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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러일전쟁

러일전쟁 뤼순항 전투 - 뤼순항 함락(7부)

by uesgi2003 2016. 2. 11.


제 서재를 열면서 반드시 정리하고 싶었던 뤼순항전투가 이번 이야기로 모두 정리됩니다.

국내 러일전쟁 자료가 상당히 부족해서 쓰시마(동해)해전까지 정리하고 싶지만 다른 시대와 무대를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그 이야기는 좀 뒤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러일전쟁 뤼순항 전투 - 뤼순항 함락(7부)

 

황해전투를 탈출한 함선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지 못했다. 뤼순항으로 향하던 체사레비치는 남쪽으로 선수를 돌려 봉쇄를 빠져나가는데 성공했지만 워낙 피해가 심해서 811일에 독일령 칭타오로 들어가 억류되었다.

구축함 베스슘니이, 베스스트라슈니이, 베스포슈차드니예도 억류되었다. 부르니이도 칭타오로 향하던 중에 좌초되었고 결국 자침되었다.

 

순양함 아스콜드와 노비크는 대한해협으로 순항하다가 어둠 속에서 흩어졌다. 아스콜드는 일본 6전대의 추격을 받아 상하이로 방향을 틀었고 812, 양츠강 하구의 우성에 들어가 중국에게 억류되었다. 구축함 그로조보이도 상하이에서 억류되었다.

순양함 디아나는 원래 뤼순항으로 향했다가 방향을 바꿔 추격을 피했고 칭타오에서 석탄을 보충한 후에 구축함 그로조보이와 함께 상하이로 가기로 했었다. 그로조보이와 떨어진 디아나는 프랑스령 사이공에서 억류되었다.

노비크는 칭타오까지 무사히 탈출했지만 억류를 선택하지 않았다. 함장 폰 슐츠는 일본 본토를 멀리 돌아 추격을 피하기로 했고 사할린에서 석탄을 채우던 중에 츠시마와 치토세의 추격을 받고 전투를 벌이다 침몰되었다.


 

일본은 노비크의 성능이 탐나서 1년에 걸쳐서 인양했고 다시 2년에 걸쳐 개장한 후에 스즈야Suzuya(아래 사진)라는 이름으로 붙였습니다만, 워낙 피해가 컸고 개악에 가까운 개장으로 원래 성능에 훨씬 못 미쳐서 2급 해안방어함으로 사용하다가 1913년에 고철처분했습니다.



체푸로 가서 총독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던 구축함 레슈이텔니이는 일본구축함 아사시오와 카스미의 추격을 받았다. 레슈이텔니이는 이미 억류된 상태였고 무기를 모두 중국정부에 넘겨준 상태였는데 일본구축함은 이것을 모르고 아무런 저항이 없는 레슈이텔니이를 나포해 끌고 갔다.

 

819일부터 31시단과 1예비여단이 뤼순항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기는 15,000명의 병력을 잃은 후에야 요새 II 공격을 중단했고 러시아군은 5,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뤼순항 요새는 돌격으로 함락시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노기는 증원을 기다리며 포격으로 요새를 조금씩 무너트리는 정공법을 택했다. 증원군이 도착하자 919일에 중앙과 서쪽에 공격을 다시 집중시켰다.

중앙의 진지는 쉽게 점령했지만 서쪽 고지는 거듭 실패했다. 일본군은 다시 5,3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1,200명을 잃었다.


 

두 번째 공격도 실패하자, 노기는 280mm 공성포를 기다렸다. 280mm 포탄은 러시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고 105일에는 요새 III 외곽까지 접근했다. 1031, 노기는 조급한 마음에 전체 방어선을 공격했고 5,000명을 잃고도 방어선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2,100명을 잃었다.

노기는 11월에 7사단이 도착하자 4번째 공격을 시작했다. 1124, 요새 IIIII을 다시 공격했다가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서쪽 고지를 다시 공격했다. 10일 동안의 전투에서 3군은 16,5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6,000명을 잃었지만 러시아군은 병력을 보충할 수 없었다. 수병까지 투입해도 18,000명 정도의 병력으로 사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결국 서쪽 고지를 차지했고 이제 주변의 요새와 뤼순항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만주에서는 쿠로파트킨Kuropatkin이 랴오닝 부근에 160,000명을 집결시켰고 절반만 방어선에 투입하고 나머지는 예비병력으로 남겨두었다. 오야마의 일본 1, 24군은 140,000명을 집결시켰고 뤼순항의 3군이 합류하는 대로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노기가 계속 뤼순항 공성을 실패하자, 오야마는 더 이상 지체하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826일 러시아 외곽방어선을 공격했다. 쿠로파트킨은 제 때에 예비병력을 투입하지 않는 오판을 저질렀고 주 방어선까지 밀려난 데다가 허둥지둥 투입한 예비병력의 반격은 실패했다.

93, 쿠로파트킨은 예비병력 대부분을 투입 한 번 해보지도 않고 후퇴해 랴오닝과 군수품을 내주었고 뤼순항 구원 가능성도 함께 사라졌다.

일본군은 23,5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17,000명을 잃어서 반격할 전력은 충분한 상태였다.

 

쿠로파트킨은 차르의 명령을 받고 10월 초에 반격(샤헤Shahe전투)에 나섰다. 병력을 210,000명과 758문까지 늘려 170,000명과 648문의 일본군을 압도했다. 중앙과 좌익을 고정시킨 후에 우익을 돌파한다는 계획이었다.

러시아군의 공격은 처음부터 실패했다. 주공인 우익은 겨우 70,000명만 투입해 일본 2군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결국 공세는 1010일에 중단되었고 혼란을 수습한 일본군이 반격에 나서 2일 만에 러시아 주공을 밀어내고 오히려 중앙을 돌파했다.

러시아군은 41,000명을 잃었고 일본군은 20,000명을 잃으며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러일전쟁의 주요 격전지입니다. 랴오닝전투에서 패전한 러시아육군은 샤헤전투에서도 반격에 실패했고 창천전투Mukden Battle에서 패전하면서 만주를 내주게 됩니다.

바다에서도 뤼순항 후에 쓰시마해전에서 발트해(태평양 2/3함대)함대가 궤멸되면서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포츠머스 조약(아래 사진)을 맺습니다.

만약 뤼순항이 몇 개월만 더 버텼다면 러일전쟁의 향방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태평양2/3함대는 뤼순항에 돌입했을 수도 있고 육상에서는 일본육군 3군 8만 명이 뤼순항에 묶인 상태에서 유럽국경에서 이동한 러시아 정예군으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뒀을 것입니다.

 


봉천전투는 이미 정리해두었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646


http://blog.daum.net/uesgi2003/648

 

뤼순항은 황해해전 후에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일본해군도 정찰, 수뢰제거, 지원포격 정도의 작전만 펼쳤고 러시아해군은 수뢰설치나 공성포에 대한 대응포격 정도가 전부였다. 92, 구축함 하야토리가 정찰 중에 수뢰에 침몰하자 고도는 대형함선의 접근을 금지시켰다. 구축함 5개 전대와 어뢰정 4개 전대로만 뤼순항을 봉쇄했다.

918, 소형 해안전투함 헤이옌이, 1011일에는 구축함 하루사메가, 1026일에는 장갑순양함 아사시가, 112일에는 구축함 오보로가, 116일에는 포함 아타고가, 1123일에는 어뢰정 66호가, 1130일에는 순양함 사이옌이 수뢰에 침몰하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헤이옌은 청일전쟁에서 노획한 철갑전투함입니다. 수뢰에 큰 피해를 입고 좌초되었다가 폐기되었습니다.


 

사이옌도 청일전쟁 노획이었고 뤼순항전투 당시에는 이미 가치를 다한 상태였습니다.

 

러시아함선은 823일에 수뢰와 부딪친 전함 세바스토폴을 제외하고 모두 수리를 마쳤다. 일본군의 포격이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탈출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함대사령관 우크톰스키Ukhtomski는 실패할 것이 뻔하다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총독 알레세엡은 비렌Viren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알렉세엡의 기대와 달리 새 사령관은 915일에 레트즈비자나, 포비에다, 바얀만 움직일 수 있고 나머지는 포격을 맞아 대대적인 수리를 다시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순양함 팔라다는 다른 함선의 무장을 보강하느라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다른 함선의 무장도 심각한 상태였다. 37~47mm 포는 거의 모두 요새로 옮겼고 75~152mm도 일부 제거한 상태였다. 함선의 수병 20~50%를 방어전에 투입했기 때문에 일본함대와의 전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면 외곽 방어선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비렌도 탈출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뤼순항 내부에서 해상요새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본연합함대가 뤼순항을 계속 봉쇄하게 만들어서 블라디보스토크의 순양함함대와 지구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2/3함대의 부담을 덜어주기로 했다.

알렉세엡도 더 이상 탈출을 종용하지 않았다. 소형함선만 항구 밖을 오가며 정찰과 수뢰제거 작업을 했기 때문에 포함과 구축함의 피해가 급증했다. 819일부터 1115일까지 3개월 동안 구축함 4척과 포함 1척이 침몰하거나 피해를 입었다. 손상된 구축함은 견인되거나 귀항해도 수리를 하지 않았다.

 

노기는 280mm 곡사포를 기다렸다. 225kg의 포탄을 8.5km까지 날려보낼 수 있는 이 포로 뤼순항 요새를 무너트릴 수 있었다. 615, 18문을 실은 히타치마루가 블라디보스토크 순양함전대에 격침되면서 큰 차질이 생겼다.

다급하게 사세보 군수창에서 76mm 10문을 보냈지만 공성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시 120mm 전함포 6문을 보냈고 그 중에 한 문은 발사 직후에 터져버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도 그 가치를 발휘했다.


 

포격을 받은 러시아함선은 관측을 피해 동쪽으로 이동했고 일본군은 짐작으로 포격을 계속 했다. 중포의 위력이 입증되자 8월 말에 152mm 2문과 120mm 4문을 더 투입했다. 그리고 간절히 기다리던 280mm 6문이 드디어 도착해 102일부터 포격을 시작했다.

이 때에는 이미 외곽방어선을 어느 정도 점령했기 때문에 50%의 포탄은 항구의 전함으로 향했다. 부정확한 포탄이라도 매일 퍼부으면서 피해를 입는 전함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장거리에서 날아오는 120~152mm 포탄은 별 문제가 없었지만 280mm 포탄은 차원이 달랐다.

고고도에서 내리 꽂히는 225kg의 포탄은 갑판이나 선체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 큰 피해를 입혔다.





 

280mm 12문과 152mm 2문이 더 추가되었다. 152mm1022일부터 포격을 시작했고 280mm26일부터 가세했다. 280mm 18, 152mm 4, 120mm 10문과 기존의 육군 중포와 공성포가 뤼순항 내부를 맹폭했다.

280mm 30,000, 152mm 5,000, 120mm 17,000발을 발사했고 25~30%가 러시아전함을 노렸다. 아무리 부정확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해 항구전체를 내려다 보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고지점령 전후의 피탄비교입니다. 관측소와 포대연결 후에 피해가 급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침몰 후에도 포탄을 맞았습니다. 


 

125일 관측소가 포대와 연결되자, 노기는 정면돌격을 중단하고 뤼순항함대 궤멸부터 노리기 시작했다. 이미 대부분의 수병과 중포를 방어선에 내보냈기 때문에 전함은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125, 전함 폴타바Poltava가 탄약창을 맞고 폭발하며 침몰했다. 6일에는 전함 레트비잔Retvizan이 여러 발을 맞고 가라 앉았고 페레스베트Peresvet와 포베다Pobeda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두 전함은 순양함 팔라다Pallada와 함께 7일에 침몰했다. 장갑순양함 바얀Bayan이 중파되었고 포함 길야크Gilyak가 침몰하고 수뢰함 아무르Amur가 수리 중에 전복되었다. 바얀, 어뢰포함 브사드니크Vsadnik, 포함 보브르Bobr가 차례로 침몰했다.

세바스토폴만 유일하게 피탄되지 않았는데 함장이 포격에 앞서 외곽으로 피신한 덕분이었다. 포함 오트바즈니이Otvazhnyy와 구축함 7척도 그 뒤를 따라서 최후를 잠시 모면했다.






 

일본군은 세바스토폴과 다른 함선의 피신을 알아챘다. 도고는 탈출하기 전에 어뢰공격을 명령했지만 세바스토폴은 그물망(사진 참조)을 쳐 두었고 육상포대의 엄호를 받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1216일까지 계속 공격을 시도했고 결국 선미에 한 발을 맞춰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신에 어뢰정 2척이 침몰하고 15척이 파손되었다. 포함 오트바즈니이도 손상되었고 구축함 한 척은 일부러 좌초시켜 침몰을 면했다.



 

뤼순항 함대가 궤멸되었는데도 뤼순항을 봉쇄하다가 1213일에 순야함 타카사고가 수뢰에 침몰하자 도고는 함대를 귀항시켜 보급과 수릴르 받게 했다.

일본육군은 뤼순항함대 처리가 끝나자 중포를 러시아 요새로 돌렸다. 1215, 요새방어의 진수라고 불리던 콘드라티엔코Kondratienko장군이 280mm 포탄에 전사했고 일본군은 겨우 1,500명만 잃고도 요새 IIIII을 점령했다.



공병출신이라 요새강화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콘드라티엔코장군입니다. 

 

궁지에 몰린 요새사령관 스테셀Stessel장군은 11일에 항복협상을 제안했다. 함대사령관 비렌은 전함 세바스토폴을 포함한 나머지 함선의 자침을 명령했고 외곽에 머무르고 있던 구축함 6척은 체푸와 칭타오로 탈출해 억류되었다.

22일 오전 9, 러시아군은 항복했고 15일까지 뤼순항을 완전히 넘겨주었다.



당시만 해도 항복 후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중앙 좌우가 노기와 스테셀입니다. 노기는 무모한 정면돌파의 피해 때문에 자살했고 스테셀은 명예항복의 책임으로 사형될 뻔하다가 사면받고 1차대전까지 참전했습니다.


아래는 항복 후에 시체를 처리하는 러시아군입니다. 

 

 

뤼순항 함락과 함께 러시아 제1 태평양함대는 사라졌고 일본연합함대이 제해권을 차지하면서 먼 여정을 떠난 제2와 제3 태평양함대의 상황이 무척 위험해졌다. 뤼순항함대가 존재했거나 탈출했다면 2/3함대와 함께 전력을 배가시키거나 일본연합함대의 등뒤를 노렸겠지만 이제 도고는 더없이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뤼순항 공성에 투입되었던 80,000명의 3군이 중포를 이끌고 만주에 합류해 러시아육군을 위협하게 되었다