각해졌다. 소련군도 보급난에 시달리고 동계군복을 갖춘 병사가 많지 않았지만 조국의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했다. 소련군은 막바지 전투직전에야 14.5mm PTRD-41 대전차총을 보급받았다. 이 총은 개전 직후에 생산되었지만 실수로 14.5mm 총탄을 11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PTRD-41은 독일전차의 경장갑에 효과가 있었고 무엇보다 보병이 전차를 상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기가 크게 올랐다.

27일 새벽, 호트는 7전차사단의 전투단으로 모스크바-볼가Moskva-Volga 운하다리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38전차 중대 하나만 운하를 건널 수 있었고 4시간 후에 58전차사단의 T-26전차가 반격을 시작했다.

전차엽병의 도움을 받아 막아냈지만 소련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교두보를 더 이상 지켜낼 수 없었다. 29일 밤 2시에 야크로마 교두보를 포기하고 다시 운하를 건너왔다.



대전초에 대단한 위력을 자랑했던 PTRD-41 대전차총입니다. 소프트스킨인 장갑차나 트럭은 물론이고 3/4호전차의 측면장갑도 뚫었습니다

대전말까지도 들고 다녀서 독일중장갑전차에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텐데, 전차병의 관측창을 노려 부상을 입히거나 운전과 사격을 방해하는 효과는 충분했습니다. 발의 대전차총탄이 사방에서 날아든다면 관측창에 눈을 대고 있을 전차병은 없었을 겁니다. 그 때에는 이미 잠망경은 부서지고 없었을테고요. 

 

11월 말이 되자, 슈툼메의 40군군단은 크라스나야 폴랴나Krasnaya Polyana까지 진격했다가 발이 묶였다. 호트는 1, 67전차사단의 전차 80대를, 회프너는 2, 5, 1011전차사단의 170대가 남아 있었지만 연료와 탄약이 완전히 바닥났고 전력도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중앙집단군은 11월에만 45,753명과 300대의 전차를 잃었는데도 모스크바는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모든 지휘관은 도박이 실패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1전차사단장과 같은 몇몇 광적인 지휘관이 영하 40도의 악천후 속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나아갔다가 말일이 되자 그나마도 완전히 중단되었다.

 

폰 클루게는 121~2일에 별 기대없이 쿤첸의 57군군단 일부와 보병사단 3개로 나로-포민스크의 소련군 거점 양쪽을 공격했는데 의외로 19전차사단과 20전차사단이 방어선을 뚫고 전진했고 주콥이 황급히 반격에 나서 태풍작전의 마지막 전투를 끝냈다.

124, 히틀러는 태풍작전의 마침표를 찍으며 중앙집단군이 그 자리를 지키다가 1942년 봄에 다시 공세에 나서라는 명령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